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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프릴 Feb 02. 2020

낙관주의를 바탕으로 한 롤모델 설정과 그 최후

롤모델에 대하여

이 사회에 롤모델이 없다는 말을 많이들 한다. 믿고 따를만한 어른이 없다는 말이다. 특히, 육아기에 일과 가정 중에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에 내몰리는 여성들의 경우, 자의든 타의든 사회에서 살아남는 사람이 필연적으로 줄어든다. 결국 버티더라도 그 과정을 통과하면서 흑화되거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상처를 지닌 패잔병이 되는 경우가 남성들에 비해 "확률적"으로 높기 때문에, 롤모델 Pool 조차 빈약하다. 롤모델 찾기가 어려운 이유는 하나 더 있다. 남자들이 롤모델을 찾고자 한다면 대부분 "사회적 성공" 혹은 "경제적 성공"을 그 주된 기준으로 염두할 테지만 여자들의 경우 여기에 몇 가지가 더해진다.   "일과 가정의 양립을 얼마나 훌륭히 해내었는지", "가정은 어떻게 건사했는지". "아이는, 나의 사회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 덕분에 잘 자랐는지". 여성의 성공 요건에 너무 많은 것을 가혹하게 주입시키는 것은 아닐까 싶지만, 우리가 지금 처한 현실이, 겪고 있고 쳐나가야 할 현실이 그렇게 많은 것들을 요구하고 있다. 사실 남자들의 경우에도 이런 것들 또한 인생 성공의 요건이 돼야 마땅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아직까지는 그렇지 않아 보이고, 이 것은 점차 바뀔 것으로 기대되므로 논외로 한다.  


솔직히 말하면, 사회적/ 경제적 성공만을 이루기는 굉장히 쉽다. 한 가지만 집중하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손에 가정과 일 두 가지가 쥐어져 있다면, 이 양립할 수 없어 보이는 두 가지를 컨트롤해야 하는 능력까지 갖춰야 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3~4배의 노력과 집중이 필요하다. 내게도 5년 전 이 것들이 손에 쥐어졌다. 주어진 이 길은 어렵고 배운 적도 없지만 잘 해내고 싶다. 하나도 빠짐없이 잘하고 싶다. 하지만 힘들다. 그럭저럭 적응하며 살고는 있지만 급격히 힘이 들 때가 있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을 잘 해낼 어른의 발자취가 있다면 조금이라도 밟아보고 싶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과제를 훌륭히 해져나간 롤모델을 간절히 원하게 된다. 그런 선배가 주위에 있다면 스스로 굉장한 행운이라 여긴다. 정서적으로 황폐한 이 시기에, 위에 적었듯 이토록 빈약한 롤모델 Pool 에도 불구하고 그 비슷한 조건을 만족한 누군가가 마침내 주위에 나타났으니 말이다.


