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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아치우먼 Feb 08. 2021

아들을 위한 여성학 개론

프롤로그



학교에서 배우지 않은 것들이 더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되면, 그때가 어른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밥을 누가 차릴 것인가로 시끄러운 아침을 열었다. 결혼 24년 차이지만 여전하다. 일상을 바꾼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다. 아들은 다 차려놓은 식탁에 앉아 빙그레 웃었다.



아들, 페미니즘이 뭐야?

네.. 어머니, 갑자기 그건 왜 물어보는데요? 어머니 저 고3이에요.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그래?... 그래도, 페미니즘이 뭐야?

몰라요. 그냥 여성차별에 반대하는... 뭐 그런 거 아닐까요?



학교에서 안 배웠니? 국어 지문에 그런 건 안 나와? 그런 건 안 나와요.(웃음) 태양계의 행성이 어떤 이론과 궤도로 흐르는지, 경제는 어떤 원리를 가지고 움직이는지. 청산별곡이나 유명한 작가의 소설이 지문으로 나오지 페미니즘, 그런 건 안 나와요.


왜......?

그건 저도 모르죠. 어머니, 수능 출제위원들에게 물어보세요. 아들은 후다닥 탭을 들고 독서실로 도망가버렸다. (너의 고3이 끝나길 기다리며 엄마는 이글을 차곡차곡 적으마.)





맞다. 수능 출제위원들은 수능 전, 한 달 동안 단체 숙박을 한다고 했다. 외부와 철저하게 차단한다고. 그럼 한 달 동안 숙박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여자 수능 출제위원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



한 달 동안 집을 비운 뒤 가족과 분리된 여자 수능 출제위원은 있었을까? 수능 출제위원들이 대부분 남자라고 한다면 수많은 논문이나 이론들 중에서 페미니즘에 관한 지문은 한번이라도 출제된 적이 있었을까?



정말 페미니즘은 태양계의 우리가 알지 못하는 행성들보다, 어떤 경제 이론보다 혹은 청산별곡보다 더 쓸모없는 배움일까.



필요하고 소중한 것들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이며 그것은 누가 결정하는가? 난데없이 아들에게 페미니즘의 검증 공격을 감행 한 뒤 페미니즘에 대한 공부를 시작하기로 한다. 그동안 너는 예외였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페니미즘의 또 다른 나의 정의는 <여성의 인문학, 여성학 개론>이다. 이미 많은 이론과 주장과 학설과 피셜이 존재하지만 그들보다 내가 학문적으로 뛰어나지는 않을 것이지만, 삶에 밀착된 여성 사람의 삶을 반추하는 터닝포인트가 되기를...

아직은 말랑말랑한 너희들에게 나의 고민이 성장으로 가닿기를 바란다.





여성을 온전한 사람으로 인정하는 것에  

페미니즘의 인사이트가 있다.


나는 때때로, 이분법으로 나눌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모든 문제를 둘로 나누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의 구분이라고 생각한다. (길 위의 인생, 글로리아 스타이넘)

 

페미 어른이라고 자부하지만 여자의 적은 남자라는 유치하고 이분법적인 관점은 반대한다. 가끔 여성과 남성이 대치되는 현상으로 보일 수 있다. 착시현상. 남자를 적으로, 결혼은 같은 건 하지 말아야 해. 시월드 때문에 시금치도 안 먹어요, 라는 편협된 액션은 페미니즘의 잘못된 오류값이다.



오류값은 종종 논란을 불러와 여혐과 꼴펨(골통 페미니즘, 남성혐오주의자)의 문화를 생산해 냈고 페미니즘에 대한 오해를 양산했다. 여성의 인권을 말하면 페미니스트냐고 질문한다. 저는 똑똑하지 않아서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어요. 페미니스트들은 어딘가 불편해요. 페미니스트는 성형하지 않죠? 페미니스트에 달리는 수많은 고정관념과 편견들...



어느새 나는 대찬 여자, 기센 여자로 이미지 메이킹당해 있다. 억울한 면이 없잖아 있다. 순진하며 허당임에도 불구하고, 가끔 기센 여자의 역할이 주어지고 그것이 부담스러울 때도 있다. 페미니스트라는  단어안에 내장된 편견을 둘러쓰고 싶지 않다.  



여성인 우리가 일상의 편린을 사람이라는 다양한 그라이데이션으로 표출해 낼 수 있도록 보장받는 것. 쉽게 말하면 사람이 온전한 사람으로 관계 맺으면 살아가는 것, 그것을 갈망할 뿐이다. 나는 초페미(초보 페미니스트)다.




너는 마치 네가 큰 잘못을 한것 같은 당황스런 얼굴로 내게 말했다.



"언니,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 애가 분홍색 옷을 좋아해요. 분홍색 옷만 입으려고 하는 게 이상해요."


