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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아치우먼 Nov 03. 2020

30년만의 지리산 천왕봉, 역시 철학각이다.

단풍과 함께 나도 불탔다


처음부터 지리산 천왕봉을 정복할 생각은 아니었다.

삶은 꼭 계획대로 되는 건 아니다. 계획을 해도 안 되는 게 있고 계획하지 않아도 되는 것도 있다. 토요일 모임을 끝내고 오니 밤 12시, 일요일 일찍 산행하는 건 무리라는 막연한 느낌으로 그냥 일어나는 데로 지리산 갔다가 편하게 돌아오기로 하고 나섰다.

컵라면을 사가야 하는 곳에서 나는 편의점, 착한 늑대는 슈퍼를 말했는데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샀고 바로 위에 있는 슈퍼는 문을 닫았다.

야, 오늘 재수가 좋은 것 같아.

오늘 왠지 지리산 정상을 갈 수 있을 것이라는 자기 암시의 시초였다.


휴게소 들러서 볼일 보고 밥 먹고 커피 마시고. 아이코 이런 비까지 슬슬 뿌려서 정말 갈 때까지만 가다가 내려오자고 다짐을 하며 슬슬 차를 몰았다. 검색 해 보니 중산리 주차장에서 환경교육원까지 운행하는 차가 11시를 지나면 오후 1시 30분, 11시 차를 못타면 정말 천왕봉은 완전히 무리였다. 중산리 주차장 도착시간은 10시 54분, 아뿔싸 주차장에 차 댈 곳이 없었다. 순간 어디선가 나타난 주차 아저씨가 키를 맡기고 가라 하신다. 오, 이런.....

야아, 오늘 진짜 재수가 좋다니까.

그건 또 정상을 갈 수 있을 것 이라는 두번째 자기 암시였던 셈이다.


11시 출발하는 버스를 타고 10분을 갔다. 버스에는 5팀 정도와 혼족 아저씨 한분이 계셨다. 안내판을 보느라 늦게 출발했지만 우리는 모든 팀을 앞질렀다.


지리산의 철학각은 이제 시작된다.

12시 10분에 법계사에서 정상을 향해 출발했다. 이미 로타리 휴게소에는 정상을 다녀오신 분들이 식사를 하고 계셨다. 날은 계속 비를 흩뿌리고 있었다. 흩뿌린다는 의미는 바람에 비가 날린다는 것이다.


여기서 딱 1시간 30분만 더 올라갔다가 내려오자.

이 말의 의미는 그 안에 반드시 천왕봉에 도착한다는 세밀한 계산이었지만 멍청한 나는 그냥 콜을 외쳤다. 안내판을 보지 않았기 때문에.

산에서 인생의 지혜를 배운다는 말은 아인슈타인 오라버니의 상대성 이론보다 더 정확한 말이다. 왜냐하면 나는 상대성 이론은 검증된 것을  한번도 보지 못했지만 이 말은 매번 진리임을 실감했다.  이번에도 법계사에서 천왕봉을 오르는 시점에 또 실감했다상대성이론보다 더 명백한 진리는 산에서 인생의 지혜를 배운다는 것, 고로 아인슈타인 오라버니의 상대성 이론은 몰라도 산은 가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 출발은 늦은 셈이었고 정상이 가까울수록 비바람은 거칠었다. 우리 뒤에는 아무도 올라오는 사람이 안보였고 착한 늑대는 30년 만의 산행이라 길이 낯설었다. 산은 가파랐고 모두들 내려오는 사람들뿐이었다. 호흡이 턱밑에서 차오르며 착한 늑대와의 간격이 벌어졌다. 그때 한 무리가 산을 내려가며 내 등 뒤로 이런 말이 들렸다.


대체 지금 올라가면 언제 정상 갔다가 내려온다는 거야?

