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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아치우먼 Nov 06. 2020

완벽하게 망친 하루는 없다

11월 어느 날의 단상



바람은 맞으라고 있는 거야

아침부터 바람맞았다. 약속이 다음 주 화요일이었는데 문자 보내준 사람이 목요일로 보내준 바람에  블링블링하게 펑크 났다. 바람맞아도 괜찮았다. 함안 국도를 둘러싼 산능성이의 단풍이 노을처럼 붉어지고 있었다. 네비 우먼의 상냥한 안내만 아니었다면 도로 끝까지 달려 구름에 폭 안기고 싶은 날씨여서 괜찮았다. 신효범의 사랑하게 될 줄 알았어, 음악 볼륨을 올리며 낮게 흥얼거렸다. 노오란 은행잎이 눈발인 듯 쌓여있는 가을의 끝트머리였다.


하늘의 흰 구름이 나에게 말했다.

흘러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흐르고 또 흐르다 보면 어느 날

자유가 무엇인지 알게 되리라

- 이해인 가을의 말 중에서



짜증 난다는 말은?

그 뒤로는 여러 갈래의 짜증 나고 지친 곁가지들이 있었다. 짜증 난 일은 생각하면 더 짜증 나므로 묻어둔다. 나쁜 감정은 무덤처럼 가두는 것이 때로는 더 현명할까? 근데 글을 쓰다 짜증 나다라는 어학사전 의미를 찾아보다 조금 놀랐다. 마음에 들지 않아 역정이 나다, 역정은 몹시 언짢거나 못마땅하여 내는 성. 짜증 난다라는 뜻을 다시 풀이하자면 마음에 들지 않아 몹시 못마땅하여 내는 성..... 짜증 난다라는 말을 자주 쓰지 않아야겠다. 역정을 낼 정도로 성이 난 건 아니었으니 다시 수정한다. 언짷은 정도의 일이 있었다.  진짜로 스펙타클하게 짜증 날 때 말고는

이  말을 쓰지 않아야겠다. 역정 낼 만한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오늘은 봉여사와 데이트하기로 한 날이다. 약속시간보다 30분이 늦었다. 너거는 차가 있은께 맘대로 다니지만 나는 차가 없잖아.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봉여사와 가까운 근교로 나들이를 한다. 양아치 며느리와 봉여사 둘이서만.


집에서 가까운 가포로 방향을 잡았다. 봉여사가 어디서 지중해 커피숍 이야기를 듣고는 이름을 잊어 먹고 무신해라 카든데 라고 한다. 봉여사 설명을 들어 보니 지중해다. 마산의 명소는 바로 여기다. 바다와 분재와 수석의 진귀함이 싹싹하게 어울리는 곳. 주말은 반드시 피해야 하는 곳이다. 평일인데도 나이드신 분들이 많이 왔다.

봉여사는 연신 와, 돈 많이 들있겠다 라고 한다. 뭐든 돈으로 환산하는 봉여사의 감탄사는 더 흥분해서 나에게 묻는다. 이게 한 1억은 들있겠제? 어무이 이 정도면 1억이 아니라 10억은 들있겠는데요... 그래도 말은 안 한다. 봉여사에게 1억은 10억과 같은 의미니까.



뭣이라? 커피 한잔이 6천 원 이라고?

미칬다, 미첬어...


절대로 커피숍을 안 가려고 꽁지를 내민다. 밥도 아니고 무신 커피 한 잔이 그리 비싸단 말이고? 창가에 앉아서 보는 풍경이 괜찮다고 꼬셔도 어림도 없다. 지중해는 아프리카와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있는 큰 바다라고 말해주니, 그래서 요 바다 사이에 지었는가 보다라고 응수하는 봉여사는 1억짜리 부자에게 돈 보태주기가 싫은지 어서 가자고 한다.


지중해를 나와 가포 덕동 쪽으로 차를 몰았다. 아다지오에 차를 세웠다. 아다지오가 음악 연주할 때 천천히 연주하라는 명령어라고 가르쳐 주니, 아다지오라고 봉여사는 따라 발음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국화와 바다 풍경을 보느라 정신이 없다. 바다로 산능성이 드리워지는 내가 가장 최애 하는 포인트가 아다지오다.



