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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아치우먼 Jan 21. 2021

성찰 없는 노화의 얼굴

상대를 거울삼아 내 삶의 방향을 조정한다



국민내일 배움카드를 모르는 사람도 많지만

코로나 위기로 정부사업의 많은 영역이 확장되었다. 거칠게 말하면 많이 퍼준다. 국민내일배움카드 훈련장려금이 월 18만 4천 원에서 30만 원으로 확대되었다. 국민내일배움카드는 전 국민 대상으로 직업훈련 학원에서 하는 훈련비용을 5년 동안 300만 원씩 지원하며 실비 개념으로 140시간 이상 교육에 대해 훈련장려금을 지급하는 제도다.


국민내일배움카드 홍보 리플렛

어제 또 나이 드신 할머니 한분이 직업학교에서 배포하는 전단지를 움켜쥐고 찾아오셨다. 드론 배울라고. 드론을 배워서 뭐하시게요. 농사짓는데 드론 쓸라고. 내가 어르신께 설득했다. 이 훈련은 젊은 청년들에게 취업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사업이다.....

민원은 밀려있지만 그래도 설득은 해보았다. 그분은 끝내 자신의 고집대로 드론을 배우겠다고 하신다.


여우털인지 모를 곱상한 털목도리를 하고 계셨다. 눈빛은 단호하고 자신을 말리는 내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빨간 입술을 꼭 다물었다. 국민내일 배움카드 신청서를 내는 손톱은 네일아트가 빛났다. 이분은 진짜 농사를 짓는 분이 맞을까?


드론은 6개월 과정이며 훈련비용은 1인당 6백만 원을 넘어간다. 6개월 동안 드론 수업에 80% 이상 출석을 하면 한 달에 30만 원씩 훈련장려금을 지급받는다. 대부분 자비부담이 있지만 드론은 자비부담도 없다. 국가산업기간 전략직종이라는 혜택 때문이다. 국가가 전략적으로 육성하는 직업훈련은 교육생이 부담하는 비용이 없다.


이런 경계에서 늘 흔들린다. 저 돈은 내 돈이 아니니 모른 척해도 돼.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 업무담당자인 내가 커트하는 노력을 해야지. 아니지, 나이 들었다고 배울 수 없는 건 아니니까. 내 안에서 서너 개의 또 다른 내가 싸움을 건다. 한다잖아. 괜히 민원 발생하면 나만 귀찮아져. 별나게 굴지 말고 하던 대로. 네가 무슨 나라를 구할 것도 아니면서. 6백만 원 드론 과정을 꾹 승인했다.



나도 드론은 만져보지 않아서 딱히 이 할머니의 직업훈련이 타당하지 않다는 근거는 없다. 그러나 보편적인 시각으로 할머니에게 호소했지만 할머니는 끝내 고집을 꺾지 않으셨다. 누가 무엇 때문에 이 교육을 받고 무엇 때문에 국가가 이런 제도를 운영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나, 내가 타 먹을 수 있는 나라의 공돈이 절박하다.


고집을 넘어 아집이 머문 얼굴은 나도 굳게 만든다.

아, 미치겠네. 내가 드론을 배워보든지 해야지. 정책을 시행하는 사람들이 디테일이 없어. 에잇!



다음 날 또 한 분의 할머니가 찾아오셨다.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고 싶으시다고. 할머니 연세는 67세였다. 그것도 만 나이였다. 심호흡을 한 뒤 할머니께 설명을 드렸다. 할머니는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취득하더라도 취업하기가 어렵다. 못하도록 하는 규정은 없다. 그러나 취업을 지원하는 제도이니 안 하시는 게 좋을 것 같다. 할머니는 내 이야기를 가만 듣더니 고개를 끄덕이셨다. 할머니는 드론을 배우러 온 할머니보다 행색이 더 초라했다.


내 말에 동의하며 자신의 의견을 접었다. 나는 할머니에게 국민 취업지원 제도를 안내했다. 취업을 원하는 할머니에게 더 적절한 지원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물론 취업도 쉽지 않은 나이였지만 그것마저도 포기하라고 할 수는 없었다.




이기적인 연민

나도 모르게 민원을 은근히 구분하고 있다. 지원이 필요한 사람, 필요 없는 사람. 대체적으로 어려워 보이는 사람. 절실해 보이는 사람.


연민이란 자신과 비슷하다고 우리가 상상하는 타인에게 일어난 해악의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이다.

<스피노자, 에티카>


나는 연민의 대상이 찾아오면 조금 더 친절해진다. 좀 사는 듯해 보이면 데면데면하고 굴고 뭔가 어려운 구석이 있어 보이면 최대한 도움을 주려 한다. 특히 드론을 배우려 오는 할머니처럼 사는 게 궁색해 보이지 않는데 뻔한 거짓말을 할 때는 마음이 토라진다. 서비스를 해주고 싶은 생각이 쏴악 사라진다.



