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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아치우먼 Dec 22. 2020

생각 너머의 생각

길들여진 생각에 켜진 경고등


#사실 놀랐다.

세계적 비상시국인 지금, 예민하고 신중하다. 집 아닌 곳은 어디든 두리번거리고 사람 많은 곳은 피해 다니는 범죄자와 동일한 포스. 잘하지 않는 외식인데도 불구하고 엘리스와 함께 팥죽을 먹고 커피를 사러 갔다. 커피를 주문해 놓고 기다리는 사이 커피 사장님이 붙여 놓은 문구.

<식당은 밥 먹을 수 있는데 커피는 안에서 못 마시게 하네요. 이런 악법도 법이라 지켜야 하니 커피는 테이크 아웃밖에 안됩니다. 코로나는 우리 때문에 발생한 게 아닌데 왜 우리가 이런 피해를 입어야 할까요.>


이걸 보고 나는 기분이 좀 언짢았다. 얼떨결에 나도 모르게 아니, 밥이랑 커피랑 같니? 밥은 꼭 먹어야 하는 거니까 어쩔 수 없는거고, 커피는 안 먹어도 괜찮잖아. 커피는 대화를 많이 하니까, 그렇게 조치를 취한 거지. 그럼 코로나를 다른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만들어 냈데. 모두의 건강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조치니까 그런 거지. 꼭 이렇게 악법이란 말까지 써야 해?

순간, 엘리스가 쉿! 하는 액션을 취했다. 엄마, 좀 조용히 해. 듣잖아. 일단 엘리스의 충고에 말을 멈추었다. 커피를 가지고 차 안에 와서 엘리스가 말했다.

엄마, 장사하는 사람들은 그럴 수도 있지. 자기네들도 하루 이틀 아니고 생계가 위협받는데 불만이 있을 수 있지. 엄마가 만약 커피숍을 했다면 저렇게 말할 수도 있을 거야. 엄마는 그 상황이 안돼 봤잖아.

그렇지. 엄마는 그 상황은 안돼 봤지.

엘리스의 반격에 놀랐다. 내가 편협한 생각을 했다. 조금 부끄러웠다. 어른스럽지 못한 것을 들켰다. 나도 너처럼 생각이라는 그릇에 통념이나 편견이라는 양념을 묻히지 않는 시간들이 있었을 텐데. 자꾸만 삐딱하게 어느덧 내 감정만 앞세우는 기질이 생겨난 걸까. 너는 커피 맛을 막 알아가는 즈음이고 나는 생각의 쓴맛에 적잖게 당황한다.

생각도 늙는다. 생각이 딱딱하게 굳는다.


#또 놀랐다.

경기도 이재명 지사가 학생들에게 동의도 구하지 않고 기숙사를 비우라고 했데. 너무 하지 않아.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코로나가 점점 심각해지니까 병상이 모자라니 그렇게 조치를 취했겠지. 학교 측이랑은 이야기했다던데.

기숙사는 학생들이 쓰는 거니까 학생들에게 이해를 구하고 이야기를 해야지. 학생들이 피해를 입는 거잖아.


국민의 생명이 달린 문젠데, 그 정도는 이해해 줘야 하지 않나. 학생들도 어차피 방학이잖아. 시급하니까 그렇게 조치를 취했겠지.


그래도 이건 아니라고 봐. 당사자들에 대한 이해와 협조가 제일 중요한 거라고 생각해. 학교 총장이 아니고. 그게 권위주의 발상인 거 같아. 내가 학교 총장이니까 니들은 내 시키는 대로 해. 그게 권위주의지.

학생들에게 동의를 구하는 절차가 제일 중요했어.


내가 권위주의에 물든 걸까. 네가 이기적인 걸까.

엘리스의 말을 들으니 타당성이 없는 건 아닌데  비상적인 사태에 권위주의라고 말하니 또 약간의 서운함이 든다. 국민의 생명을 담보하는 문젠데. 그럼 안될까? 네가 틀렸어라고 말할 꼰대적 배짱은 없어 묵묵히 고개만 주억거린다. 살아갈 날의 많은 파도들이 수없이 너의 인생을 스쳐가면 너도 나처럼 닳을까. 진짜 권워주의와 만나면 그 정도쯤은 개껌도 아니라는 걸 알까.


#굳이 변명한다.