보통 사람보다 조금 늦은 길을 걷는다고 해도 그 사람을 비난해서는 안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불안감은 심한 펌프질을 당했다. 땀과 비로 온몸이 젖어들며 흐린 날씨에 산은 금방 어두워질 것이라는 점, 정상까지 얼마나 더 올라야 하는지, 우리가 제일 꼴투바리(꼴찌)라는 팽팽해진 불안감이 휘몰아쳤다. 착한 늑대에게 말을 걸기 위해서는 또 그만큼을 올라야 했다. 돌과 지지대를 잡으려니 모두 젖어서 미끄럽고 손이 시렸다.


이런, 하필 장갑을 안 가져오다니.

맨손으로 손이 시뻘게 졌다.


그때 산에서 내려오던 아주머니가 내 맨손을 보더니 잠깐만 서라고 했다. 자신의 배낭에서 면장갑을 꺼내 주었다. 가 오늘 새댁에게 보시하려고 장갑하나를 더 챙겨 왔나 보다. 그리고 흔쾌히 새장갑을 내게 주고 내려가셨다. 빨리 올라가야 한다는 일념에 고맙다는 말만 하고 얼굴을 자세히 보지 못했다. 정말 장갑은 도움이 많이 되었다. 돌을 짚고 올라가는데 장갑 덕택에 미끄럽지도 손이 시리지도 않았다.


앞을 보니 돌무더기의 깊이가 가팔랐다. 앞에서 또 한 무더기의 사람들이 내려왔다. 얼마나 남았을까요? 나도 모르게 물음이 나왔다. 아저씨 한 분이 웃으며 말했다. 차로 3분! 800m가 남았는데 차로는 3분이니 천천히 조심히 다녀오면 된다고 격려해 주셨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마음이 팍 안심 되었다. 산을 오르며 나는 두 가지 버젼의 말을 들었다.

언제 오를거냐고 비난하는 투의 말과 차로 3분밖에 안걸리니 잘 다녀오라는 여유있는 농담의 말....나의 말투는 전자였을까, 후자였을까? 말 뽄새(모양)을 이쁘게 해야겠다는 다짐.... 반성했다.

2.2km 중 800m가 남았으니 다 온 셈이 아닌지. 정말 그때부터는 오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 덕에 부지런히 앞만 보고 올랐다. 산은 짙은 안개로 앞을 볼 수 없었다. 정상을 앞둔 클라이맥스 계단에서 산을 오르는 두 부부를 만났다. 반가웠다. 숨이 턱턱 막혔다. 고개가 밑으로만 꺾여졌다.



그래 봐야 못 움직이는 산이지. 나는 이렇게 걷는 산이야. 내가 너를 못 오를 줄 알았지.


1시간 20분 만에 천왕봉에 도착했다. 착한 늑대는 30년 만에 오르는 정상을 향해 나도 내팽개쳐 버리고 먼저 올라갔다. 맞다. 산은(=인생) 결국 내가 오르는 것이다. 같이 갈 수는 있지만 결국 산(=인생) 오르는 건 나다. 산도 인생도 아무리 가까운 사람일지라도 대신해 줄 수 없다.



날이 좋을 때 천왕봉 정상에서 사진 몇 컷을 찍으려면 한참을 줄 서서 기다려야 한다는데 비바람이 불어서 사람이 많이 없었다. 그래도 줄은 서야 했고 여전히 주책없이 온갖 포즈로 사진 찍는 사람도 있었다. 후다닥 사진 몇 컷을 찍고 하산했다.  


아뿔싸, 우리가 맨 끝인 줄 알았더니 버스 타고 온 팀이 우리를 알아보고 아는 척을 했다. 진짜 산을 잘 타시네요. 옷 색깔을 보니 아까 우리가 앞질렀던 남자 두 분이 맞았다. 정상에 줄 서는 사람이 많이 없으니 잘 다녀오세요.

