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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프릴 May 15. 2019

이토록 사랑하는 존재라니

아이와 오키나와,  시간을 나누다

남편은 여름이 되면 늘 오키나와 이야기를 했다. 본인은 선글라스를 귀찮아하던 사람이었는데 10년 전 오키나와에서 작렬하는 태양 아래 다니다 보니 눈알이 타는 것이 느껴졌다면서, 그때부터 생존을 위해 쓰기 시작했다고 말이다. 그러면서 선글라스를 스윽 양쪽 귀에 올렸다.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남편이 왠지 선글라스 쓰는 것이 과거의 자신에게 유난처럼 보일까 봐 어색해서 저렇게 말하는 걸까, 아니면 남다르게 뜨겁기 때문에 그 어떤 볕에 견주어도 지지 않을 태양인 걸까, 전자라면 다소 촌스럽다고 생각하며 피식 웃곤 했다.



그 오키나와의 빛이 우리가 도착한 이튿날 아침의 침대로 쏟아져내렸다. 대강 단장을 하고 1층으로 내려가 아침을 먹으며 밖을 보니 창 너머 나뭇잎들이 한없이 살랑거렸다. 나뭇잎 위로 빛이 반짝였기 때문에 바람이 아니라 어쩌면 빛을 받고 상글거릴지도 모른다고 느꼈던 정도의 싱그러운 햇살이었다. <아, 오늘은 계획을 바꿔야겠어> 아침 식사 후 오전엔 호텔 수영장, 오후엔 놀이터에 가는 것으로 하루를 보낼 참이었는데 오전을 호텔에서만 보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내 비오스의 언덕이 떠올랐다. 사실 비오스의 언덕은 우연히 “아이가 있으면 추천한다”는 댓글 하나 보고 알게 되었는데 츄라우미나 만좌모처럼 알려진 관광지가 아니어서 그런지 정작 그 댓글 외에는 유아 동반 여행객의 후기가 없어 접었던 곳이었다. 하지만 그 어디를 가더라도 망하지는 않겠다 싶었던 하늘이었으니, 선글라스 세 개를 챙겨 들고 호텔을 나섰다.  인터넷의 시대에서 수많은 후기에 낚여왔고 그만큼 실망했기 때문에 특히 아이와 함께 확실하지 않은 관광지는 시도하지 않았는데, 이런 즉흥적인 출발에 꽤나 쫄깃한 기분이었다.


나무가 울창한 도로를 돌아서자마자 주차장을 가득 매운 차들과 사람들이 보였다. 차에서 내리니 햇볕이 눈알보단 정수리를 먼저 태워버리겠다는 각오로 쏟아져내렸다. 황급히 모자를 쓰고 선글라스로 눈을 가렸다. 아직 3월밖에 안됐는데 남편의 말이 과연 진짜였네. 아이의 손을 잡고 나뭇잎 모양의 화살표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




비오스의 언덕 지도 ⓒ bios-hill webpage
비오스의 언덕 ( ⓒ 2018 by ssongssong )


안에는 넓은 마당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돗자리를 펴놓고 간식을 먹거나 누워있고 어딘가에서는 학교 소풍으로 보이는 30여 명의 일본 아이들과 선생님이 단체사진을 찍고 있었다. 염소 가족들이 있는 마당 안쪽에는 염소와의 셀카를 건지려는 사람들이 염소를 꾀어낼 당근과 카메라를 들고 그들을 쫓아다니는 통에 분주하고 다른 한편에는 닭 무리가 모여 요란스럽게 모이를 쪼았다. 마당은 비오스의 언덕의 1/5에 불과했다. 그 밖의 정원을 운행하는 미니트레인과 호수를 다니는 보트가 있었다.  볕을 받고 녹아내린 마음의 틈새에서 기분 좋은 감정이 통통 튀어나왔다.