맞아. 엄마인 너는 딸에게 분홍색 옷을 입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어. 가르치지도 않았어. 그러나 유치원 여자 친구들이 대부분 분홍색 옷을 입고 있는 걸. 분홍색 원피스에 레이스가 달린 리본에 화려한 큐빅이 박힌 머리띠를 하고 있어.



아이들은 5세가 되면 모든 것을 감지하는 능력을 갖고 있데. 내가 아닌 타인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그 무리에 어울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본능적으로 간파한데. 여자 친구들과 친해지고 무리속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당연히 분홍색 옷을 입어야 해. 아이는 친구가 필요하고 그 무리 속에 같이 놀고 싶거든.



남자아이들도 똑같은 원리로 무리에 적응한데. 남자아이들 대부분이 자동차 장난감을 가지고 놀거든. 자신과 비슷한 남자아이가 가지고 노는 장난감을 선호한데.



사람은 인지하는  순간부터 사회적 동물로 키워지기 시작한데. 그런데 딸은 분홍색 옷을, 남자아이는 자동차 장난감을 좋아한다고 누가 가르쳤을까?

아무도 가르치지 않았지만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 뿐이야. 네 딸이 태어나기 전에...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길러지는 것이다.

(시몬느 드 보부아르)




페미니즘은 이데올로기나 사상이 아니다. 

페미니즘은 여성을 위한 휴머니즘이며 여성을 위한 인문학이다. 인간 본성의 것(인문학에서는 인사이트- 본질에 충실한 무엇, 요구)에 가장 가까이 가기 위한 과정이며 이는 궁극적으로 우리, 존재에게로 향한다.



성차별은 고질적이고 강박적이며 계급과 인종과 문화속에서 복잡한 뿌리들을 형성했다. 그것은 공기처럼 당연하게, 샤머니즘처럼 오랜 시간 우리를 지배했기 때문에 <페미니즘-여성인문학>는 어떤 사상보다 우위에 있어야 한다.  전체 조건이며 베이시스(basis)다. 어떤 주의가 탄생하기 이전의 기본 골격, 사람의 기본권리....





딸에게만 페미 의식을 주입했다

지금까지 나는 어이없게도 페미니즘의 가장 큰 피력인은 딸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네가 딸로 태어났으니 너를 차별하는 것들과 싸우기 위해 네가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고...으샤으샤!!



딸들과 차별에 대해 침 튀기며 토론했다. 그런데 페미니스트라고 열정이 충만했던 20대를 보내고 아이 셋을 키우는 전쟁 같은 30대를 지나(육아전쟁 중에는 하루하루를 견디며 살았다) 적당히 삶의 때가 묻은 40대....



지금에서야 페미니즘은 딸과 아들에게 나란히 가르쳐야 할 당연한 본질임을... 성차별이 인간의 역사를 어떻게 왜곡하고 우리를 속박했는지에 대해 딸과 아들은 같이 알아야 한다고.




그래야지만 서로를 사랑하는 일, 가족을 꾸리는 일, 혹은 독립된 삶을 보다 원만하게 이끌어 갈 수 있다는 것을. 페미니즘은 남녀 모두에게 학습의 디폴트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마주했다. 우습게도 나는 피해자에게 피해자가 되지 않는 방법을 끊임없이 주장하는 모순적인 어른이었음을 고백한다.



스스로의 객관성에 대한 믿음 또는
자신은 성차별주의가 아니라는 믿음은
그 사람을 덜 객관적으로 더 성차별적으로 행동하게 만든다.
즉,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확고하게
믿고 있는 사람이 자신의 행동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



나도 그중의 하나였다. 딸들에게 페미어른이라는 허세를 부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말았다. 아들에게 페미니즘은 그것이 남의 일인 양, 너는 몰라도 된다는 은연중의 배격... 나도 모르게 내 안에 자리한 거만한 진실, 나를 의심하며 살기로 한다.




당신은 혹시 이런 일들을 알고 있는가?



버스 환승제도는 젠더적 관점이 만들어 낸 교통 정책인지 알고 있는가?

컴퓨터를 맨 처음 개발했을 때 프로그래밍으로 근무했던 사람들이 모두 여자였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우리가 틀고 있는 에어컨의 온도는 20~30대 성인 백인 남자를 기준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때문에 여성인 우리는 매번 얇은 카디건을 사무실에 걸어 둔다)

백신의 예방접종을 위한 기초 데이터가 성인 남자를 중심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겨울철 제설작업에 조차 남녀 차별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교향곡을 작곡한 세계적인 음악가 중 여자 작곡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유명한 피아니스트 반열에 여자보다 남자가 더 많은 이유를 알고 있는가?




<보이지 않는 여자들>에서는 편향된 데이터가 어떻게 세계의 절반을 지우는가에 대해 말하고 있다.  



학교에서 남녀 균등한 비율의 5~6 아이들에게 과학자를 그리라고 했다. 남녀 과학자의 비율이 비슷했다. 그런데 7~8살이 된 아이들에게 과학자를 그리라고 하자 남자 과학자 수가 더 많아졌다.



