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킹맘, 아내의 미래 딸의 미래
워킹맘, 28년... 허허 웃는다
나에게 30대 기억은 거의 없다.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뇌에서 자동으로 삭제된 모양이다. 그 시절의 사진을 보면 늘 허름한 티와 낡은 운동화, 개성을 고려하지 않은 파마머리에 하나는 엎고 또 양손으로 한 놈씩 손을 거머쥐고 있다. 피곤해서였는지 입술 한쪽은 부르트거나 눈밑에는 다크서클이 짚게 드리워져 있다.
아이들은 돌아가면서 아팠다. 병원에서 자고 씻고 출근하는 일이 허다했다. 그나마 옆에서 시어머니가 거들어준 덕분에 숨통을 틔었지 만약 그마저도 없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육아의 황금기였고 나의 잃어버린 30대 초반 시절로는 억만금을 준대도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그래서, 나는 투쟁했다.
97년 첫 아이를 가졌고 당시 나는 중소기업에서 일하고 있었다. 점점 배가 불러오자 주위 사람들은 당연히 내가 회사를 그만둔다고 생각했다. 그때 당시 여성들은 임신하거나 출산을 하면 거의 대부분 사표를 썼다. 나는 법적으로 출산휴가가 60일 있는 것을 알았고 시어머니가 살림을 도맡아 주었기에 회사를 계속 다닐 생각이었다.
9개월이 되어 부른 배를 안고 계속 회사에 출근하자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남편이 무능력한가 봐. 그러니까 저렇게 악착스럽게 회사를 다니지?"
신경 쓰지 않았다. 부른 배를 안고 당당히 출근했다.
얼마 후 회사 부장, 성희롱을 수시로 하던 부장이 개인면담을 한다며 나를 불렀다.
"출산휴가를 쓸 생각입니까?"
그렇다고 했다. 출산휴가가 60일 보장돼 있으니 출산 후에 복귀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부장은 난감한 얼굴이 되더니 지금까지 한 번도 출산휴가를 쓴 사람이 없었고, 또 내가 출산휴가를 쓰게 되면 다른 직원들도 사용하게 되므로 회사에 불이익을 준다고 강하게 퇴사하라고 압박을 가했다. 퇴사를 하면 출산휴가 기간의 임금을 주겠다고 했다.
"저는 퇴사할 마음이 없습니다. 출산휴가를 쓰고 계속 출근을 할 겁니다. 만약 회사가 출산휴가를 못 쓰게 하면 노동부에 진정을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 2층 계단을 내려오는데 배가 질끈 당겼다. 담담하게 부장에게 말했지만 꽤나 긴장을 했는지 아랫배가 단단해졌다. 한동안 사무실 의자에 앉아 배를 다독거렸다.
직원 300명이 넘는 회사에서 97년 10월 처음으로 내가 출산휴가를 썼다. 60일이었다. 아이를 낳고 산후조리 후 모유를 먹였는데 60일이 금방 갔다. 미처 단유를 할 새가 없이 회사 복귀 시점이 다가왔다. 일주일 전부터 고민이 되었다. 그냥 회사를 그만둘까, 아니야 회사에 그렇게 당당하게 말을 했는데 어떡하든 복귀해야지.... 아직도 힘차게 젖을 빨고 있는 아이를 보니 가슴이 아렸다.
복귀 이틀 전 아이와 단유를 시작했다. 꼬박 이틀을 아이가 굶었고 나는 퉁퉁부은 가슴을 헝겊으로 싸 맨 채 출근을 했다. 출근길에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출근하고 나서도 불은 젖을 화장실에 가 몰래 짰다. 젖몸살이 나서 온몸이 후끈거리는데도 이를 악물고 참았다. 회사 사람들의 눈초리를 다 이겨 내고 싶었다. 그렇게 출산휴가 1호가 된 뒤 하나둘씩 다른 여직원들도 출산휴가를 쓰기 시작했다. 출산휴가 사용 후 회사에서 잘릴 줄 알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자 자연스럽게 출산휴가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IMF의 파고가 거세지자 회사는 경제위기를 겪었고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비전이 없었다. 그때 나는 결심했다. 출산휴가 60일 제도만 가지고는 여성들이 일을 할 수 없겠구나, 출산휴가 확대와 육아휴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성들이 일을 하려면 모성보호 제도가 확대되지 않으면 여성들의 경력단절은 악순환될 것이라 확신했다.
실지로 학교에서 행정 공무원으로 일하던 언니는 육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을 그만두었고 친구들 대부분이 육아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어야 했다.
나는 회사를 그만둔 뒤 여성 시민단체로 들어가 적은 임금에도 불구하고 모성보호법 제정을 위한 여러 가지 투쟁을 전개했다. 출산휴가가 실지로 기업에서 얼마나 사용되고 있는지에 대한 조사를 했고 캠페인을 벌였고 시민단체들과 여성들의 출산과 육아에 관한 정책에 대한 토론회와 국회 입법을 건의했다.
매주 수요일마다 거리에 나가 서명을 받았다. 어떤 날은 아이를 업고 나갔고 어떤 날은 땡볕에서 마이크를 잡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서명을 받기도 했다. 일하는 여성들을 위해 출산휴가 확대와 육아 휴직 관련 법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투쟁했다.
그 사이 친구들은 더 좋은 곳에서 취업해 나보다 높은 연봉을 받았지만 나는 그것이 먼저 아이를 낳고 일을 하는 엄마가 되어 본 나의 시대적 책무라고 생각했다. 필요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먼저 움직여야 다음 세대가 혜택을 누릴 수 있다고.
