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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아치우먼 Dec 04. 2020

익숙함에 갇혀진 약해진 아름다움

오늘이라는 하루



즐거움과 무거움을 나란히 놓는다.

수능이 있는 날, 10시까지 출근하는 여유로움을

산책으로 채웠다. 1시간을 걸어서 사무실까지. 산책의 즐거움과 일하러 가는 무거움을 나란히 놓는다. 막걸리와 와인을 한꺼번에 마시는 듯 조화롭지 못해 보이지만 다행히도 즐거움이 무거움을 상쇄시킨다. 즐거움의 크기를 제곱하려면 음악과 무념이다.

아무 생각 없이 음악을 들으며 그냥 걷는다. 생각보다 보는 것에 더 집중한다.



슬라브 무곡은 은행잎까지도 춤추게 한다

집을 나서자마자 이어폰을 꽂고 슬라브 무곡 10번을 먼저 틀었다. 뮤직 파라디소에서 들은 드보르자크의 춤곡이랬지. 밀정의 한 장면에서 흘렀다. 춤곡이 이렇게 애틋하고 서글픈 선율이면 사람들의 춤은 어떻게 슬플까? 상대방의 눈빛만 쳐다보며 은근슬쩍 발자국만 옮기는 게 아닐는지. 나도 모르게 고개가 바닥으로 향한다. 빵빵거리던 SUV의 건방짐도 무시하고 내 눈은  바람으로 조용히 움직이는 은행잎 속으로 슬라브 무곡을 얹는다. 슬픔을 색깔로 말하자면 노란 색깔이 아닐까. 가느다란 바이올린 선율과 은행잎이 내게 그렇게 말했다. 슬픔은 가장 원초적인 감정이다. 모두들 울면서 첫 생을 열지 않는가.



곧은 형식만 남았다.

큰 도로를 지나 임항선 산책길로 접어든다. 나뭇가지만 가난하게 남았다. 한 시절의 영화는 사라졌어도 세상을 지탱하는 곧은 형식들은 차가운 바람 속에 남아 있다 -황현산의  밤이 선생이다 중에서.


곧은 형식은 앙상하게 남은 나뭇가지를 일컫는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따스한 햇볕에 풍성해진 나뭇잎처럼 좋은 시절에는 사람도 들끓지만 날이 궂을 때는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사람도 떨어진다. 결국 남은 것은 올곧은 뼈대, 진짜만이 남는다. 나뭇가지가 온전히 추위를 견뎌야지만 또 나뭇잎은 제 풍성함을 피워낸다. 그런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떠나보냈다. 잊히기도 했고 다시 새로운 인연으로 만나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다짐했다.


나뭇잎처럼 가벼운 인연보다 뿌리 깊은 사람들과 부둥켜 엉키기를. 그래도 여전히 바람결에 스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어쩔 수 없이 가벼운 사람과 무거운 사람을 섞어 가며 살 수밖에 없나 보다. 나뭇잎만큼 가벼움만 주며 살아야 할까. 매번 그래도 최선을 다하며 대해야 할까. 아직 그것만은 잘 모르겠다. 명품가방보다 사람을 좋아하는 성격인지라 가벼운 사람인 줄 알면서도 꼭 마음 한쪽을 내주어 다친다. 아직 아무리 쓰디쓰운 맛이라도 사람한테 당한 것보다 더 씁쓸한 맛은 먹어보질 못했다. 올곧은 형식(나뭇가지)은 좀 위태위태하고 초라해 보인다. 한편으로 홀가분해 보인다. 곧 가벼움이다. 관계도 상황에 맞게 비워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자취 시절을 위로하던 카레, 여전히 맛있다.

점심은 좋아하는 카레였다. 그러고 보니 오늘 노란 은행잎과 더불어 점심은 노란 카레. 노란의 연속, 카레는 발랄했다. 맛있으니까. 감자와 당근이 큼지막하게 들어 가 카레와 잘 섞여 있고 와그작 베어 먹는 무김치가 달달했다. 카레에 단맛이 베였다. 세속적이라 그런가. 색깔이 이쁜 것이 나는 맛있다.