14살 아이들에게 과학자를 그리라고 하자 남자과학 자 수가 여자 과학자 수 보다 4배 더 많았다. 남녀 모두의 아이들은 과학자라는 이미지를 자연스럽게 남자로 인식하는 과정을 자라면서 배우게 된 사실이 드러났다. 남자 과학자는 뉴튼, 아인슈타인, 노벨... 술술 나오는데 여자 과학자는? 퀴리 부인, 겨우 하나 생각났다.



이런 고민을 쓸 것이다. 그래서 종종 남자들은 불편할 수 있다. 아니 불편해도 우리 모두를 위해 이글에서 함께 하기를 부탁한다. 지금까지 기록된 것들이 어떻게 과거의 여자를 지웠고 현재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차별이 어떻게 우리 모두를 불편하고 힘들게 했는지....




가끔은 언어가 정체성을 선명하게 구분 짓을 때가 있다. 이 단어를 조금 명확하게 알아야 한다.



SEX라는 말 보다 젠더(gender): 개념을 정확히 알면 왜 이런 단어를 사용해야 하는지 안다.

현재 공공기관에서는 양성평등 교육이란 말을 사용한다. 엄밀하게 말하면 이 말은 틀렸다. 남녀로만 생물학적 성을 규정짓는 것은 현재 이성애와 양성애가 존재하는 시대적 흐름에 맞지 않다. 



젠더(gender) 교육이라고 해야 한다. 젠더(gender)는 사회적 성으로 규정된다. 즉 성별은 생물학적 차이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성 정체성, 행동양식, 사고방식 등이 서로 사회적 영향을 받는다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젠더(gender)의 개념에는 성역할이나 성 정체성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화한다는 점을 전제하고 있다. 



기존의 남녀 성별을 구분하는 sex라는 개념은 선명하게 여자와 남자라는 장벽을 가르며 마치 그것은 생물학적으로 어쩔 수 없다는 뉘앙스를 품는 반면 젠더(gender)는 제3의 성까지도 포함해 다양한 변화의 가능성을 포함한다. 즉 성별의 차이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자라는 과정에서 습득된다는 의미를 젠더(gender)가 포괄하고 있다.



앞으로 sex라는 단어보다 젠더(gender)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할 것이고 우리의 정체성은 늘 유동적으로 변하고 있음에 같이 주목해주기를 바란다.



참고로 페미니즘을 심도 있게 공부한 적도 전공한 적도 없다. 학문적으로 따지면 페미 초보자일 뿐..

젠더적 관점으로 생활의 모든 것들을 관찰하는 버릇이 있다는 것.



삶에 파묻혀 내가 잊고 있었던 그것들의 열정, 여자이기 이전에 사람으로 누려야 했던 것들이 무시되었던 과정들을 공유하고 고민하며 같이 성장하기를...




언젠가 아들이 이 글을 읽겠지. 며느라기의 무구영보다는 나은 아들의 삶을 바라며 아들이 페미니스트의 강력한 피력자가 되기를....



아들아, 썸 타는 여자를 유혹하는 방법보다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어떤 영향력 아래  혹은 어떤 환경에서 살고 있는지, 네가 함께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는지. 어떤 어려움이 있었는지를 가늠할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그런 것들이 유용한 삶의 방식이 될 거라고 엄마는 믿는다.



언젠가 네가 열심히 익혔던 그런것들 보다 이 지면이 네게 더 소중하게 가 닿으면 너는 어른이 될 것일테다. 그런 날을 기대한다.






2016년 런던에서는 버스 무료 환승제도가 도입되었다. 예전에는 승객이 버스를 탈 때마다 요금을 결제해야 했지만 지금은 1시간 안에 최초 1회 환승까지는 추가 요금을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 이 변화는 특히 여자들에게 유리하다. 이전 제도하에서는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훨씬 많은 요금을 지불했기 때문이다. 여자는 남자보다 연쇄 이동을 할 확률이 높을 뿐 아니라 런던 버스 승객의 57%를 차지하므로 환승할 확률 또한 높다.



남자들의 이동 패턴은 단순하다. 집과 회사. 하지만 여자들의 이동 패턴은 좀 더 복잡하다. 출근하는 길에 자녀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노인 가족을 병원에 데려다주고, 퇴근길에 장보기가 포함된다. 이것을 연쇄이동(trip-chaining)이라고 한다. 여자들은 이 연쇄이동을 위해 환승제도가 생기기 전 더 많은 요금을 지불한 것이다.

- 보이지 않는 여자들 중 일부








# 참고도서


- 편향된 데이터는 어떻게 세계의 절반을 지우는가

  <보이지 않는 여자들>

캐럴라인 크리야도 페레스 지음/ 황가한 옮김



- 글로리아 스타이넘

  <길 위의 인생>

  글로리아 스타이넘 지음/ 고정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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