지중해와 불과 5-7분 거리인데 한 번도 여기서 파스타나 밥을 먹어 본 적이 없고 맨날 바깥에서 테이크아웃 커피만 마셨다.  오늘도 역시 커피 한 잔으로 때웠다. 여기는 을매고? 5천 원. 하이고나 개찐 도찐이네. 괜찮다. 1인 2500원씩에 요런 경치를 구갱하니까 경치 값도 내줘야지. 하긴 맞다.....우째 요리 좋은 데다가 자리를 잡았을꼬? 후르룩 호로록 커피 마시며 바다가 품은 경치를 바라보았다. 색소폰 소리가 애절하게 들렸다. 커피맛이 진짜 쥑이네... 호록호록


어무이, 요래 찍어봐.

내가 그거 못할까 봐.


찰칵 잘 찍었다.


노을 보고 갈까?

밥은 우야고? 안된다... 고마 가자.


바닷속으로 슬금슬금 빠지는 노을이 애나로 멋진 킬링 포인트가 여기다.


가던 길로 가지 않고 덕동 동네를 한바뀌 돌아서니 못 보던 카페가 눈에 뜨인다. 로라올던 언제 생겼지? 전혀 카페가 있을 자리가 아닌 동네 한가운데에 운치 있는 카페가 턱 하니 나타났다. 저기 카페 예쁜데 사진 좀 찍고 올게. 후다닥 내려 외관만 찍다가 내친김에 안에 들어가 본다. 주인에게 양해를 구하니 사진 촬영을 허락해 주신다.


어릴 적 우리가 살던 집과 닮았다. 기둥은 그대로 살린 채  방과 마루들을 연결해 카페로 인테리어를 새로 했다. 커피가 드립이다. 촌에서 자라 그런지 카페도 화려하고 멋진 곳보다 이런 촌 냄새나는 곳에 눈길이 오래 머문다. 더 찍고 싶었으나 안쪽으로 손님이 계셔서 대충만 찍고 주인에게 다음에 꼭 오겠다는 다짐을 남기고 나선다

고향에 대한 향수가 베여 나오는 로라 올던이었다.

어무이, 담에는 여기 함 와보자. 그라든지.



너거는 식구가 많다 아이가?

오는 길에 땡식이가 전화가 왔다. 신안 돌김 줄 테니 집으로 오란다. 새김이 벌씨로 나왔나? 봉여사 입꼬리가 은근히 올라간다. 미정이가 창원단감을 주었고 땡식이가 돌김을 선물해 주었다. 두 톳이나 주어서 많다고 했더니,


너거는 식구가 많다 아이가?


뭔가를 줄 때  늘 친구나 선배들이 붙이는 말이다. 식구가 많으니 넘쳐나는 것이 있으면 내가 기억 레벨 1순위다. 은근한 지지 때문에 지금까지 선물 받는 것이 많았다. 진옥 언니의 남해 시금치, 선옥 언니의 깻잎, 상치, 고추와 딸기들, 순재 선배가 준 단감과 고구마, 또 미영이의 통영 가리비, 맞다 또 견과류 100 봉지와 언니의 빼빼로와 과자, 커피가 있었다.


그것들의 변명거리는 항상 너희는 식구가 많다였다. 그런 배려와 고마움들이 쌓여 일곱 식구가 무사히 살고 있음을, 나는 안다. 나를 둘러싼 네트워크의 연결 고리는 정과 배려이다.



몽고간장에 국산 참기름과 꼬소한 깨를 듬뿍 넣어 만든 양념에 햇 돌김을 노릇노릇 굽고 김이 몽실몽실 피어나는 밥을 올려 돌돌 말아먹으니 바다의 단내가 그대로 입안을 감싼다. 오늘 보고온 덕동바다더 깊은 바다속으로 헤엄치는 기분이다. 바다야채가 바다생물보다 나는 좋다. 김이 달고 꼬시다(고소하다). 탑처럼 쌓았던 돌김 무더기가 금방 사라졌다. 땡식아 고맙다. 너로 인해 우리 식탁이 또 행복했다.


바람맞았던 것도 언짢았던 일들도
모두 날아갔다.

지중해의 바람과 아다지오의 느린 산 풍경과 로라 올던의 레트로가 감정을 씻기고, 폭신한 돌김에 돌돌 말린 밥 한 숟가락이,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한다.



가을 뜨락의 석류가

나에게 말했다


상처를 두려워하지 마라

잘 읽어서 터질 때까지

기다리고 기다리면



어느 날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리라.

- 이해인 수녀님의 가을의 말 중에서


가을에는 <가을의 말>에 귀 기울이며  잘 들어 볼 일이다. 잘 들으려면 시간을 천천히 연주해야 할 듯하다. 가을은  아다지오로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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