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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림팔라 Mar 19. 2019

2배속의 춤사위와 휘어지는 공간들

[서사의 분말상자] 2018.5.9.

이른 저녁 적막한 집안 공기를 담담히 버겨내기는 힘들어서 TV를 켠다.
뉴스 황금 시간대지만 머리 아픈 이야기는 보고 싶지 않아서 케이블로 채널을 올린다. 마땅한 소음이 없어 마냥 리모콘을 누르다 그나마 시끄러운 순간에 멈춘다. 주간 아이돌. 매주 다른 팀을 등장시켜도 분량이 부족하지 않다는 점이 왜인지 씁쓸한 프로그램이다. 데뷔한 지 몇 년이 지났고 최근에 컴백한 여자 아이돌이 열심히 춤을 추고 있다. (여자친구는 아니다. 마침 모든 조건이 똑같지만.) 못 보던 새에 MC는 바뀌었고, 그들은 개편을 맞아 새로운 코너를 가져왔다며 소개한다. '랜덤롤코댄스!'  

아이돌 시장을 잘은 모르지만, 요즘 그래도 미디어에는 나올 법한 아이돌들이 춤연습을 할 때, 가장 많이 욕하는 아이돌은 아마 '여자친구'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물론 그들이 무슨 잘못을 한 것은 아니고, 다만 아이돌 예능에 새로운 바람을 끌어 온 상징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2배속 댄스라는 기괴한 문화현상. 대체 왜 작곡가와 프로듀서가 멋지게 만들어 놓은 최적의 bpm에서 벗어나, 두 배 속도로 노래를 틀면서 만신창이로 춤을 추는 개고생을 하게 된걸까? 어쩌면 시작은 소소한 즐거움이었을 것이다. 내가 동아리에서 기타를 치던 때에도, 밴드 합주를 하면서 나도 모르게 살짝 살짝 빨라지는 박자에 긴장하고, 그러한 긴장감이 오래 지속되다 보면, 어느 순간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세션들이 다 같이 가능한 최대 속도로 소리를 토해내버리는 연주를 하는 순간이 한 번은 오곤 했다. 비슷한 놀이였겠지. 노래를 두 배로 틀어버리고 춤사위를 토해내는 순간에 느껴지는 카타르시스가 있었을 것이다. 생각보다 합이 잘 맞아서 놀랍고 재밌기도 했을 것 같다. 초창기의 '2배속 댄스'란 우리 이런 짓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연습을 너무 많이 해 버렸어요ㅋㅋㅋㅋ하는 일종의 희극이자 조소였다.


랜덤롤코댄스라는 건 노래도 '랜덤'으로 중간에 계속 바뀌고 속도도 '롤러코스터'처럼 빨라졌다 느려졌다 한다는 뜻이다. 거기에 맞추어 춤추라는 뜻이지. 한 아이돌 그룹이 속도를 두 배로 해서 춤을 추었고 좋은 호응을 얻었다. 에서 결코 그치지 않은 피말리는 아이돌 시장은, 점점 그들의 아티스트를 기계로 만들고자 하였다. 어떤 노래의 어떤 부분을 어떤 속도로 틀더라도 하나의 대형을 이루어 칼같이 춤추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 모습이 보이면 그 휘청거림은 웃음거리로 소비된다. 무너지는 모습조차 웃기거나 귀여워야만, 방송이 끝난 뒤 듣게 될 당위성 없는 비방을 조금이나마 덜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음악과 율동이라는 언어보다도 오래 된 감정전달의 수단은 더 이상 표현과 수용이라는 방식으로 실현되지 않는다. 그것은 평가의 영역이며 석차가 매겨진다. 올림픽 금메달 또는 오투잼 7노트 4배속 올콤보 클리어 같은 모습으로.


특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관측자에 대한 물체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시간은 느려지고, 길이는 짧아지며, 결코 정확한 표현이 아니지만, 질량은 늘어난다. (상대성이론의 표면 중의 표면만 핥는 얘기지만, 어차피 우리 모두 그걸 그렇게 명확히 이해하고 있진 않을 것이다.)
더욱 더 빠른 템포로, 조금도 확정되지 않은 값들에 대해, 신속히 반응해야 하는 우리의 하루는 너무나 길고, 누가 우리를 짓누르듯 스스로는 점점 작아져가고, 순간의 무게는 너무도 무겁다. 시공간은 우리에게 춤사위를 지시하는 누군가로 인해 시시각각 휘어진다.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빠르고 적응성 높은 춤을 추어야 하게 된걸까? 분명히 우리는 춤을 추고 싶었다. 언어 이전의 방식으로 전달하고 싶었던 것이 있었고, 내 나름의 모습으로 보여지고 싶은 장면들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춤사위는 얼마나 빠르고 정확한가에 따라서만 판가름 지어지는 것이었고, 아킬레스건에 대일밴드를 붙인 채 구두를 신고 터벅터벅 걷는 우리들은, 어느새 우리의 아픈 발걸음이 예전에는 춤사위였다는 사실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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