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하고 착한 늑대에게 온 선물
"자, 이제.... 계약은 다 됐습니다."
현석이 8억짜리 아파트 매매 계약서에 도장을
꾹 늘렀을 때 두꺼운 돋보기를 쓴 중개사가 악수를 청했다. 자신의 이름이 적힌 매매계약서를 보자 현석의 가슴 한 귀퉁이에서 화산처럼 거대한 뜨거움이 솟구쳤다.
50평대 대리석 바닥을 깔고 11층에 위치한 아파트는 식기세척기와 음식물 자동 분쇄기가 설치된 최신식, 그동안 살던 전세와는 쨉이 안 되는 집이었다. 창문 너머로 펼쳐진 해운대 바다는 조용히 금빛으로 출렁였다.
그것은 신이 자신에게 내려준 축복의 라이센스였다. 절망의 모퉁이를 꺾었을 때 이런 축복이 자신을 마중하고 있을지? 자신에게 온 행운에 감사해 현석은 찔끔 눈물을 흘렸다.
"인천 국제공항까지는 택시비가 얼마죠?"
최고 손님이 많은 금요일 오후 4시, 파란색 다이아몬드 무늬의 넥타이를 맨 그는 어깨에 백팩을 메고 있었다. 머리는 약간 곱슬이었고 이제 막 흰머리가 하나 둘 똬리를 트는 듯한 50대 중후반의 남자.
인상이 선했다.
" 인천 국제공항까지요?
60은 주셔야 하는데..."
"괜찮습니다. 워낙 급한 출장이라서요.
캐나다로 가는 비행기를 타야 하거든요."
그러고는 얼른 택시 문을 열었다.
장거리를 뛸 경우 원래 택시비의 일부를 선불로 받는 것이 관례였으나 카드 결제일 경우는 대부분 내리면서 비용을 지불하기에 현석은 당연히 그가 카드결제를 할 것이라 생각했다.
네비로는 8시 45분에 인천 국제공항 도착으로 나왔지만 금요일이라 차는 더 밀릴 것이었다.
현석의 옆자리에 앉지 않고 뒷자리에 앉은 남자는 휴대폰으로 영화를 보는 듯했다. 현석은 백미러로 남자의 얼굴을 간간히 보았지만 1시간이 지나도 남자는 한마디도 말을 걸지 않았다.
그리고 현석이 대전 인삼 휴게소에 차를 세웠을 때
남자가 말했다.
" 제가 현금이 없어 그러는데... 나중에 택시비 지불할 때 같이 계산해 드릴 테니, 커피 하나만 부탁해도 될까요?"
현석은 화장실을 다녀와 남자가 주문한 스타벅스 캔커피 로스트 블랙을 사 갔다. 30분 뒤에야 영화가 끝났는지 남자는 현석에게 말을 걸었다.
" 제가 간디언 본사에서 일을 하거든요. 오더를 보냈는데 클레임이 걸렸다네요. 디자인이 잘못됐다고... 자그마치 13억짜리 계약인데..."
남자는 콧잔등으로 내려온 까만 안경을 밀어 올리며 말했다.
대전을 넘어서자 차는 정체를 반복했다. 인천 국제공항을 찍고 내려오자면 새벽이 되겠다는 짐작으로 현석은 열심히 엑셀을 밟았다. 송도 IC에서 연수 방면으로 접어들 때 기사식당이 하나 보였고 현석은 차를 세웠다.
" 식사를 같이 하시겠어요?"
" 이렇게 허름한데서요?"
남자는 현석을 보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그러죠, 라며 가방을 택시에 두고 내렸다.
해물된장찌개를 먹고 난 후 남자의 밥값도 현석이 계산했다.
" 참, 이런 음식은 또 오랜만에 먹어보네요. 계산은 택시비에 포함시키시죠."
현석은 그러자고 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인천 국제공항으로 가는 것이 중요했다. 이제 30분 정도만 가면 될 것 같았고 다행히 연수를 지나서는 차가 밀리지 않았다. 처음 가보는 인천 국제공항 도로는 속 시원하게 뻥뻥 뚫려 있어 속력이 났다.
현석은 운전하며 계산했다.
택시비 60만 원, 아까 캔커피 1,500원, 밥값 12,000원, 그래 캔커피는 서비스로 치자. 612,000원 받자. 현석은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인천 국제공항 제2 Gate, 하필 그는 제일 교통이 복잡한 제2 Gate로 가자고 했다.
