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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아치우먼 Feb 10. 2021

미열처럼 남아있는 우리의 열망

경운기와 스쿠터


경운기의 짐칸


엄마는 담 하나를 두고 사는 달순이를 평생 동안 질투했다. 엄마의 동서인 달순이. 치매로 기운이 없는 지금도 달순이 보다 오래 살아야지 하면, 틀니를 드러내며 슬그머니 웃는 엄마. 질투는 치매보다 강한 모양이다.



달순이를 질투하는 이유 중 하나는 경운기였다. 작은 아버지가 모는 경운기 뒤에 여왕처럼 앉은 달순의 포즈는 늘 여유만만했다. 리어카를 끄는 아버지를  자주 추월했다.(그 뒤에는 리어카를 미는 엄마가 있었다) 경운기를 운전할 줄 아는 남편을 둔 달순의 거만한 자태는 어디든 두 발로 걸어가야 하는 엄마에게는 드러낼 수 없는 부러움이었다.


어째, 경운기 하나도 몰 줄 모를꼬?


리어카로 모든 농사를 짐져 날랐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 뒤로도 달순이는 경운기 짐칸에 앉아 논밭을 휘저었다. 맨날 달달거리고 자~알만 돌아다닌다. 달순이의 안부를 물으면 엄마는 향상 이렇게 대답했다. 질투가 듬뿍 묻은 목소리로, 톤을 교묘하게 꼬아 올리며...



엄마가 만약 버킷리스트를 적는다면, 그 첫 번째가 이게 아닐까. 아버지가 모는 경운기 짐칸에 앉아 우리 동네를 한바퀴 돌며 달순이 앞을 지나치는 것.




나의 스쿠터는 왜 불온한가?


20대에 나는 스쿠터(택트)를 90만 원에 산 적이 있다. 샀다는 이야기는 탔다는 말도 된다. 속도를 즐기고 싶은 20대의 욕구는 남녀 모두가 똑같다. 그때의 나는 맹랑하고 여자라는 것에 개의치 않고 사는 것에 익숙해서 질렀다. 딸기밭에서 일한 대가로 받은 돈 전부를 원샷원킬로 택트에 꽂았다. 짙은 연분홍 커버가 씌워진 스쿠터는 앙증맞고 너무 이뻤다.

(가만 보니 우리 딸과 흡사하구나!)



탈 줄 몰라도 일단 사고 치고 나면 어떡하든 타게 된다. 지르긴 했지만 탈 줄을 몰라 같은 동네 선배가 트럭으로 운반해 주었다.



스쿠터를 타본 사람은 안다.

긴장을 한 탓에 어깨에 힘이 들어가면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고 그만큼 속력이 올라간다는 것을. 힘을 빼야 하는데 자꾸 힘이 들어갔다. 참고로 시골 동네 골목은 지렁이 발자국처럼 꼬불꼬불하다.



그래도 부지런히 익혔다. 짧은 다리를 겨우 세우고.

2주일쯤 되자 농로까지는 나갈 수 있게 되었다. 근데 동네 아주머니들이 내가 지나가면 손을 흔들었다. 태워 달라는 신호였다. 같은 여자인 내게 도움을 요청하기가 수월했다.


당시 스쿠터였지만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여자는 내가 유일했다. 오토바이나 경운기는 대부분 남자들의 차지였다. 그래도 아줌마들의 부탁이 싫지는 않았다. 그러지 않나. 차도 처음 운전할 때는 어디든 마구 가고 싶고, 괜히 문 열고 한 손으로 운전대 잡고...

(나는 허세가 본능인 여자인가 보다)



그래요, 나는 당신들과 달라요. 나는 오토바이 타는 여자라고요. 당신들은 남자처럼 다리를 벌리고 달리는 일에 겁을 먹었지만 봐요, 나는 이렇게 달린다고요. 어디든 간다고요. 착한 여자는 천국에 가지만 나쁜 여자는 어디든 간다는 말이 진리로 느껴졌다.



허세와 달리, 동네 아줌마들의 체구를 견디는 것은 힘들었다. 나를 못 믿어서인지 아줌마들은 내 등 뒤에서 나를 꽉 붙드는 바람에 그녀들의 무게가 내게로 쏠렸다. 무게를 견디기 위해 또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내 의도와 달리 너무 쌩쌩 달렸다.



아줌마들은 높은 속력에 내게로 더 밀어붙이고...

