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숙제지만 아직도 끝내지 못한 숙제
커피 루왁
공시생 삼수를 걸쳐 시청 공무원으로 취직이 된 은희씨는 인 서울은 아니지만 지거국(지방 거점 국립대)을 나왔다.
임용장을 받는 날, 까만 정장 치마를 입었다 무릎 위로 올라 온 체크미니 스커트를 입었다가 엄마한테 손사래를 당하고, 하는 수없이 까만 스커트로 갈아입었다.
"출근이 ..미팅인 줄 아니?
그래, 첨이니까. 엄마 말을 듣는 것도 괜찮으리라.
출근한 지 이틀째 되던 날, 8급인 서영 언니가 은희 씨를 불렀다. 탕비실이었다. 조그만 탕비실 선반 위에 하얀색 세라믹으로 세팅된 핸드드립기 세트가 놓여있었다. 한쪽으로 갈색의 그라인더도.
까만 머리를 질끈 묶은 서영 언니가 냉장고에서
커피 루왁 원두를 꺼냈다.
"과장님은 이 원두 밖에 안 드시거든.
원두를 갈아야 해. 미리 갈아 놓으면 향이 사라진다고 싫어하셔."
서영 언니는 한쪽에 놓여 있는 그라인더에 원두를 넣고 손잡이를 돌렸다.
은희는 아직도 서영 언니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다.
"은희 씨 오기 전까지 지금 8개월째거든.
이제 은희 씨 차례야. 자. 원두는 이 큰 숟가락으로 두 스푼이어야 하고, 물은 이 컵으로 두 번."
능숙한 손놀림으로 서영 언니는 원두를 갈아 냈다.
"비가 오거나 날이 흐린 날은 옆에 계장님들도 이 커피를 달라고 하시거든. 그러니까 조금 넉넉하게 갈아놔도 되니까. 지금은 여름이니까. 이 정도로."
서영 언니는 마치 아주 거대한 업무를 인수인계하는 것처럼 자세히 가르쳐 주었다.
은희는 생각했다.
업무 인수인계는 종이 한 장으로 하면서 과장님의 커피 취향을 이렇게 자세히 가르쳐 주다니? 당황했지만 손놀림이 빠른 서영 언니에게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원두를 드리퍼에 붓고, 커피를 내린 뒤 서영 언니는 플라스틱 박스에서 블랙커피 일회용과 맥심 커피 일회용을 꺼냈다.
블랙커피를 들고 이건 계장 님 거,
맥심 커피를 들고는 이건 주무계장님 꺼.
"한꺼번에 다 외울 수 있겠어?"
은희는 점점 얼굴이 굳어졌다.
내가 그럼 커피 타려고 여기 죽자고 들어 온 거야?
차라리 바리스타를 뽑지!
그러나 은희는 입을 꾹 다물고 서영 언니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걸 서영 언니는 은희가 헷갈린다는 뜻으로 알아 들었는지 쉽게 설명했다.
"계장님은 얼굴빛이 검잖아. 블랙,
주무계장님은 하얀빛이니까 맥심,
자기 설명이 너무 정확하다고 생각했는지
서영 언니는 살포시 웃기도 했다.
"오늘까지는 내가 할 테니까 내일부터는 자기가
해야 돼. 그리고 과장님 세라믹 드립 세트 아끼는 거거든? 설거지하다 깨뜨리면 사다 놔야 해.
이거 이 동네에서는 팔지도 않는 거래.
이전에 어떤 여직원이 이 세라믹 세트 깨뜨렸다가 인사고과 제일 낮게 받았다는 말이 있어.
자기가 신참이라도 인사고과를 과장님이 매기는
건 알지?"
그때서야 은희는 이해가 되었다. 서영 언니의 커피 인수인계가 왜 이리 장황했는지. 나름 서영 언니는 자신에게 안전한 펜스의 법칙을 알려주는 것이다.
"아, 그래요? 그건 몰랐네요."
서영 언니가 쟁반에 막 내려진 고소한 커피를 과장님께 배달하고 또 주무계장님께, 또 은희네팀 계장님께 배달했다. 과장이 커피잔을 들며 말했다.
"역시 커피는 루왁이 최고야."
그날 밤 은희는 잠을 뒤척이며 고민에 빠졌다.
바리스타냐? 인사고과냐?
얼마 지나지 않아 탕비실에 있던 핸드드립 세트는 과장의 뒷자리로 옮겨졌다.
계장들도 자기 손으로 커피를 타기 시작했다.
비밀이에요
사연은 이러 했다.
한 달 전 은희는 탕비실에서 서영 언니를 잡고
하소연을했다.
"있잖아요.... 저는 커피 탈 때마다 내가 이러려고
삼 년 동안 정말 뽕빠지게 공부했나 싶더라고요?
화가 막! 치밀어요!
더구나 저는 커피를 안 마시거든요!
그래서 사실.... 언니한테만 비밀로 말하는 건데요, 커피를 탈 때마다 막~ 침 뱉고 싶은 욕구가 생기는걸 겨우 참거든요. 침을 뱉을지, 가래를 뱉을지..그게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지금 꾹 참고 있는 중이에요.
언니, 절대 다른 사람한테는 이야기 하시면 안돼요."
그때 은희는 엄마가 말렸던 블루진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말은 빠르게 퍼졌다. 서영 언니가 동기에게, 동기는 또 친한 동기에게.... 그 말은 결국 돌고 돌아 과장과 계장들에게도 전해졌다.
"과장님, 요즘... 커피가 더 맛있지 않으세요?"
은희가 웃으며 과장에게 콧소리를 했을 때 과장의 맵새 눈이 더 작아졌다. 과장 책상 위에서 식은 커피가 향내만 풍겼다.
은희는 인사고과냐 바리스타냐의 경계에서 잠시 흔들렸지만 커피 없이도 자신은 실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확신했다.
삶은 매 순간 이런 작은 선택의 연속이니,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믿기로 했다.
7급 승진에 떨어진 서영 언니가 결근한 날이어서
은희는 괜찮냐고 위로의 카톡을 보냈다.
그러고 눈을 들어 보니 과장이 그라인더로 커피를 갈며 중얼거렸다.
"에헛, 그라인더 날이 상했네. 이것도 귀찮은 일이야 일회용으로 바꾸어야겠어"
옆에 계장이 일어나 과장에게 그라인더를 뺐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은희는 키보드를 치며 업무를 시작했다.
오늘 젠더교육이 있으니 전 직원은 참여하라는 메신저가 날아와 있었다.
#입사한 신규가 밥을 먹고 나면 탕비실로 커피를 타러 갔다. 신규의 손을 내가 잡았다. 커피 취향이 다르니 각자 취향대로 타 먹게 놔두라고.
네가 이러면 담에 오는 신규가 또 해야 된다고.
내 눈빛이 강렬했는지 신규는 그대로 자리에 앉았고 내 말을 들은 누군가는 눈을 돌렸다.
여자 어른으로 어떤 액션을 취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경우가 많다. 사소한 것이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일상의 자잘한 경우들,
기준은 항상 이렇게 묻는다.
저 아이가 내 딸이었다면 기분이 좋았을까?
때문에 사소하고 당연한 것에 예민하게 반응해야 할 책무가 아직은 있다.
그대들이여, 커피숍도 많으니 테이크 아웃해
드시기를...
21세기는 취향 존중의 시대가 아닌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