내 연민의 감정은 <타인의 불행에서 생기는 슬픔>이라는 말처럼 타인의 불행을 해소하려는 욕구가 발동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이름 붙이자면 내 마음 편하자고 발동하는 이기적인 연민인 셈이다. 그에 반해 나이 들어도 줄지 않는 어르신들의 노골적인 물욕은 사실 많이 거북하다. 나라에서 주는 혜택은 무조건 받고 보자는 식의 태도는 얄밉까지 하다.  이기적인 연민은 어쩌면 잘못된 민원 응대일 수 있지만 이 경계를 넘어서는 건 아직 어렵다. 나도 늙으면 저럴까?




타산지석, 저렇게는 살지 말아야지

긴급재난 지원금을 신청하러 풍채 좋은 어르신이 오셨다. 선생님, 그건 저희 부서 일이 아니에요. 소상공인 버팀목 자금 신청으로 가셔야 합니다. 아니, 일단 이걸 보라니까. 밑도 끝도 없이 자기 휴대폰을 내 앞으로 들이민다. 재난지원금을 신청했는데 뭐가 안된다며 사업자등록증을 내 코앞에 자꾸 흔들어 댄다. 아들이 해보니 신청이 안된다는 카톡 메시지가 와 있다.


목소리도 너무 크다. 하는 수없이 나도 어르신의 휴대폰을 만진다. 그 순간 너튜브의 알림이 수도 없이 뜬다. 태극기 부대의 너튜브다. 돈에만 욕심을 부리면 재난지원금 사이트의 충실한 안내 멘트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신청기간이 아니다.


어르신, 지금 신청기간이 아니에요. 23일 이후로 신청하셔야 합니다.


그 사이 민원은 더 밀려있다. 어르신은 종이에 날짜를 적어달라고 한다. 2018년에 사업자 등록증만 내어 놓은 뒤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그럼에도 코로나 긴급지원금을 받아야 한단다. 하는 말마다 반말에 목소리는 우렁차다. 입고 온 코트는 뭐지. 고급스러운 버건디 무스탕에다 손에는 흑큐빅 반지를 끼셨다. 큐빅이 제법 크고 검은데도 윤기기 좔좔 흐른다. 오늘은 제대로 각 잡은 날이다.



나이 먹은 게 자랑은 아닌데. 내가 당신 며느리도 아니구먼. 하는 말마다 반발은 좀 지랄이지 않나. 이건 뭔데? 어째야 되는데? 뭐가 그리 복잡한데? 겉만 번지르하면 뭐하냐고 어른 같은 어른이 아닌데. 물론 이것도 속으로 한 말이다. 속은 문드러져도 내 얼굴은 웃고 있다. 인사까지 안녕히 가세요,라고 한다. 이게 다 내 스트레스의 밀집층이 되겠지. 그리고 또 한 분은 신청서를 던지며 개@같다는 말을 하셨다. 설마 나보고. 열이 파악 뻗치는데 그냥 허허 웃고 말았다. 우쿠 랄라, 판타스틱 버라이어티 쑈...




미니멀 라이프를 시행하려는 이유

외형적인 것들로 상대방을 판단하는 것은 오류일 수 있지만 그들의 성찰 없는 노화는 적지 않게 당황스럽다. 타인에 대한 배려나 사회적 고민보다 이기적인 모습에 티끌만 한 부끄럼이 없다는 게 더 민망하다.



다운시프트, 자동차 운전을 할 때 기어를 저속으로 낮춰 속도를 늦추는 것을 뜻한다. 근래에는 많이 벌어 많이 소비하는 경쟁과 속도 추구의 생활양식을 버리고 적게 벌고 적게 소비하더라도 소박하고 마음의 여유가 있는 삶을 선택하는 것을 말한다. 나는 그런 노년을 지향하려 한다.


벌 수 있을 때 시간의 노예라고 족쇄 채우지 않고 열심히 벌고, 미니멀 삶을 지향하려 이유는 다운시프트 같은 삶을 살기 위함이다. 내 것이 아닌 것들에 욕심을 부리기보다 수입에 맞게 지출을 줄이는 연습을 하기 위함, 내가 만난 어르신들이 내게 그런 인식을 자각시켜 준다.


물욕으로부터 자꾸 멀어지는 연습이 필요하다. 아직도 부단히. 그렇게 늙지 않기 위해. 나는 모욕의 한가운데서 생계 벌이의 걸음을 늦추지 않는다. 나는 존버에는 자신 있고 여기는 소중한 내 일터, 저런 분들보다 친절함에 고마워하시는 붙들이 더 많으니. 오늘은 오징어라도 잘근잘근 씹으며 톨스토이 할아버지 책을 뒤져 거려 본다.




모든 말을 존중하라


남을 심판하지 말라.

누군가 당신을 심판하고

나쁜 말을 한다 해도 그를 심판하지 말라.


말은 목표를 이루기 위한 도구이다.

말을 잘못 사용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자신과 남의 말, 글로 쓰인 말등

모든 말을 존중하라.

분리시키는 말을 경계하고

합일시키는 말을 사용하라.


그 입장이 되어보기 전까지는

이웃을 비난하지 말라.


-톨스토이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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