그리고 또 조금을 내려가니 이제는 중년 여자 두 분이 헐떡 거리며 올라오고 계셨다. 역시나 우리를 알아보셨다. 이제 얼마 안 남았어요. 얼른 다녀오세요. 우리가 꼴투바리(꼴치)인줄 알았더니 아니었다.



그니까 꼴찌라고 느껴질 때는 뒤를 돌아보면 된다. 아무도 없는 게 아니라 내 눈에 안 보이는 것 뿐이다. 이제 꼴투바리(꼴찌)면 어때가 아니라, 내 뒤에 수많은 꼴투바리가 있다고 믿으면 정답이다.


하산해서 로타리 대피소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컵라면을 먹으니 꿀맛이었다. 따뜻한 커피 한 잔은 더 꿀맛이었다. 비를 피해 옆에 앉은 아저씨가 혼자 삼각김밥을 드셔서 커피와 따뜻한 물을 나눠 먹었다. 그런데 옆에 계시던 아주머니 두 분이 우리를 보면서 따뜻한 물이 부럽다고 하셨다. 그분들께 커피는 못 드리고 따뜻한 물만 드렸다. 그렇게 먹고 나서 하산길을 서로 의논하면서 같이 칼바위 쪽으로 가자고 했고 세 팀이 하산을 준비했다.


어, 내 장갑.

장갑을 끼니 옆에 있던 아주머니가 아까 내가 장갑준 새댁이네 라고 하시며 웃으셨다. 알고 보니 옆에 나란히 서서 밥 먹은 분이 내게 장갑 보시를 하셨던 분이셨다. 아이고 이런. 커피가 다 떨어져서 못 드려 아쉽다고 했더니 따뜻한 물만이라도 고맙다고 하셨다.  왜 이렇게 늦게 내려오셨냐고 물었더니 중간에 놀면서 쉬엄쉬엄 와서 그렇다고 호호 웃으셨다. 뭐든 잘 웃으시는 분이셨다. 우리도 하하 웃었다.


내게 장갑 주신 아주머니 두 분

산은 사람을 무장해제시키는 힘을 갖고 있다. 나누기도 쉽고 받기도 쉽고 말 걸기도 쉽다. 산에 오면 별 사람이 없다. 산과 산에 감동받은 사람만 있을 뿐.


정확하게 4시 50분 중산리 휴게소 도착. 거의 6시간 만에 천왕봉(1915m)을 아무 계획 없이 다녀왔다. 벼락치기 지리산 정복이었다.  

엄밀하게 말하면 산이든 어떤 목표이든 계획보다는 의지가 더 중요하다. 주변의 모든 조건을 하나의 의지로 몰아가는 자기 암시. 착한 늑대는 사실 자기 암시를 처음부터 건 것이었다. 그만큼 30년 만의 천왕봉이 간절했던 것이다.



역시 오늘 운이 좋았어.

역시 당신의 간절함은 통했어로 의역한다.

무엇이건 간절함이 디폴트가 되는 건 만고의 진리다. 삶도 산도.




가을, 지리산, 인연에 대하여 한  말씀


저기 저 숲을 탁 스며드는

갓 구운 햇살을 고요히 바라보는 것

노을처럼 번져오는 구름바다에 몸을 싣고

옷소매를 날개 펼쳐 기엄둥실 노 저어 가보는 것

흰 구절초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김치 김치 사진 찍고 있는 것

그리하여 물봉숭아 꽃씨가 간지럼밥을 끝내 참지 못하고

까르르르 세상을 향해 웃음보를 터뜨리는 것


바람은 춤추고 우주는 반짝인다

지금 여기 당신과 나

마주 앉아 눈동자에 눈부처를 새기는 것

비로소 관계가 시작되는 것이다

인연은 그런 것이다

나무들이 초록의 몸속에서

붉고 노란 물레의 실을 이윽고 뽑아내는 것

뚜벅뚜벅 그 잎새들 내 안에 들어와

꾹꾹 손도장을 눌러주는 것이다.

- 박남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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