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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쏭 Mar 06. 2019

발리에선 고민따위 넣어둬 결국엔 다 잘될거야

힐튼 가든 인 발리

덴파사르 공항 입국장에서 오만가지 감정에 휩싸여있을 때 순박하고 성실해 보이는 발리 청년이 다가왔다. "미스타 쏭? 저를 따라오세요" 그 청년이 운전하는 봉고차 같은 것을 타고 다른 한국인 가족과 함께 공항을 빠져나왔다.


자신만의 산업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관광업으로 먹고사는 발리의 밤거리는  흔히 보았던 고층 빌딩의 반짝이는 불빛 없이 한없이 어두웠다. 우리 같은 관광객을 태운 것으로 추정되는 다른 봉고차들과 젊은이들의 오토바이만이 나란히 길을 달리고 있을 뿐이다. 청년의 인상이 이 정도로 좋지만 않았어도 그리고 함께 탄 가족이 없었다면 어딘가로 끌려가는 기분이 들 정도의 어두침침한 느낌이었다. 보이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딱히 할 말도 없었지만 아이가 혹여나 무서워하지 않을까 싶어 의도적으로 쓸데없는 말들을 던져냈다. "와! 오토바이가 많네! 와! 나무가 많네!" 등. 3살 배기의 짧은 대답 "여기가 발리야?." 마치 ' 이곳은 정말 마땅찮다' 고 말하는 듯했다. 비행기에서 내릴 때만 해도 옥타브가 높은 라까지 올라갔던 목소리가 낮은 도 정도로 떨어져 있었다. 우리 뒤에 앉은 가족은 호텔까지 가는 5분여 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도착한 호텔은 생각보다 컸고 깔끔했지만 심신이 피로한 탓인지 감흥이 없어서 슬펐다. 동시에 여행지에선 잠시 잊고자 했던, 한국에 해결하지 못한 채 두고 온 문제들이 생각나 머리가 아팠다.  체크인을 하고 방에 오니 어느덧 새벽 2시. 우선 잠부터 자자. 잠을 청했다. 어차피 이 호텔에선 밤과 아침만 해결하고 누사두아로 떠날 예정이었다.





아침 9시쯤 창으로 부서져 들어오는 햇빛에 잠에서 깼다. 굉장히 오랜만에 느끼는듯한  밝은 기운이었다.  아무런 기대 없이 어슬렁어슬렁 조식당으로 갔는데, 멈칫.  뭐지? 하룻밤 사이에 호텔이 달라져있다. 매우 높은 천장을 가진 로비와 바로 이어진 조식당에는 다양한 음식이 정갈하게  차려져 있고 바로 앞엔 열대수가 우거진 수영장이 펼쳐져있었다.  우리가 이렇게 좋은 데를 예약해두었던가?!


새벽 2시경 도착한 힐튼 가든인 발리/ 왠지 외로워보이는 코끼리 한마리가 방을 지키고 있었다



풍경에 놀라며 에어컨 아래 자리를 잡고 앉으니 어제 본 청년처럼 성실하고 친절해 보이는 직원이 음료를 서빙해주었다. 이번 포인트는 바로 아메리카노 빨대였다. 세상에! 대나무 빨대라니!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대나무 빨대로 쪼르륵 마시는 커피와 파인애플 주스라니!


풀장을 바라보며 오믈렛을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나무에서 떨어진 나뭇잎이  둥둥 떠다니고 썬베드 대부분의 사람은 하늘을 보거나 멍 때 리거나 책을 읽고 있는,  간간히 아이들이 첨벙 대는 소리가 들리는 고요하고 평온한 풀장이었다.  작정하고 꾸며낸 리조트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들의 행렬을 보는 것보다, 공항 근처에 있는 도심의 작은 호텔에서 여유를 즐기고 있는 모습이 오히려 더 자유로웠다.  여행 전 어딘가에서 읽었던 <발리에서 할 일은 그냥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다>라는 글귀가 단숨에 다가오는 순간.  한가한 풀장, 하늘, 대나무 빨대, 맛있는 오믈렛, 게다가 저렴한 가격까지 완벽한 조화였다. 누사두아에 거대한 수영장이 기다리고 있을 테지만 이런 수영장을 앞에 두고  떠나기는 아쉬운 노릇. 서둘러 방으로 가서 수영복을 가져와 헛둘헛둘 아침을 소화시키고 선크림을 황급히 얼굴에 펴 바른 뒤 물에 뛰어들었다.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삶>에는 공고한 체계가 필요했고 나름 우리가 세운 그 시스템이 잘 돌아가고 있는 것 으로 보이던 어느 날,  그 체계가 한꺼번에 무너져내리는 것을 목도하며 떠난 여행이었다.  시국에 여행이라니 정신이 나간 거 아닐까 자문하면서도 사실 한켠엔 제발 발리가 지난한 일상에 구원이 되길 바라고 바랐다.  이런 나에게 이 곳 풀장의 분위기는 무언가 다른 평온함을 주었던 것이다. 현실과 아주 동떨어진 것도 아니고 그저 "네가 뭘 하다 왔는지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여기서 농땡이나 피우다 가거라" 하는 느낌이다. 전히 문제는 나에게 있었지만 모든 것이 희미해졌다. 정말 그래도 될 것 같아서 걱정 없이 누워있는 기분. 사실은  애써 구원을 찾으려했을지도 모르겠으나,  그래도 좋았다.


아! 단순한 인간이여. 발리는 정말 아름답군요!






"다행이다. 후회할까 봐 걱정했어. 어제 공항은  무서웠잖아. 애기랑 온 사람들도 거의 없고 말이야. 분위기도 어두우니 괜히 왔나 싶더라고. 하마도 왠지 침울해 보였어.  근데 여기 좀 좋은 것 같아" 어제 마음속 한가득 담고 있었던 말을, 혹여나 말로 내뱉어버리면 후회가 현실이 될까 봐 꾹꾹 눌러왔던 말을, 속사포처럼 쏟아냈다. 이젠 이런 말을 해버려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결국 우리는 체크아웃 시간을 2시간 연장했다.  꼬맹이가 일본, 한국, 호주에서 온 아이들과 함께 왜인지 수영장 한편에 떨어진 꽃잎을 모으는 작업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굉장히 비생산적이고 그만큼 즐거워 보였다. 나는 물 위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누워 발리의 태양을 온몸에 받아내며 가라앉지 않을 정도로만 손을 저었다. 세상 최고의 만고땡이 된 것 같았다.  고민따위 넣어둬, 결국엔 다 잘될거야. 주문을 외우며 잉여로 가득 찬 시간을 착실히 채웠다.


이제 누사두아 리조트로 다. 마음을 조금은 놓았고 기대감이 다시 몽실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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