우리도 100엔을 주고 당근을 구입해 염소야 염소야 노래를 부르며 따라다니다가, 미니 기차를 타고  25분간 단지를 한 바퀴 구경하고, 물소 마차를 타기 위해 물소 쉬는 시간이 끝나길 기다리며 마당에서 시간을 보냈다. 풀밭이나 해먹에 누워서 과자를 먹다가 한 번씩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닭을 쫓거나 산책하는 염소, 물소들을 따라 뛰어다녔다. 왜인지 나무 외발타기나 훌라후프, 줄넘기 등도 마련되어 있어서, 되지도 않는 외발타기를 해보고 넘어지고 또다시 일어나 보았다. 그러다 다시 풀밭에 돌아와 누웠다. 시간은 모두에게 상대적으로 흐른다는데 아마 여기서는 한없이 느리게 흐르는 모양이었다. 기대도 계획도 없이 왔는데 어느덧 이곳에 흠뻑 빠져 한량같이 시간을 보내게 었다.





비오스의 언덕 ( ⓒ 2018 by ssongssong )


참 이상한 일이었다. 원래의 나는 늘 무언가를 해야 비로소 마음이 편한 사람이었다. 허투루 보내는 시간불안했다. 그러니 아이를 낳은 뒤 해야 할 일이 몇 배로 늘어났기 때문에 더욱 조급해질 법했다. 그런데 아이와 있으면 되려 세상 모든 조급증이 사라진 기분이 든다.  특히 여행에 와서 가만히 아이를 보고 있으면, 시간이 멈춰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단한 장관을 보고 일시적으로 느끼는 감정이 아닌 오히려 너무나도 사소한 모습이라 주위를 기울이지 않으면 그대로 흘러가버릴 장면들이었다. 어쩌면 그 작은 순간에 녹아든 소소하고 세세한 감정을 놓치지 않고 싶어서 나도 모르게 모든 것을 붙잡아 멈춰버렸을지도 모른다. 그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눕고 뛰고 웃고 과자를 와그작 와그작 먹고 있을 뿐인 아이를 보며 여러 가지 상황이 뒤얽혀 감정이 복잡하게 차올랐다가 하나로 단순해졌다. 그리곤 생각했다. 이토록 사랑하는 존재라니 사랑한다는 말에 얼마나 많은 것이 들어있는 걸까. 멈춘 듯 느리게 흐르는 이 시간은 아이에 대한 나의 애틋함을 채워주며 위안이 되었다.   


그 뜨거운 태양은 구름 뒤에 숨었다 나오는 일을 반복했다. 세상 노랫말처럼 부딪히는 바람도 햇살도 평화로웠다.  








이윽고 시간이 지나 물소차 타는 시간이 되었다. 덩치가 무색하게 거의 걸음마 떼는 속도를 가진 우리 물소가 끄는 마차같은 것에 8명이 올라탔다. 일본인 마부의 농담에 모두가 깔깔 웃고 그 말을 못 알아듣는 건 물소와 나와 우리 아이뿐이었지만 다행히 마지막에 마부가 물소에 아이를 태워주어 망할뻔한 체험을 아름답게 마무리다. 이윽고 보트타는 시간이 되었다. 물소들의 산책 행렬을 지나 호수에 당도하니 보트 3척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어 설명이 나온다는 배의 제일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보트를 타고 호수를 돌며 오키나와 식물들을 구경했다.





비오스의 언덕 ( ⓒ 2018 by ssongssong )




비오스의 언덕에선 2시간 정도만 시간을 보내고자 왔는데, 보트를 타고 밖으로 나와보니 어느새 5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출발할 때 했던 걱정이 무색하게 2번의 오키나와 방문 중 손에 꼽힐 만큼 좋은 곳이 되었다. 다음번엔 돗자리랑 도시락까지 챙겨 와서 더욱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봐야지. 자연 속에서 나른하고 여유로운 이곳, 우리는 오키나와에서 우리만의 아지트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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