그리고 나는 우리 딸들이 나랑 똑같은 수모, 마치 아이를 낳는 것이 개인이 감당해야 할 어떤 어려움으로 치부되거나 개인의 하소연으로 끝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딸들은 당당하게 일하며 육아라는 사회적 행위를 부드럽게 소화하기를 바랐다.
딸들의 세상에서는 출산과 육아가 좀 더 존중받는 시간, 특히 육아 때문에 자신의 일을 그만두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 열심히 투쟁했고 그 투쟁 때문에 아이에게 관심을 두지 못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아이를 사랑하는 방식이 달랐지 내가 아이를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지금의 시간이 왔다.
남편과 함께 <82년 생 김지영 영화>를 보고 난 뒤 나는 펑펑 울었고 남편은 약간 시시해하는 표정이었다. 영화가 끝났는데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엉엉 우는 내 모습을 보며 남편은 오히려 이상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울음이 멈추지 않아 목에 걸었던 스카프를 끌러서 얼굴을 뒤집어쓰고 울었다.
"그렇게 슬픈 장면이 있었어?"
"모르겠다고? 저 걸 몰라?"
눈물범벅인 내가 남편에게 언성을 높이자 여느 때처럼 얼렁 자리를 벗어났다.
나처럼 이 영화를 해석한 사람이 있나 싶어 영화 포스팅을 찾아봤는데 안타깝게도 내가 느낀 그 지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전에 내가 참여하고 있는 공동체 모임을 이야기해야겠다. 내가 최고 연장자이다. 대부분이 30-40대로 구성된 다양한 여성들이 모인 지역 모임이다. 원래는 독서토론을 위한 모임이었으나 어찌어찌하다 보니 수다모임 비슷하게 되어가고 있지만 여기서 <내가 지나왔던 30대의 시간>을 고스란히 본다.
출산과 육아휴직과 모성보호 법이 확대되었지만 30~40대 워킹맘은 여전히 육아와 일과 전투 중이었다. 맞벌이를 하는 H는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아이들 먹을거리를 챙겨놓고 옆 동에 사는 육아 도우미 어르신께 아이들을 맡기고 저녁에는 힘들면 주로 배달음식을 먹는다고 했다.
그리고 코로나, 죽고 싶다고 했다. H는 그래도 영업 해외 마케팅에 남다른 실적을 올리며 승진(차장)까지 했다. H가 남자였다면 부장은 식은 죽먹기였을 거다. 똑똑하고 야무지고 눈썰미 있고 영어와 일어까지 능통해 회사 실적을 팍팍 올리는데 부장이 뭔가?
그런 H가 육아로 힘들다고 했을 때 정말 나라도 뛰어가서 아이들을 봐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도 힘들었는데 나보다 더 똑똑한 H도 힘들다니.
우리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만나기로 약속, 굳게 다짐했으나 거의 만나질 못했다.
"줌으로 만나자."
"아이가 아직 안자요."
코로나는 워킹맘들의 숨구멍을 틀어막아 버린 게 확실했다. 그나마 톡으로 살아 있음을 확인한다.
나보다 10살이나 어린 그녀들의 삶을 바라보는 내가 느낀 슬픔은 이것이다.
내 딸도 어쩔 수 없겠구나.
다시 82년 김지영으로 돌아가 보자.
지영이 할머니로 빙의되어 엄마 미숙을 위로한 것은 <여성의 삶이 나아지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메타포다.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하고 아이를 키워야 하는 것이 지영의 삶인 것처럼, 동생들을 위해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것이 엄마의 삶인 것처럼, 내 딸도 나처럼 무의식적으로 혹은 의식적으로 든 <본인이 살고 싶은 삶>을 여성이라는 이유로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적나라게 보여주는 것.
그 대목에서 나는 울음이 복받쳤다.
죽을힘을 다해 삼베를 짜며 엄마는 내게 대학교 공부를 시켰다. 엄마가 가난한 삶을 산건 못 배워서였기 때문에. 엄마는 자신보다는 나은 삶을 딸에게 물려주고 싶었다. 나 역시 엄마가 가졌던 마음을 솟구치게 가지고 있다. 너희 세대는 나보다 더 괜찮아져라. 내 시절보다 행복한 워킹맘들을 보기를 소망한다. 아니 갈망한다. 위안을 가진다면 눈썹만큼씩 점점 나아지는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느낀다. 미세한 변화가 더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 믿고 싶어 진다.
그럼에도, 뉴스에서 신당역 스토킹 살인이 화제가 되었다. 무엇이 더 나아지고 있나. 자책하는 시간이었다.
엄마가 아니라 사회가 <우리의 지영에게> 말해 줄 수 없을까.
잘하는 일
좋아하는 일
너하고 싶은 거 다해.
그래서, 앞으로도 나는 귀찮게 할 것이다.
차별에, 부당함에, 어떤 암묵적인 관행에.... 단단한 껍질을 둘러싸고 있는 시선에.
세상의 모든 김지영, 손가락 걸자. 깡으로 지금을 버티자. 같이, 연대하며.
여성이란 신발에 더 많은 남자의 발들이 들어와 보기를 바라며.. 아들에게 늘 잔소리한다.
설거지는 해주는 게 아니라 밥 먹는 모든 사람들이 나누는 공평한 노동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
능청스럽게 아들은 네.. 네.. 어머니 하며 알아들은 척을 한다. 세상은 조금씩 변하고 있으며 또 변할 것이다. 그러니 좌절보다는 희망을 걸고 깡있게 버텨보자. 그래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