 몇 달 전 미셸 오바마의 자서전 <비커밍>을 읽었다. 영부인으로서 기억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녀 자신도 프린스턴 대학교를 나와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하고, 초대형 로펌인 Sidley의 잘 나가는 변호사였으니 (여기서 버락 오바마를 만났다) 그녀 자신의 커리어를 잘 가꿔왔을 것이라는 당연한 기대가 있었다.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남편도 대통령으로 만든 여성이라니, 나뿐만 아니라 전 세계 많은 여성들의 롤모델이기도 했다. 실제로 출판사 서평에는 "비커밍은 한 소녀가 여성, 엄마, 퍼스트레이디로 거듭나면서 인생과 사람을 알아나가는 성장 스토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책을 반 정도 읽다가 덮었다. 결국 우리와 다를 바 없이 일과 육아에 지쳐 남편과 매일 싸웠고, 일과 육아 사이에서 인생의 목적을 잃고 혼란을 겪었는데, 그녀의 전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리어를 요렇게 저렇게 잘  펼쳐나갔습니다"로 전개되지 않았다. 결국 가족들을 위해 내가 있어야 할 곳은 가정이라는 판단 하에 일은 파트타임으로 줄였고, 가정에서 에너지를 쏟기 위해 직장에서 일은 의도적으로 열심히 하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그러다 전업주부가 되었다. 이 대목에서 어쩜 지금의 나와 똑같을까 다들 이러고 사는구나 하고 대단한 공감을 받았다가, 결국엔 이 사람도 이렇게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삶이면 너무 평범한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싶어 허망해졌다. 물론, 흑인으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사회적 장애들을 헤쳐나간 미셸의 자세나 열정은 존경할만했다. 허나,  모든 딸들에게 주는 메시지라는, 전 세계 여성들의 롤모델이라는 그 타이틀은 억측이 있어 보인다. 결국 그녀가 전방위적 롤모델이 된 데에는 롤모델이 갈급했던 여성들의 낙관주의가 그 배후 아니었을까. 일하는 여성들은 일과 가정 두 가지를 모두 성공한 인생의 선배를 찾고자 하고, 타이틀로는 미셸 오바마가 그 기준에 매우 부합하니 말이다. 내게도 롤모델이 있었다. 대단한 분이라 여겼고 인생의 갖가지 과제들을 밸런싱하는 능력을 따라 배우고 싶었다. 헌데, 돌아보니 나의 롤모델은  내 지독한 낙관주의의 산물이었다. 낙관주의란 노력을 기초로 미래를 바라보는데만 쓰여야 하거늘, 존경할만한 사람을 찾는데 적용해선 안되었던 것이다. 허상이었다. 그리고 그 허상은 대단한 실망감만 안긴 채 사라졌다.


그러던 중 "밀라논나"라는 유튜버를 알게 되었다. 유튜버라고 칭하기도 좀 그런데, 어쨌든 업계에서 원래 유명했던 분이지만 유튜브로 세간에 알려지게 되었으니 유튜버라고 해본다. 밀라논나는 패션 컨설턴트이자 디자이너인 장명숙 교수님의 유튜브 활동명(?)이다. 52년생 (69살), 우리나라 최초의 이탈리아 유학생, 그 시절 워킹맘, 이탈리아-한국 간 교류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기사 작위까지 받은 사람, 과거로 돌아간다면 어떤 것을 고치고 싶냐는 질문에 단호히 "없다. 내가 매우 열심히 살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다. 처음에는 패션업계 베테랑의 패션 센스 등으로 세상의 주의를 끌었다면 지금은 인생수업이라는 말을 듣고 있다고 한다. 댓글에는 "일-가정 양립, 육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셨는지", "자신이 이 삶을 더 이상 버틸 수 있을 것인지" 등등의 눈물 나는 코멘트가 많다. 한 기사에 따르면, 일하는 여성들이 이렇게 '롤모델'에  목말라 있었는지 보여주는 사례라고 한다. 나 또한 깊은 공감과 도전을 받고 있다. 고작 영상으로 알게 된 분이지만, 길을 묻고 자신의 갈림길에서 어떤 선택을 했는지 듣고 싶다. 롤모델이라면 정녕 이런 사람이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허나 이제 나는 실체가 있는 롤모델 찾기는 그만두기로 했다. 롤모델의 좋은 점만 흡수하고 더 이상이 없다면 문제가 없지만 현존하는 인물의 경우 그걸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실체가 있는 롤모델에 대해서는 삶 자체에 대한 존경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갈급함에서 오는 롤모델 찾기와 낙관주의에서 비롯된 무한 신뢰는 이내 나를 흔들어 놓을 만한 실망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너무 잘 깨달았다. 밀라논나 유튜브는 앞으로 계속 볼 예정이고 10년 전 이 분이 쓴 책도 읽었고 인터뷰도 빠짐없이 보았고, 이 분 뿐만 아니라 대단한 여성 리더들이 사회에 많이 계시길 간절히 바라지만, 이제 내게 더 이상 롤모델은 없다. 오로지 내가 되고 싶은 모습과 삶의 양태가 있고 현재 그 모습은  허구지만 그 모습이 언젠가의 내가 되어 실체를 갖게 되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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