그녀들의 무게만큼 늘어나는 속력을 숨기기에 바빴다. 야야, 살살 좀 달리라. 속으로 말했다. 아줌마, 내한테서 좀 떨어지이소. 나의 몸무게는 43킬로였다. 그녀들의 몸뚱이로 나를 밀면 나는 점점 속력을 높일 수밖에 없었다.(손잡이를 안쪽으로 당기면 속력이 올라가는 스쿠터)



6개월을 스쿠터와 함께  속력을 누릴때쯤, 소문이 돌았다.

"가스나가, 발랑 까짔다."

손 흔들 때와 뒷담화할 때가 달랐다. 그 소문을 접하던 날, 분노의 질주를 한 탓에 스쿠터와 함께 붕 날랐다. 우회전을 하는 도로에서 직진, 오토바이와 함께 철퍼덕하고 물이 고인 논에 그대로 처박혔다. 모내기철이었다. 비주얼은 엉망이었지만 다행히 내 앞니는 무사했다.




설계는 원사이즈(남자)가 디폴트


여자는 왜 경운기를 직접 운전하지 못했을까?

경운기가 맨 처음 나왔을 때 시동을 거는 행위에는 남자들의 힘이 필요했다. 점차 개선되어 키를 꽂아 돌리기만 하면 되었지만 이미 경운기는 남자들의 전유물로 인식되었다. 여성 농민들은 경운기를 운전하려 하지 않았다. 학습된 파블로의 개처럼, 우리 엄마처럼.



20대 나의 스쿠터는 왜 불온했을까?

동네 사람들은 내가 스쿠터를 타고 달리는 사이 내 가랑이 사이를 주목했다. 바람에 날리는 내 허리를 주목했다. 발랑 까졌다는 말은 단지 그 이유였다. 소문때문에 스쿠터를 포기하지 않았지만 험담이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가진 여성이라는 잣대(문화적규범)를 무시할 만큼 내가 지혜롭고 이론으로 무장된 실천가는  아니었다. 90만원의 스쿠터는 7개월만에 중고로 팔렸다. 지금도 스쿠터만 보면 가슴이 쿵쾅거린다.



남자들은 기계를 독점했고 여자들은 기계사용을 주저했다. 여자들의 낮은 교육률과 사회적 문화적 규범 때문이기도 했다. 또 한 가지는 기계가 여자 사용자에 맞게 설계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 보이지 않는 여자들 중에서




페미니즘은 기억이다


새롭게 알게 되는 지식때문에 과거의 기억이 연결되어 재해석되는 일은 허다하다. 엄마의 경운기와 나의 스쿠터는 미열처럼 남아 있는 열망. 그것이 현실로 부팅되지 못한 본질적 이유는 우리가 못났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설계의 기본값, 최초의 데이터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백컨데 스쿠터를 탔던 그때처럼 날아갈듯한 희열을 맛본 적이 없다. 속력이 주는 쾌감은 인간 모두에게 구원일지도 모른다. 스쿠터가 이 정도면 할리데이비슨을 타고 달리는 기분은 어떨까? 내 짧은 다리와 짧은 팔은 정녕 백인 남성들의 디폴트를 따라잡을 수 없을까?



농촌사회는 그래도 진화했다. 동네 집안 언니는 좋은 오토바이를 혼자 씽씽 잘 타고 다닌다. 그렇지만 나는 퇴보했다. 아이 셋을 낳고 기르는 사이 감각은 무뎌졌고 용기는 무서움에 가려졌다.



발랑 까진 가스나.

거기에 담긴 말이 20대 신선했던 용기를 집어삼킨 뒤 여자다움에 익숙해져 버린 나는 열망을 숨겨버렸다. 그리고 지금, 그때의 나를 재해석 중이다.



여성의 사람다움(인문학)기초는 우리가 겪었던 시간에 대한 기억이다. 무엇으로 어떻게 우리가 차별받았는지, 그것들과 진정으로 교감하게 되면 애정의 시선을 가지게 된다. 미열처럼 남아있던 수많은 여성들의 열정에 대해, 안타까움에 대해... 어쩌면 미열에 대한 처방을 가져올지도 모른다. 계속 생산증인 할리데이비슨에 품은 미열에 대해, 상상하지 못한 미래에 대해.

페미니즘의 시작은 바로 거기서 출발한다.







참고도서


- 편향된 데이터는 어떻게 세계의 절반을 지우는가

<보이지 않는 여자들>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 지음/ 황가한 옮김



- 길 위의 인생

글로리아 스타이넘/ 고정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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