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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영 Jul 23. 2023

얼렁뚱땅 대출카드

가끔은 지인찬스


우리 회사는 2개의 동으로 나뉘어 있다. A동 그리고 B동. B동에서 시작해서 2년 반이 지난 지금도 같은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있다. 같은 공간이지만 그 시간 동안 바뀐 것들이 눈에 띈다. 물리적으로 바뀐 것이 있다면 자리.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생각보다 한 회사에서 퇴사와 입사가 잦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정을 붙이거나 데면데면하던 사람도 언젠가는 떠나고 새로운 사람이 온다. 나도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입사자이자 퇴사자였다. 다른 곳으로 떠난 사람이 생기면 새로운 사람이 오기까지의 짧은 기간이 있다. 그 사이에 자리가 바뀐다. 새로운 시야를 갖고 싶었던 동료들이 발 빠르게 움직인다. 나도 지금의 자리로 정착하기까지 한 번의 이동이 있었다.


처음 자리는 사무실 안쪽으로 들어갈 때 왼쪽, 오른쪽 나뉘는 갈래길의 딱 그 가운데 자리였다. 누군가 입구에서 들어오면 눈길이 가고, 모니터를 보고 있어도 많은 사람들이 이동하는 실루엣이 아른거리는 자리다. 덕분에 사무실에 들어오면 가장 먼저 인사하는 사람이 되었고 얼굴을 빠르게 외울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가운데 자리는 사방팔방에서 들리는 작은 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 어떤 이가 무슨 프로그램을 시작하고, 이 공간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스며들 듯 알게 된다.


이윽고 옮겨간 자리가 오른쪽 골목에서 덜 들어간 안쪽(이렇게 밖에 설명하지 못하는 어휘력에 실망스럽다)에 있다. 처음 자리보다 조금 더 들어가니 시야가 차단되고 집중이 잘 된다. 서론이 길었지만, 결론은 내 오른쪽 자리의 동료가 빌려준 책을 읽고 있다. 제목은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 책을 빌려주는 것을 좋아하는 그녀는 책을 좋아하고 빌려주는 도서관 같은 동료다. 마침 내가 가지고 있던 책인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를 건네며 교환했다. 서로에게 일주일간 빌려주는 대출카드를 써주었다.



대출카드에는 서로 책을 교환한 일시가 적혀있다. '반납일 : 2023년 7월 19일 13시 49분'. 지금 글을 쓰는 동안에도 서로 연체된 상황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다음 날 얼렁뚱땅 자동연장을 하기로 합의했다. 참 다행이다. 매력 있고 재미있는 이 책을 한 번 더 읽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110p

어떤 월화수목금토요일을 보냈건 간에 일요일에는 늦잠을 잔 뒤 천천히 아침을 먹고선 후식과 함께 텔레비전 앞으로 가고 싶습니다. (중략) 다 보고 나면 옆 사람도 저도 스르륵 잠이 들겠죠. 꿈에선 여러 영화가 섞일 테고요. 낮잠에서 깬 뒤엔 부은 눈으로 서로에게 물어봅니다. 무슨 꿈꿨냐고. 그럼 잠냄새를 폴폴 풍기며 각자 호소합니다. 방금 꾼 꿈이 얼마나 무섭거나 이상했는지. 다행히 그것은 모두 꿈입니다. - 이슬아


200p

제가 아무리 궁상을 떨었어도 작가님의 힘든 시절 앞에서는 공손해지는 것처럼, 작가님의 행복한 기억 역시 제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 남궁인


205p

첫 번째 편지에서 선생님은 말씀하셨어요. “문득 남을 생각하다가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서간문의 본질”이라고. 사실 저는 쭉 반대로 생각해 왔답니다. 서간문의 본질은 자기만 생각하던 사람이 문득 남을 돌아보게 되는 과정이라고. 양쪽 다 진실일 것입니다. 서간문의 본질은 다양할 테니까요. - 이슬아


215p

우리 사이엔 늘 오해가 있고 앞으로도 그럴 테죠. (중략) 서로를 모르니까요. 오해는 흔하고 이해는 희귀하니까요. 그러나 우리의 훌륭한 동료 작가 요조는 [실패를 사랑하는 직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른다는 말로 도망치는 사람과 모른다는 말로 다가가는 사람. 세계는 이렇게도 나뉜다.” - 이슬아


240p

저는 운다고 달라지는 일이 많다고 느낍니다. 때로는 작가의 역량이 얼마큼 정확하게 슬퍼하며 공명할 수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도 생각해요. - 이슬아.


251p

그 일이 힘들다는 것을 알기 위해 꼭 직접 해볼 필요는 없다는 선지자의 충고입니다. 그러고 보니 세상일은 꼭 직접 해봐야 할 일과 반드시 직접 하지 않아도 되는 일로도 구분되는 것 같습니다. - 남궁인




자동연장 후 3일 동안 매일 아침 한번 더 읽었다. 읽을수록 매력 있고 재미있는 책이었다. '서간문'이라는 형식을 빌려 서로를 더 넓게 이해하고 궁금해하는 과정이 나도 누군가와 편지를 교환하며 시작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주로 생일날 편지를 쓰던 경험을 돌이켜보면, 책에서 남궁인 작가님처럼 '남을 생각하다 나를 돌아보는' 순간도 있었고 이슬아 작가님의 말씀대로 '나만 생각하다 남을 돌아보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솔직하게 나의 생각을 전하고 싶을 때 썼던 편지는 말보다 글이 강하다는 것을 알게 했다. '아, 편지 쓰고 싶다.'라고 마지막 장을 덮으며 나도 모르게 내뱉었다. 물론 러브레터도 좋지만 저 멀리 있는 친구에게, 가족에게, 동료에게 특별한 날이 아닌 날에도 편지를 건네는 용기를 가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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