카레를 맛있게 먹어야지만 왠지 세련되어 보이는 시절을 지나다 보니 진짜 카레가 맛있어졌다. 남해 촌에서 카레처럼 샛노란 음식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카레가 뭔지도 모르고 카레 돈가스를 시켰을 때 돈가스를 감싸던 노란 액체가 나를 조금 당황하게 했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잘 먹었다. 치자 가루라 생각하고 나도 따라 잘 먹는 척했다. 톡 쏘는 향이 그래도 참을만했다.


카레에 익숙해진 뒤 자취방에 자주 카레 봉지가 나뒹굴었다. 요리하기 쉬운 카레는 여러 끼니를 해결하기 좋은 수단이다. 한 번의 요리로 세 끼니를 해결하는 1타 3피의 효과다. 자주 만나면 좋아지는 사람처럼 자주 먹다 보니 카레는 진짜 맛있어졌다. 나의 후두엽은 노란 카레만 보면 침샘이 먼저 작동한다. 카레는 느닷없이 나를 기쁘게 했다.


마침 카레 같은 녀석이 내게 전화를 했기 때문에 용건 없는 수다를 떨었다.

밥 묵었나? 어. 뭐 묵었는데? 카레. 니는? 나도 묵었다. 뭐 묵었는데? 밥. 아니 짜식아 무슨 반찬? 그냥 김치찌개. 맛있더나? 맨날 묵는 건데.
여기 카레 맛있더라. 담에 온나. 내가 밥 사주께. 됐다. 니한테 밥 얻어 묵으모 체한다. 씰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끊어라. 알았다. 뚝! 뭐지? 왜 전화한 거지. 맞다. 생존 확인이다.
싱겁지만 그런 게 고맙다.


21년 달력이 선물로 왔다.

메신저가 도착했고 같은 일을 하는 선생님이 보내주신 달력이 도착했다. 좋은 일을 한다며 돈 주고 사서 내게 선물로 보냈다. 오, 이런 멋진 작품이. 달력 맨 앞의 문구가 그대로 내게 돌진해 온다.

경승사

경건함이 사악함을 이긴다.

공경하고 엄숙한 기운이 간사하고 나쁜 기운을 이긴다는 말이겠다. 달력을 제작한 한문학과 교수님은 왜 이 단어를 심장처럼 맨 앞에 넣었을까. 즉 착하게 살아라는 말인데, 노장의 눈에도 삶의 해답은 결국 착한 삶인가. 사람에게 공경하고 엄숙해라는 뜻인 것 같아 가벼운 사람에 대한 의문이 풀린다.


선생님은 나에게 달력을 보낸 것이 아니라 해답을 선물한 셈이다. 가벼운 인연도 경건함을 더하다 보면 가볍지 않게 되겠지. 사람과 거리는 잴 수 있어도 무게는 잴 수 없는 것 아닌가. 가볍다고 단정 짓는 것은 나의 사악함이다. 달력을 넘기니 삶의 지혜들이 쫘르륵 펼쳐진다. 한문은 F학점의 기억이 있어 좋아하지 않는데 글귀가 좋으니 21년은 이 달력과 더불어 하루를 열는 것도 괜찮겠다. 고맙고 따뜻한 위로와 선물이다.



맺힌 것은 의외의 것에서 쉽게 풀린다. 지는 사악함에 들지 않도록 나를 노풋상태로 자주 놓아두어야겠다. 익숙함에 갇힌 약해진 아름다움, 오늘 하루 나는 또 0.001m만큼 늙었고 자랐다. 늙지만 않고 자랐으니 밑지는 장사는 아닌 듯.


속이 노란 양배추 쌈을 저녁에 먹으며 오늘 하루는 노랗고 또 노랗다. 달달하다. 슬픔이 노란 색깔이 아니라 달달함이 노랗지 않을까. 달달한 오리 땡처럼.

수정한다. 달달함을 색깔로 표현하자면 노랗다. 하루가 하루 종일 달달했다.


경승사: 경건함이 사악함을 이긴다(단서)


착한 일을 행하여 복을 맞이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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