금요일 저녁 9시가 지난 인천 국제공항에는 수많은 사람과 차와 택시와 리무진이 융숭거렸다.
역시 대한민국 최고의 공항다웠다.
택시 하차장에 차를 대고 현석이 뒤를 돌아봤을 때 남자는 이미 백팩을 메고 차 문을 열고 있었다.
"기사님, 제가 지금 너무 화장실이 급해가지고...
일단 제 지갑 드릴 테니 계산하시고 여기 계세요."
남자는 오래되고 낡은 갈색 지갑을 현석에게 던지듯 넘겨주고는 공항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남자의 걸음이 무척 빨랐다. 현석은 지갑을 받았으므로 괜찮다고 생각했다.
착하고 순한 늑대였으므로
그러나, 지갑 안에 있는 신용카드는 계속 승인 불가로 떴다. 유효기간이 이미 지나 있었고 현금은 천 원짜리 2장이 고작이었다. 현석이 뒤늦게 공항 안으로 뛰어들어갔으나 거대한 로비와 너무 많은 사람이 출렁였다. 해운대 모래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의 뒤통수, 현석은 자신도 모르게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다시 인천 국제공항에서 해운대로 내려오는 길에 현석은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웠고,
그날 맞추지 못한 사납금을 제 지갑에서 꺼내 채웠다. 도로비는 또 얼마나 비싸든지.
어둠 속 터널을 달리는 듯한 절망감에 현석은 끝내 눈물을 훔치고 말았다. 얼마간이라도 선금으로 카드결제를 했어야 했는데. 이미 놓친 버스였다.
어리석었던 자신의 행동에 화가 났고 분했다.
편의점에서 소주 한 병을 마시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까슬한 수염을 만지며 집으로 들어왔다.
현석은 혹시나 하고 남자가 던지고 간 허름한 지갑을 호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며칠 동안 절망감에 일을 나가지 못했던 현석은 3일 만에 겨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잊자는 생각으로 지갑을 버리려다 안에 삐죽이 나온 로또 종이를 유심히 보았다. 며칠 뒤 발표가 있는 로또였다. 버리려다가 밑져 봐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제 지갑에 옮겨 넣었다.
" 여보! 이거 왠지 기분이 좋은데?"
아내가 눈을 반짝이며 좋아했다.
지난밤 좋은 꿈을 꾸었다나?
아내는 철이 없고 순진하다.
로또가 될 확률이 얼마인지도 모르면서 저런 종이 쪼가리에 희망을 걸다니. 현석은 이제 장거리 손님은 받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우며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비번인 일요일 늦은 잠에서 깬 현석은 로또 번호를 검색했다. 사기꾼의 아무것도 남겨두고 싶지 않았다
로또종이조차도 박박 찢고 싶었다.
첫 번째 꽝, 두 번째 꽝, 세 번째 2개가 맞았고
네 번째 꽝, 그럼 그렇지!
다섯 번째 1개, 여섯 번째 2개.
로또가 괜히 로또겠어?
일곱 번째 꽝, 여덟 번째 1개, 아홉 번째 꽝이었다.
" 그럼 그렇지! 사기꾼 주제에 로또 복이 있겠어?"
그리고,
마지막 열 번째......
허----윽!!!!
현석은 한 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현석의 아내는 8억짜리 아파트 대리석에 벌렁 드러누웠다.
" 애들 뛰어도 하나도 안 울리겠다."
그 때 딩동! 초인종이 울리며 패브릭 소파가 도착했다. 캐나다 이케아점에서 직수입한 소파였다.
현석은 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보냈다.
고난과 시련 뒤에 축복이 온다더니, 틀린 말이 아니다. 현석은 소파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참으로 푹신한 소파였다.
잠이, 꿀잠이 스르륵 왔다.
# 착하고 정직한 사람만 세상에 있을 것 같지만
아니다. 한 때 택시운전을 잠시 했던 착하고 순한 늑대 이야기. 그것이 계기가 되었을까. 때려치웠다.
사람에 대한 순도 100%의 믿음에서 이러한 사건으로 인해 30% 정도의 불신이 생겼다. 젊었고 순수했으니까.
오늘 당신이 실패했더라도 30%는 손해보지 않았다고, 위로한다. 대부분의 인생이 쓴맛이고 그래서 단맛이 더 달다고(채현국, 당신이 빛나던 순간 중)
쓴맛을 잘금잘금 씹다가 가끔 오는
단맛은 오래오래 음미하며 살자고,
순하고 착한 늑대와 더불어.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