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사적이나 지극히 비슷한 내 일
우리나라에서 일자리를 주관하는 정부 부처는 고용노동부다. 고용노동부에서 12년째 일하고 있는 나의 직업은 직업상담사. 직업상담사는 공무원 신분이 아니고 <직업상담 및 취업알선>을 목적으로 채용된 공무직, 흔히 알고 있는 무기계약직이며 민원 창구에서 구직자를 상담하는 일을 하고 있다.
흔히들 고용노동부라는 조직 자체를 헷갈려하는데 설명을 덧붙이자면 고용은 일자리와 관련된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고용센터, 혹은 고용복지 플러스센터>로 불리는 곳에서 실업급여 지급, 취업알선, 모성보호, 기업지원, 고용장려금(모든 장려금을 통칭함), 국민 취업지원제도, 국민 내일 배움 카드와 관련된 업무를 하고 있으며 직업상담사들은 이 모든 직무(job)에 배치되어 일한다.
따라서 직업상담사라 하더라도 어떤 직무에 배치되는가에 따라 행정업무에 치중될 때도 있고 상담업무에 집중할 때도 있다.
고용노동부의 노동 파트는 근로감독 영역으로 주로 고용노동부 **지청으로 노동 관련(임금체불이나 근로기준법 위반에 따른 진정, 노동조합 관련 등) 사건들을 다루는 곳이다.
쉽게 분류하자면 일자리를 다루는 영역은 고용, 일을 하고 있는 재직자들의 노동갈등을 다루는 영역은 노동 파트로 구성되어 고용노동부라는 명칭을 쓰고 있다. 이걸 잘 모르는 민원인들은 임금체불서를 들고 고용센터로 방문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어떻게 직업상담사가 되었습니까?라는 질문을 한다면 단 세 글자, <우연히>라고 하겠다.
대학시절 나는 학생운동권이었고 졸업 후 시민단체에서 일했다. 그때 IMF가 국가를 덮쳤다. 실업자가 넘쳐났고 내가 속한 시민단체에서는 <실업부조>라는 사업을 진행했다. 정부나 지자체가 지원하기도 했지만 IMF라는 국가적 재난 상황에서 그래도 여유가 있는 후원자들의 도움을 받아 실직한 여성들을 지원하는 사업이었다. <실업부조>는 실업이나 해고 상담, 쌀 쿠폰 지급, 상조회 운영을 통한 심리적 지원 등 다양한 활동을 진행하였다.
그리고 1999년 7월 우리나라 최초로 사회복지제도의 근간이 된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 제정되었다. 실업부조의 경험 때문에 나는 저소득층의 자립을 목적으로 하는 자활센터에서 총괄을 맡게 되었다. 저소득층이 일할 수 있는 사업 아이디어를 내고 그들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이일을 그만두었다. 번아웃이 나를 강타했다. 저소득층의 언저리에 있는 사람들은 주로 알콜리즘, 은둔, 정신질환자, 범죄의 경험, 경계성 장애 등 결핍의 교집합이었다.
야근을 할 때 사무실 유리창이 깨지는 건 예사였고 주말이라도 그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달려가야 했다. 일터에서 술을 마시는 것이 일상인 사람들. 출근하자마자 그들의 외모를 검사하고 아침부터 음주 여부를 체크했다. 9시가 넘어도 출근하지 않고 이불 안에 있는 사람을 끌어내는 것이 하루의 시작이었다. 목이 아팠다.
혹독하게 추운 겨울날, 저소득층으로 일하고 있는 언니로부터 전화 연락이 왔다. 자기 집으로 급히 와 달라는 요청. 달려가 보니 골목길에 살림살이가 널브러져 있었다. 6개월 동안 방세를 내지 못하자 집주인이 이삿짐을 모두 골목으로 내팽개친 상황이었다. 남편은 일을 나가지 않고 몇 년째 집 안에만 있었고 아이 넷에, 큰 애가 이제 막 초등학교에 입학한 가정이었다.
아이들이 추위에 담요를 둘러싼 채 담장에 기대어 있었다. 언니는 당장 묵을 곳이 없자 부득이 나에게 연락을 한 것이었다. 그날 밤, 아는 사람들에게 수소문해 난방이 되는 빈집을 찾아 그 가족이 며칠 묵을 집을 구했다. 아직도 그날처럼 매서운 추위를 느껴보지 못했다. 찬바람이 부는 좁고 허름한 시멘트 길에 뒹구는 냄비와 허름하고 때 묻은 이불, 아이들의 옷가방과 책. 그 옆에 불안한 눈빛으로 옹기종기 모여있던 까만 눈동자. 고개 숙인 남자의 목덜미, 어떻게든 아이들은 추위에서 건져보고자 발을 굴렀던 언니의 일그러진 얼굴과 투박한 손.
