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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아치우먼 Feb 02. 2022

지금까지의 설날과 다른 설날

없어진 설날의 맛


작년, 이렇게 발음하니 아주 오래된 일처럼 보이지만 불과 3개월 전 친정엄마는 다른 생으로 떠나셨다. 겨우 석 달이 흘렀을 뿐인데 먼 일처럼 까마득하고  친정 근처만 가면 나도 모르게 엄마한테 가봐야지를 되뇌다가 의식적으로 생각을 멈추게 된다.

그리고 설 명절, 다른 때 같으면 남해 갈 생각에 서둘러 떡국을 먹고 허겁지겁 챙겨 고속도로 차 밀릴 걱정을 하며 나설 귀향길이었지만 이번에는 갈 곳이 없었다.



누군가 한 노인이 죽는 것은 도서관 하나가 없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비유를 했는데 이 나이가 되어도 엄마의 부재가 느닷없는 슬픔으로 훅 다가올 때가 있다.

이런 날, 명절 같은 날.

핏줄이 만나서 엉기설기 맥락 없는 수다를 늘어놓거나, 뜨거움보다 더 뜨거운 집밥을 와그작와그작 먹으며 도시살이의 허함을 채워야 하는 명절날, 엄마의 빈자리는 차갑게 가슴을 헤집는다.



 가래

동네 방앗간에서 실한 떡 가래를 뽑아 하루 정도를 밥상 위에 펴 말린 뒤 엄마는 밤을 새워 떡 가래를 칼질했다.

"엄마, 여기는 설날에 떡국을 안 먹어. 이상해."

결혼해서 마산으로 오고 나니 설날에 떡국을 안 먹고 차례를 지낸 뒤 제삿밥을 먹었다. 어릴 때부터 설에 떡국을 먹었던 나는 설날만 되면 그렇게 떡국이 먹고 싶었고 그 갈증을 친정집에서 해결했다.


싱싱한 멸치를 넣고 육수를 낸 뒤 살이 통통한 굴을 넣고 푹 끓인 떡국을 먹으면 아무리 힘든 한 해라도 아무렇지 않게 맞설 용기가 났다. 국물까지 후루룩 먹고 나면 따땃한 뱃심이 온몸에 퍼졌다. 엄마는 그런 나와 우리를 위해 직접 지은 쌀로 떡 가래를 뽑고 떡국을 썰었다.


그 옆에서 나는 떡국 썰기를 도와주는 척 시늉을 하다가 후루이 팬에 들기름을 두르고 떡 가래를 노랑노랑 구워 조청에 살짝 찍어 먹으면 쫀득하고 달달한 조청이 입안에서 혀를 녹였다. 천박하거나 자극적이지 않으면서 입안에 돋은 가시들을 잠재우는 정겨운 식감. 그것은 엄마의 칼질과 함께 오는 맛이었다.



떡 가래 하나를 쓸고 또 조청에 찍어 먹고. 혼자만 먹기 미안해서 내가 한 모금 베어 물고 엄마 입에 한입 넣어주고... 묵묵히 엄마는 떡국을 차근차근 썰었다. 그때는 몰랐던 정갈한 칼질의 의미를 이제야 나는 알아차린다.

"너희는 식구가 많으니까 제일 큰 걸 가지고 가."

내 떡국 뭉치는 항상 제일 컸고 푸짐했다.

이제 그런 떡국 뭉치는 없다.



박상 과자(쌀강정)

길을 가다가 박상 과자를 뻥 튀기 하는 트럭을 보고는 그냥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박상 과자를 만 원어치 샀다.



엄마가 설에 하는 또 하나의 일은 박상 과자를 주문하고 만들어 오는 일이다. 박상 과자 부피가 크므로 그날은 엄마가 택시를 타고 집으로 온다. 너무 오래되면 박상 과자가 눅눅해지므로 엄마는 가급적 설전에 박상 과자를 만들어 온다. 설 대목 앞에 박상 과자를 만들려면 반 나절은 줄을 서야 했다.


스탱 그릇에 박상 과자를 내어 놓으면 이 놈 저놈 여러 손이 수시로 왔다 가며 금방 빈 그릇이 된다. 공기가 들어가지 않도록 단단히 묶었던 박상 과자가 어느새 쑥 줄어든다. 밥을 철통같이 먹어도 왜 그렇게 손은 자꾸 가는지. 입었던 옷 위로 박상 과자 부스러기가 허연 눈처럼 내려앉았다.


박상 과자는 우리가 올라갈 때쯤 되면 여러 봉지로 나눠져 다 담긴다. 그중에서 또 내 몫은 제일 크다.

조금이라도 박상 과자를 남겨 둘라치면, 나는 이가 시원찮아 못 먹는다. 다 가져 가,라고 엄마는 손사래를 쳤다. 바삭바삭 좋은 이로 박상 과자를 먹는 소리가 엄마를 흐뭇하게 했을까.


길거리에서 사 온 박상 과자는 엄마가 해 준 것보다 엿기름이 덜 들어가고 덜 바삭거리고 덜 고소하다. 바삭대는 소리가 찰지지 않다. 고향을 떠났던 친구 녀석이 그 박상 과자가 그토록 먹고 싶었다더니, 나도 이제야 그 친구의 말이 무엇인지 이해가 되는 것 같다. 엄마가 보고 싶다는 에둘러 가는 말이란 걸, 뒤늦게 깨닫는다.





노인이 죽는다는 건 도서관 하나가 없어지는 것이지만 엄마가 없다는 건 고향을 잃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몸속 피와 을 어루만졌던  맛을 먹을  없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위로를 잃어버리는 일이다.



그리고 나는 이제 내가 따뜻한 위로를 누군가에 주어야 할 나이임을 안다. 처음으로 이번 설에 약밥을 만들었다. 엄마처럼 따뜻한 위로를 위해. 그것이 가족을 사랑하는 하나의 방법임을 깨달았기에.

나는 또 한 움큼 자랐고 그리움을 켜켜이 쌓으며 나는 전에 없던 첫 명절을 무사히 보낸다.

제사 없는 그곳은 편안했으리라.




효자가 될라 카머

-이종문(김선굉시인의 말)



아우야, 네가 만약 효자가 될라 카머


너거무이  때마다 다짜고짜 안아뿌라


그라고  만져뿌라, 그라머 효자가 된다


너거무이 기겁하며 화를 벌컥 내실끼다


   와이카노, 미쳤나, 카실기다


그래도  만져뿌라, 그라머 효자 된다




*아주 맞는 말이지 싶다.

늙은 에미의 젖을 만져주는 이가 몇이나 될까.

어미는 수줍어 설풋 웃거나 뜻밖이라 화들짝 웃을것이다.  보다 이런 효도가 최고가 아닐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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