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기를 회복하는 시간
53세, 오십 대 초입은 쉽지 않다.
흔히들 갱년기, 내가 좋아하는 말은 완경기.
안 올 줄 알아도 기어이 오는 완경기
컴퓨터 화면에 입력된 민원인 주민번호가 흐릿하다며 돋보기를 꺼내 얹던 선배 언니들 모습이 안쓰러워 보이더니, 내가 그 언니들과 똑같은 연배가 되었다. 나 역시도 노안 앞에 두 손 들고 말았다.
두려움도 없이 급한 용무가 있는 것처럼 혼자 차를 몰고 부산까지 가서 시술을 받았다. 두려움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용기가 맞았다. 노안을 시술한 날은 혼자 오면 안 된다는데 일단 나는 시술을 하고 언니와 형부에게 sos를 보냈다. 상의도 없이 직진이었던 내 선택에 남편의 잔소리는 피하고 싶었다. 용기 덕분에 노안은 해결되었다.
완경기의 가장 큰 날벼락은 뇌 주름의 쇠퇴이다.
머리에서 맴맴 도는 단어들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방황하는 증세, 그.... 그거... 있잖아, 그거... 하다가 대화가 끝난다.
친구랑 저녁 식사 장소를 정하는데 그기, 해안도로 쪽 있잖아, 어.. 그기, 프랜차이즈... 어 그기, 갈비 나오는 곳... 어.. 그기... 둘이서 마주 보며 어... 그기, 하며 빵 하고 웃었다. 이동하는 30분 동안 식당 이름을 기억하려 두 명의 뇌가 무진장 애썼지만 결국 식당 이름은 도착해서야 알게 되었다. 그런 일은 종종이었고 뭔가 대책이 필요했다.
그리고 오월, 찬란한 봄, 친애했던 동료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아무렇지 않은 듯하면서 감정에 중력을 단 것처럼 낮게 낮게 나를 끌어내렸다. 허망함이 내 마음에 고스란히 전해지는 경험은 부모님의 죽음과는 또 다른 충격으로 다가왔다. 스트레스를 막아내는 방패가 모두 부서진 느낌이어서 전에 없이 예민해졌다.
연약한 감정이 쉴 곳이,
무엇도 나를 공격하지 못할 안전한 시간이,
사유의 적막이,
아주 간곡하게 나에게 필요해 보였다.
몰입속으로 나는 성큼 발을 디뎠다.
이모티콘 만들기
"요즘 취미로 이모티콘을 그려. 잘 되면 카카오 이모티콘에도 도전해 보려고."
어떤 사람은 해보라고 했고 또 어떤 이는 요즘 이모티콘 시장이 얼마나 경쟁이 빡세 졌는데 되겠냐며 비웃기도 했다.
"젊은 아이들 아이디어가 얼마나 반짝이는데.."
그렇지. 그럼. 카카오 이모티콘 접수가 하루에 1000개도 넘는다는데. 그렇게 수긍하며 또 집에 와 이모티콘 아이디어를 고민했다.
이모티콘 그리는 앱이나 포토샵은 하나도 모르면서.
유튜브를 보고 책을 사보며 두 달이 흘렀다. 몰입의
정점을 향해 충실하게 직진. 그 순간만큼 감정의
먼지는 서서히 가라앉다가 말끔히 내려앉았다.
생각한 것을 이미지화하는 행위는 의외로 창조적
이었고 신선했다. 물론 테크닉(제작 프로그램)을 익
하는 부분은 어려웠지만 조급해하지 않았다. 출장가는 도중 혹은 짬짬이 유튜브를 보거나 일이 없는 주말에는 프로그램을 익히는데 집중했다.
<올해 안으로 카카오 이모티콘 제출하기>
이것이 내 목표였다. 승인이 아니라 제출이었다.
그리고 얼마 전에 카카오 이모티콘을 제출했다.
멈티(멈추어진 이모티콘) 32개 시안을 완성했다.
결과는 당연히 불승인이 확실하겠지만 제출했다는
사실 자체에 만족했다. 그리고 내게 승인과 불승인
이라는 결과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이모티콘을 그리며 내가 온기를 회복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나머지는 덤이다.
그리고 라인에 이모티콘을 출시했다.
오늘 승인을 받았다. 라인은 모두 영어로 이모티콘
신청을 해야 한다는 사실도 모르고 저녁 내내 낑낑
대며 라인과 씨름했다. 다음부터 라인은 안 할 작정
이다. 그나마 아이들이 방학이라 집에 와 있어 다행이었다.
라인은 절차도 까다롭고 페이팔을 등록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참고로 한 번의 수정을 요구하는 과정이 있었지만 승인은 무척이나 빨랐다.
도... 전! 움티!
여름휴가 때는 움티(움직이는 이모티콘) 도전해 볼
생각이다. 애니메이션 프로그램을 배워야 한다.
그만큼의 집중이 필요하겠지. 또 해보자. 살면서
안 해 본 것보다 해본 게 많으면 덜 억울하겠지.
그래서 휴가 계획이 없는데도 서글프지 않다. 골프
에 빠진 남편이 혼자 계획을 잡아도 섭섭하지 않다.
골프를 같이 배우자는 남편에게 재미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골프를 배우냐며 눈을 흘기자 남편
이 알았다며 도망간다.
그거다.
월화수목금을 죽자 일해도
또 평생 개목걸이 걸며 월급의 노예가 되어도
자신이 진짜 몰입할 수 있는 취미,
혹은 내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일,
그것 하나만 있어도 삶이 윤택해진다는 사실.
그걸 찾아야 한다.
나이 든다고 타박만 하지 말고.
이 즈음 이걸 깨닫고 나는 이모티콘 작가가
된 것처럼 개폼 좀 잡는다.
더워도 덥지 않는 게 몰입의 힘,
여름은 덥지 않고 뜨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