나는 그때 가난의 맨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했지만 외면하고 싶었다.
아, 이 길은 내가 갈 길이 아닌가 보다.
그들의 가난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이 괴로웠다. 그때 나는 세 아이를 둔 엄마로 육아라는 거대한 짐이 또 다른 내 어깨에 얹혀 있었을 때, 그들에게 내어줄 어떤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나는 도망쳤다.
40대 초반의 나는 남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안정된 일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남편과 한 약속은 40대가 되면 돈이 되지 않는 시민단체 일을 그만두고 돈벌이에 전념하기로 한 것이었다.
2010년 우연히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직업상담사라는 자격증을 발견했다. 시민단체에서 일한 경험이 직업상담사 공부에 도움이 되었고 기출문제를 풀어보니 그럭저럭 할 만했다. 이 자격증을 취득해서 직업상담사로 일해야지가 아니라 일단 자격증이라도 하나 건져보자는 결심이었다.
그해 10월 나는 독학으로 직업상담사 자격증 2급을 취득했다. 운전면허증 다음으로 있는 첫 국가자격증이었다. 2011년 고용노동부 워크넷 채용공고를 보던 중 고용노동부 자립 상담사라는 모집공고를 보고 지원했다. 다른 분야의 직업상담사보다는 페이가 높았기 때문에 떨어져도 좋다는 마음으로 응시했고 예상치 않게 나는 7:1(면접 경쟁률)의 경쟁률 속에서 취업이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이도 많은 내가 20-30대를 제치고 경력도 없으면서 직업상담사로 뽑힌 이유는 자기소개서에 적은 저소득층 자립을 위한 자활센터에서 일한 이력 때문이었다. 나는 e-채용마당(고용노동부는 모두 이 과정을 통해 채용한다) 직무기술서란에 저소득층 자립을 위해 일했던 아이디어와 경험을 세세히 적었다. 치를 떨었던 그 시절이 나를 건져 올리는 두레박이 될 줄 몰랐다.
면접에서 이 질문이 나왔을 때도 저소득층의 특성을 아주 상세히 구체적으로 알고 있음을 피력했고 면접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
세상 일은 이렇게 뜻하지 않는 고리들이 서로 연결되어 오늘의 나를 만들어 낸다.
당신은 어떻게 직업상담사가 되었습니까?라고 다시 묻는 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운명이었어요.
내 삶의 여정이 만들어 낸 운명.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내 삶의 파편들이 조금씩 모여 지금 나의 직업을 만든 것 같아요. 나는 직업상담사라는 직업을 사랑하기보다 그렇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직업상담사라는 직업은 타인의 삶을 합법적으로 들여다보는 일이다. 처음에는 제도에 대해 설명하지만 점차 나는 내담자에게 질문한다. 여기 오기 전에 어떤 일을 했습니까? 급여는 어땠나요? 당신은 왜 그 일을 그만두었나요? 무슨 자격증을 가지고 있나요? 일을 하는데 당신의 어려움은 무엇입니까?
나의 질문이 내담자의 마음에 상냥한 얼굴을 하면 그다음부터 질문은 필요 없다. 내담자 스스로 자신이 살아온 내력을 풀어놓는다. 내가 왕년에 말이야.... 그럼 나는 듣기 위해 귀와 마음을 연다. 이런 상호작용, 상담이란 일이 은근한 매력을 가진건 사실이다.
직업상담사 중에서도 나는 저소득층의 자립을 안내하기 위해 근로능력이 있는 기초생활수급자들을 상담하는 일을 했다.
2011년, 왜 그렇게 열의에 차서 일했는지 모르겠지만 일자리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이 내게 몰려올 만큼 열정적으로 일했다. 장애인 15명을 모아서 봉고차를 밀려 기업체를 방문하거나 내 차로 장애인과 동행면접을 가거나. 기업의 인사 담당자에게 구걸하다시피 해서 내담자를 취업시키거나 일을 그만두고 뛰쳐나온 사람을 다독거려 다시 일터로 가게 하거나.....
이때는 1:1 상담이 가능한 시간이었다. 내담자와 충분한 공감과 소통, 라포가 형성될 수 있는 과정이었다. 그들에게 내가 가진 능력을 쏟아붓는 것이 보람 있는 일이기도 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현타의 매를 맞지 않은 건 아니었다. 나를 속이기 위해 일부러 아픈 척하는 사람, 숨겨진 소득을 가지고 있으면서 태연히 거짓말을 하는 사람, 10년째 문밖을 나오지 않는 은둔형, 여전히 알콜리즘이나 게임에 중독된 사람들. 10여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저소득층이라는 그늘에는 혹독한 냉기와 짙은 그림자가 졌다.
