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에 밀린 빨래를 말린답시고 제습 모드로 에어컨을 틀어놓고 잤더니, 가벼운 두통이 일었다. 시험기간이라 오늘은 월요일임에도 아무 수업이 없다. 덕분에 12시가 넘도록 침대에 뻗어져 있다가, 두 시 쯤 되어서야 어거지로 침대에서 몸을 꺼낸다. 빨래 건조대가 부족해서 대충 남는 못에다 걸어둔 티셔츠를 입었다. 적당히 걸려있던 편백나무 방향제의 향이 옷에 배겨서 뜻밖에 기분이 흐뭇했다. 별 것 아닌 일상 속에 사소한 기분들. 그래, 이런 페이지가 있었군.
참으로 오래 간만의 일상이다. 한 달 동안 교생이라는 삶의 특별한 몇 페이지를 넘기고 오니, 매일매일이 과제와 발표와 시험과 조별과제와 스터디로 가득가득하더라. 그나마 쉬는 수요일이 많아서 어찌저찌 해나갔다만, 어쨌든 수업없는 날은 밀린 과제를 해치우거나 스터디를 하거나 그도 아니면 집에서 꼼짝없이 뻗어있었으니 하여튼 일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시험 공부를 해야지. 책을 피니 가라타니 고진은 광학적 기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타자의 시선을 도입해야 한다고 했다.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까지 끌고 와서, 무언가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무언가의 밖에 있는 타자의 관점을 이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데카이!
엊그제 보았던 고독한 미식가 서울편이 떠올랐다. 잘 만들어진 이미지의 한식이 아니라 그냥 날 것 그대로의 한국 식당의 모습 속에 있는 고로의 모습이 너무 이질적이었다. 여느 식당에나 있을 것 같은 반찬들을 하나 하나 음미하고 놀라는 그의 모습. 그것이 타자성인 듯 하였다. 나 역시도 오사카를 돌아다닐 때는 같은 제스쳐를 취하지 않았던가.
사랑해요 부산식당
집 앞 식당을 갔다. 부산식당 오징어볶음(6000). 남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나만의 맛집인데, 아마 고로 아저씨도 여기를 들렀다면 감탄하지 않았을까 싶다. 반찬 하나 하나에 주목하니 메뉴가 더욱 훌륭하게 느껴진다. 여름에만 나오는 미역 냉국, 시골 집이 떠오르는 보리차, 간이 잘밴 고사리와 감자, 시금치와 콩나물과 호박조림의 맛. 이유없이 그리운 맛이다. 할머님이 운영하시는데, 정말 손주를 보듯 일하시는 것 같다. 시험기간에 밥을 든든히 먹어야한다며 걱정해주시고, 밥 다 먹어가니까 더 먹으라면서 또 퍼주시고 (원래 밥반찬 무한리필이긴 하다. 항상 내가 리필해주세요 하기도 전에 더줄까?하심)하는 모습. 받아도 될 것 이상의 사랑을 항상 주시던 외할머니의 웃음이 떠오른다. 갈 때마다 힐링과 폭식을 얻고 오는 집이라, 추천하고 싶지만 또 널리 알려져서 사람들 너무 많이 오면 할머니가 힘드셔서 그만두시지는 않을까 불안하기도 하다. 어제 본 이소라의 콘서트에서 '청혼' 뒤의 앵앵콜을 불러달라고 요청하기 어려웠던 것과 비슷한 것 같다. 여기서 더 바라면, 챙겨오지 않아도 될 슬픔과 괴로움을 애써 꺼내실 것 같아서?
하여간 밥을 먹고 카페에 왔고, 두 과목을 공부해야 하는데 어느 덧 이 시간이다. 아마 충분히는 공부하지 못할 듯 싶다. 페이지엔 앞으로 이렇게 잘 다듬지 않은 글도 자주 올릴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