직장생활 25년, 매번 자존심 세우기에는 능력도 깡다구도 달려서 대충 맞추고 살았다. 적당히 타협도 하고 모르는 척 눈도 감고, 알아서 기기도 하고. 직장생활 눈치 89단. 맵새 눈, 도다리 눈, 가자미눈. 눈치가 밥이 되었다.

회의만 다녀오면 예민한 과장은 결재판을 집어던지며 너희가 세월호에 탔어야 해, 고함을 칠 때 대체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런 말을 들어야 하나. 컴퓨터에 머리를 떨구고 화면만 째려보았다. 40여 명이 넘는 누구도 결재판이 탕하고 때리는 소리를 박차고 일어나지 않았다. 통장에 꽂히는 숫자만 아니었다면 멱살을 잡고 싶었지만 모두들 참으니 나도 참았다.


생애 최악의 상사였다. 과장의 남동생 장례식에 가 음식을 나르고 부의금을 내고 울었다. 쉬고 싶은데 장례식에서 서빙하는 게 서러웠고 정말 부의금이 아까워서였다. 무려 그 과장은 나에게 부의금을 다섯 번이나 받아 챙긴 뒤 퇴직했다.

아, C~~ foot......

이분의 지상 지랄은 별도 부록감이니 다음에 시간 날 때 자세히 읊조리더라도.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가 바다의 일이 아니라 내 일이 되어 한낱 모래알처럼 자꾸만 존재의 의미가 작아졌다.


사고의 유연함은 폭력 앞에 주눅든다. 세 아이와 부양해야 할 부모가 있는 주부양자는 신념과 철학을 밥보다 앞세우지 못한다. 나쁜 짓은 하지 않았지만 신선하게 살 수는 없었다. 자리를 연명하려면 일단은 툴을 벗어나지 않는 레이스를 그대로 유지해야 하고 기존의 통념을 흔들 수는 없었다. 그게 편하기도 했고 묻어가기도 쉬웠다. 권위주의는 너무 많은 강을 이루어서 발을 뺄 수 없었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는 권위주의와의 싸움이다.

종교전쟁, 독일의 파시스트, 70년대의 독재와 이승만 정권.. 80년 광주, 탄핵, 권력이 인간의 존엄을 침범했던 모든 순간에 대해 싸웠다.

거미줄처럼 일상에 침범한 권위주의에 민감한 눈을 가지는 건 나의 20대가 던진 최루탄과 같은 메타포다. 아무것도 어깨에 지지 않은 20대만이 할 수 있는 세대의 책무라고 너에게 말한다.

아직 익숙해지지 말고 20대의 책무에 최선을 다하라고. 권위주의에 반항하는 일들에 건방짐이나 요즘 것들은 안돼 라는 꼬리표가 달리더라도 결국은 옳은 방향으로 갈 것이다. 새로운 것은 낯설고 신선하며 반드시 관성의 문어발이 잡아당기려 할 것이다. 그래도 앞으로 가기를. 그건 20대만이 할 수 있는 어떤 몸짓일 수 있다.




#인생도 권위주의에 대한 도전이다.

부모라는 권위, 경제권을 가진 사람이라는 권위, 과장 팀장이라는 권위, 선배라는 권위, 남자라는 권위.아, 가진 자라는 권위. 이것에 반항하지 않으면 30대도 생각이 늙는다. 늙는다는 건 길들여진다는 의미. 무섭다. 길들여진다는 것은...


너를 통해 나의 길들여짐을 봤다.

말랑말랑한 너의 시선이 나에게 빨간 경고등을 켠다. 괜히 머리를 쓰윽 흔들어본다. 어지럽기만 하다. 위대한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젊은 친구들과 그토록 토론을 많이 한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사유가 늙지 않기 위해서였다.


네가 말한 권위주의는 작지만 아주 대단한 문제다. 주체가 누구인가에 대한 본질을 꿰뚫고 있기 때문에가장 중요한 출발이다.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고 대학의 주인은 학생이다. 종종 이런 사실이 묵과되기 때문에 권위주의적인 행정이 나온다. 이 결론은 며칠을 묵혀 둔 엄마의 객관화에서 나왔다. 서운함보다 지금은 부끄럽이 앞선다.


아르놀피니의 약혼, 최초의 시민 초상화(시대를 훔친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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