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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아치우먼 Nov 04. 2020

동서문학상에 떨어졌는데 신춘문예는 응모해야 할까?

소설이라는 허구 문학에 빠진 죄


동서문학상 맥심상이라니?

어떤 공모전이든 응모를 끝내고 나면 발표일을 기다리지 않는다.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수상작은 공개된 발표일보다 앞서 결정되면 반드시 사전에 개별 연락이 간다는 사실은 거의 100% 일치했다. 그래서 발표일까지 아무런 연락이 없으면 그 공모전은 떨어진 것이다. 20년 동서문학상도 그랬다. 잊고 있었는데 아무런 연락이 없었고 앨리스가 갑자기 인터넷을 보다가 생각난 김에 검색해 보았는데 역시나 수상작에는 없었다.


수필 하나가 맥심상에 들어가 있었다.



만약 응모했던 소설 하나가 맥심상에 들어가 있었다면 그나마 위안이 되었을 텐데, 하필 수고를 제일 적게 들인 수필 <삼랑진 늪>이 맥심상에 들어가 있다 대상부터 입선까지 쫘르륵 나온 제목들과 이름들이 아카데미 시상식 명단처럼 부러웠다.


이런 게 반전이다.

며칠 공들인 소설 2개는 쑤~~ 웅 미끄러지고 대충대충 적어낸 수필은 겨우 맥심상이나 걸리고. 뭐라고 할까? 대학에다 유학까지 보낸 아들은 남의 집 아들로 가버리고 투자 안 한 아들이 가난살이를 면치 못하면서 내 뒷바라지하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기운이 쏙 빠졌다. 참가상 비슷한 맥심상을 받는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오늘 전화가 왔다. 기념품으로 캘리 액자를 보낸다고 한다. 고맙다고 했다.


소설은 아무래도 나랑 안 맞는가 봐

소설이 맥심상에도 못 올라간 걸 보면 소설의 기본조차 갖추지 못했다는 것인데 소설 쓰기를 공부해야 하나, 소설을 쓴다는 것이 이처럼 난해한 일인지 까마득해지기 시작했다. 아무튼 기가 꺾였다, 단단히 응모했던 글을 쳐다보기도 싫다. 내가 나에게 삐지다니 어이가 없어 또 웃음이 나온다.


나는 소설이 이다지도 쓰고 싶은 걸까?

허구의 세계가 주는 작가만의 메시지가 부럽다. 내가 만들어 낸 상상의 인물로 빠져 드는 순간이 좋고, 숨겨진 반전과 작가만의 의미를 내포하는 장치들이 매혹적이다. 허구의 세계로 빠져드는 것 자체가 내게 끌림을 준다.

더 본질적으로는 소설을 쓰는 동안 내가 행복하기 때문이다. 왜 행복하냐고 묻는다면 그건 할 말이 없다. 사는 게 행복하다는데 왜 사는 게 행복하냐고 묻는 거랑 같은 말이다. 진짜 좋은 것은 이유가 없이 좋기 때문에 자꾸 이유를 물으면 국어를 수학공식처럼 풀려고 덤벼드는 꼴이다.


단지 그것뿐일까?

물론 음복을 쓴 강화길이나 친애하고 친애하는을 쓴 백수린이나 요즘 핫한 정세량처럼 잘 나가는 소설가가 되고 싶은 욕심은 당연히 있지만 그 정도의 재주와 능력과 몰입의 용기는 얻지를 못했으니 욕심내지 않는다. 나를 대표하는 작품 하나는 건지고 싶다는 욕심이 든다. 다음 검색창에 내 이름 석자와 내 작품 하나 맨 끝트머리라도 검색되는 정도...

그것조차도 욕심이 일수 있겠지만 딱 그만큼이다.



나를 소설의 세계로 이끈 사람은 박완서 선생님이었다. 천역 덕스럽게 여성의 삶을 꾸덕꾸덕한 고구마 빼때기(말랭이)처럼 풀어놓는 선생님의 글들을 보면 감동과 더불어 저런 글을 쓰면 좋겠다는 열정이 생겼다. 박완서 선생님의 좋은 글귀를 필사했다. 여전히 박완서 선생님은 나에게 여전히 울림을 주는 모델이다.

특별히 어려운 문장도 없으면서 크나큰 기교도 없는데 인물이 만들어지고 이야기들이 탄생하는 집밥 닮은 소설, 그런 소설을 쓰고 싶은 것이 내 로망이다.