그럼에도 내가 그들 속으로 열정적이게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은 변화된 나였다. 10년 전의 나는 그들을 증오했지만 10년 후의 나는 그들을 이해하게 되었다. 10년 전의 나는 워킹맘으로 심리적 여유가 없었지만 이제 나는 육아라는 부담을 어느 정도 해결한 상태였다.
나는 그들, 가난했던 그들을 경멸했지만 지금 그들을 연민했다. 그들의 겉모습보다 그들이 가진 삶의 질감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그것이 그들의 잘못이었지만,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사회 구조시스템을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그들이 봉착한 현실적인 한계를 실감하게 된 나이에 이른 것이다.
시민단체 일을 하는 동안, 알콜리즘에 빠진 그들과 부대끼다가 도망쳐 나오면서도 어느덧 나는 성장이라는 밭을 갈아엎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직업에 있어서 하고 있는 일의 의미란 어떤 것을 해냈느냐에 있기보다는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서 얼마나 성장하는가에 있는 것이다."
-에드워드 하워드 그릭스(사람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중에서
2014년 내 역량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직업상담사 1급에 응시했고 3번 만에 겨우 합격했다. 일을 하는 도중이어서(여전히 집안일과 육아는 내게 있었다) 운전대에 스티커를 붙여 놓고 차 운전을 하면서 공부했다.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그때 당시 직업상담사 1급을 가진 사람은 전국적으로 200명이 채 안돼 시점이었고 자격증을 가진다고 일을 더 잘하는 건 아니지만 아무튼 그때는 <직업상담사>로써의 열정과 보람에 푹 빠진 시기였다.
2019년 국민 취업지원제도가 시행되었고 코로나가 왔다. 고용노동부는 그야말로 민원 포화상태, 상담이 아니라 물량으로 쳐내기도 바쁜 상태. 직업심리평가는 형식적으로 수박 겉핥기식, 내담자와의 라포는커녕 내담자의 주민번호를 검색하지 않으면 누군지 알 수 없었다. 상담보다 상담내용을 빨리 입력하고 구직수당을 주느라 바빴다.
내담자 사이에 처진 칸막이, 마스크... 이 모든 것들은 상담의 방해 요소가 되었다. 무엇보다 코로나는 일자리를 휩쓸고 가버린 쓰나미였다. 아무리 뛰어난 역량을 가진 직업상담사라 하더라도 코로나가 만들어 낸 거센 파도를 이기지 못한다. 존버가 코로나를 맞서게 해 준 우리 삶의 태도였다.
직업적응 이론(Theory of work Adjustment: TWA), (Dawis&Lofquist)은 '개인과 환경 일치 이론'을 말하는데, 개인이 직업에 얼마나 만족하는지와 그 일을 얼마나 오래 할 수 있는지를 예언해주는 이론이다. 이 이론에서 "만족은 유지 행동을 동기화시키고, 불만족은 적응행동을 동기화시킨다"라는 명제를 제시한다.
즉 현재의 직업에서 만족하는 사람은 이 직업을 계속 유지하는 촉진제를 발견하고 불만족 스런 사람은 이 직업에 적응하기 위한 유연성과 인내성을 발휘한다는 뜻이다. 직업적응 이론(TWA) 이론에 따른다면 직업상담사란 직업은 나에게 아직 적응 행동기간이란 뜻이다. 조직과 개인의 적응 불일치가 심화되면 유연성과 인내력이 바닥나 조직을 떠나게 된다.
내가 아직 고용노동부의 직업상담사로 남아 있다는 것은 조직과 나의 욕구가 수용 가능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유연과 인내가 언제 바닥날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소진은 되어가고 있는 예감이 문득 든다.
우연과 운명이 닮은 얼굴로 만들어 낸 나의 오늘을, 은희경 작가의 말을 빌어 쑥 내밀어 본다.
일은 자기 인생을 빌드업 하는 과정이란 걸.... 알고 있겠지. 느끼고 있겠지.
사람들은 자기에게 보이는 것을 중심으로
그저 하루를 살아간다.
그러다 어느 한 순간 멈추고 돌아보니 그렇게 의식없이
보내버린 시간이 쌓여서 바로 자기인생이 되었다는 걸 깨닫는다.
- 은희경의 마이너리그 소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