로망은 바람이지 현실이 아니다.

맥심상도 못 받은 주제에.


고백하건대  동서문학상 응모 작품 2개는 테스트용이었다. <금붙이>라는 소설은 갑자기 썼고 <향을 만들다>는 원래 썼던 방향에서 재수정을 과감하게 했다. 글은 다시 읽어보면 주제가 흐려진 게 보이고 인물의 어설픔이 눈에 띄기도 하는데, 응모 후 재차 읽어보질 못했다. 동서문학상의 테스트를 기다렸고 결과는 아니라고 판단이 된 것이다.

가장 에너지를 들였던 소설은 지금 묶여 두었다. 어중간하게 동서문학상에 응모해서 참가상이라도 받게 되면 연말에 시작되는 신춘문예에 응모할 수 없기에 <다른 작품>은 keep 해 놓은 셈이다.

그런데 테스트 성적이 너무 엉망이라 이제는 그 소설도 졸작인 것 같아 마음이 심란하다. 신춘문예가 12월 초에 마감을 하니 묵혀둔 글을 지금은 꺼내서 퇴고를 해야 할 때인데 동서문학상의 결과가 너무 참담해서 용기가 나지 않는다.


신춘문예는 응모해야 할까?

신춘문예는 대부분 젊은 신인들을 발굴하는 등단 코스다. 나 같은 50대 아줌마에게는 불리한 지점도 있고 글의 신선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젊은이들이 쓴 글은 거칠지만 개성 있고 참신한 대목이 많다. 글도 나이를 먹는다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인데, 그게 조금 서럽기는 하다. 이렇게 답답할 때 전공학과를 나왔다면 또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마저 든다. 기껏 해봐야 유튜브로 소설 쓰기나 듣는 정도니.


기세가 꺾이니 며칠 동안 브런치도 쓰지 못했다.

글을 쓰는 일보다 몸 쓰는 일에 더 집중했다. 

내뱉고 나면 다시 도전할 새로운 용기가 날까?


글을 써서 쓴맛을 보고 몸 쓰는 일에 매달리는 이놈의 <쓰다>라는 동사는 나를 왜 이렇게 괴롭히는지. 쓰다는 동사는 헤롱헤롱으로 바꿔야겠다. 글을 헤롱헤롱 하다. 이렇게라도 복수하고 싶다. 글을 헤롱헤롱 해서 헤롱헤롱 한 맛을 보고 몸 헤롱헤롱 하는 일에 매달리다.


신춘문예로 등단한 작가는 10년 동안을 응모하고 낙선했다는데 기껏 지역 공모전에서 몇 번 수상 받은 피라미 같은 실력이 어디 명함이나 내밀수 있을는지, 자신감이 지하 13층까지 떨어진다.  


어디나 베이스로 깔아주는 사람이 있어야 상 받는 사람도 생기지. 깔아주자. 응모작 숫자에 더 하기 하나 해주자. 우편물 하나 보내면 되는데. 20년 가을에 지하 13층에 있는 나는 겨우 지하 12층으로 올라 선 듯하다. 됐다 12층만 올라오면 되니 다행이다.


주말부터는 글 헤롱헤롱 하기를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잘 헤롱헤롱 할지는 모르겠지만, 퇴고해서 신춘문예 깔아주러 가야겠다.



강화길 <화이트 호스의 일부분>


그리고 나는 운이 좋았다. 누군가는 좋은 소설을 쓰고도 혹평을 받았고 누군가는 아예 관심조차 받지 못했다. 잘 쓴다고 해서 모두 소설가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버티다 못해 사라지는 작가들도 수두룩했다. 대체 무엇이 작가를 작가로 만드는 것일까, 글은 대체 무엇일까,   없었다. 다만 내가 운이 좋다는  알았다. 나는 정말 운이 좋았다. 뭐랄까 그래, 그건 화이트호스였다. 백마  왕자님이었다.



백마 탄 왕자님은 아니라도 당나귀 탄 아저씨라도 좀 오면 안 되겠니? 그때까지는 존버 하기로, 당나귀탄 아저씨가 아무리 초라하더라도 무조건 버텨보기로 하자. 버티다 못해 사라지는 작가는 되지 않기로 오늘 새롭게 결심한다. 나는 양아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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