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최고의 보호자는?
하루는 40대로 보이는 한 여성이, 80세가 넘은 어머니를 데리고 밤늦게 진료실로 왔다. 어머니가 신장 투석을 받으시는데, 영 기운이 없으시다며 영양제를 맡기를 원하셨다. 어머니는 옆에서 부축을 해도 한 걸음을 떼기가 힘들었다. 병원까지도 힘들게 겨우 왔을 것이다.
머릿속에 빨간 경고등이 울렸다. 경험이 조금만 있는 의사라면 신장 투석환자는 걸어 다니는 시한폭탄이라는 것을 잘 안다. 신장 투석을 한다는 건, 노폐물을 걸러내고 몸속에 전해질 농도와 산, 염기 균형을 조절하는 콩팥의 기능이 완전히 망가졌다는 뜻이다. 투석 시작한 지 6개월 안에 20~30%가 사망한다.
기운이 없다?? 단순 위약감일 수도 있지만, 할머니의 상태를 보아하니 전해질 이상이나 심한 산증일 수도 있었다. 즉시 피검사를 해서 산성도와 심장과 관련된 전해질인 포타슘 수치를 확인해야 한다. 결과에 따라 즉시 약을 쓰거나, 때에 따라서는 응급투석이 필요할 수도 있다.
지금 피검사를 해 봐야, 내가 일하는 작은 의원에서는 검사 결과가 이틀 지나서 나온다. 나는 보호자인 딸에게
"영양제 놔주는 건 정말 쉬운 일입니다. 다만 할머니께서 투석 중이시기 때문에 몸에 힘이 이렇게 갑자기 없으시면 반드시 검사를 해 보셔야 합니다. 전해질이나 각종 이상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 피검사되는 곳은 응급실 뿐이니까, 번거롭지만 응급실로 가셔서 검사를 바로 받아보십시오."
여러 번 차근차근 설명하였으나 딸은 막무가내로 영양제만 놔달라고 했다. 전해질 이상이 있으면 갑자기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는 부정맥이 올 수 있고, 심장이 멎을 수도 있기 때문에 피검사를 하셔야 한다고 몇 번이나 설명을 했지만 보호자는 "여기도 정말 힘들게 왔다."면서 그냥 영양제만 놔주면 된다고 병원을 떠나지 않는다. 나와 보호자가 실랑이를 하는 동안, 할머니는 의자에 앉아서 가쁜 한숨을 몰아 쉰다.
혼자서 거동이 힘든 어머니를 데리고 밤에 힘들게 병원에 찾아온 것은 백번이라도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여기는 작은 의원으로 한계가 있다. 소화기로 산불을 진압할 수는 없는 법. 그럴 때 최선은 달랑 소화기 하나를 들고 불난 곳으로 달려가는 게 아니라, 즉시 큰 소방서에 신고를 하는 것이다.
의심되는 질환의 진단을 위해 반드시 검사가 필요하고, 검사를 하지 않았을 때의 위험성에 대해서 아무리 설명을 해도 절대로 검사를 안 하겠다고 할 때가 있다. 심전도를 찍었는데 심근경색이 나와서 큰 병원으로 가셔야 한다고 해도 안 가시고 여기서 어떻게든 안 아프게 해달라고 환자와 보호자가 조르기도 한다. 이럴 때, 의사는 참으로 난감하다.
잘 몰라서 그렇거나, 검사 비용 문제 거나 보호자가 없는 등 기타 다른 이유가 있겠지만, 안타깝다.
"가세요."
"안 가요. 못 가요."
"무조건 큰 병원 바로 가셔야 돼요."
"여기도 혼자서 힘들게 겨우 모시고 온 거예요. 어떻게든 안 아프게 해 주세요."
"여기서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그래도 뭐라도 해주세요."
몇 번의 실랑이 끝에 대게는 환자와 보호자는 의사의 말을 듣고 병원을 나간다. 의사로서 할 수 있는 만큼의 설명을 넘어 거의 빌면서 사정하다시피 해서 환자를 보내면 보호자나 환자가 씩씩거리며 "아파서 왔는데, 어, 아무것도 안 해주고 다른 병원으로 가라 그러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의사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 " 의사를 욕하는 것으로 끝이 날 때도 가끔 있다.
일 년에도 몇 번씩 겪는다. 마음이 편치 않지만, 그래도 견딜만하다. 가장 힘든 경우는 따로 있으니까.
전공의 1년 차로 소아과 파견 근무를 할 때였다. 소아 환자가 폐렴으로 입원을 했는데, 보호자인 엄마가 하필이면 병원 마취과 임상조교수였다.
내가 회진을 돌기 위해서 아이가 입원한 1인실에 들어가자마자, 마취과 임상 조교수인 보호자 엄마가 대뜸 물었다.
"선생님, 애기 왜 클래리(항생제의 일종)를 안 쓰고, 지스로(항생제의 일종)를 쓰고 있죠?"
'아, 이미 차트를 쭉 훑어봤구나.'
과는 달랐지만, 보호자도 병원 아이디가 있으니, 자기 아들의 기록, 각종 검사 결과 및 처방한 약까지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재수를 하고, 군대를 다녀오고, 중간에 1년 쉬기도 해서 보호자와는 나이가 거의 비슷했다. 다만 나는 1년 차였고, 상대는 마취과 임상 조교수였으니 짬밥으로 말하면 나는 이등병이고 상대는 대위, 즉 중대장 정도였다.
나는 보호자 앞에 쭈뼛쭈뼛하게 서서 설명이 아니라 아예 발표를 해야 했다.
"클래리보다 지스로 가 효과가 오래가서 3일만 복용하고 더 안 먹어도 되기 때문에 본원 소아과에서는 클래리보다는 지스로를 처방하고 있습니다."
그 후로도 몇 차례 질문이 더 있었다. 나는 최선을 다해 열심히 설명을 했지만, 보호자는 고개를 건성으로 까닥까닥 거리며 흔들뿐 잔뜩 의심 어린 눈빛이었다.
이 정도는 약과다.
아예 자기가 의사랍시고, 자기 어머니한테 이런저런 검사를 하고 이런저런 약을 처방하라고 아예 지시하는 경우도 있다. 남의 식당에 와서, 자기가 요리사라고 남의 주방에서 자기 마음대로 요리를 하고 주인에게 명령을 내린다고나 할까. "두 명의 현명한 장군보다 한 명의 어리석은 장군이 낫다."말이 있듯이 치료가 제대로 될 리가 없다. 속으로 '이럴 거면 니 병원에서 네가 치료하지 왜 데리고 왔냐?'라고 따지고 싶지만, 속으로 참고 또 참는다.
최악의 환자요?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911211447393427
뒷이야기:
호스피스 환자를 볼 때였다. 50대 자궁경부암 말기 환자였다. 몸 안의 모든 영양소란 영양소는 암 덩어리가 다 빨아먹기 때문에 암은 커지지만 사람을 말라간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사람 몸에 가죽만 남는다. 거기다 김신혜 씨는 암으로 인한 생긴 궤양으로 인해 출혈이 멈추지가 않았다. 산부인과 의사가 생식기 안을 전부 거즈로 채웠지만, 피는 거즈를 모두 적신 것으로 모자라 스멀스멀 몸 밖으로 흘러나왔다.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말기암에 장기간의 출혈로 환자는 눈을 뜨다 감다를 반복하고 있었고, 각종 검사 수치에서 정상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의사로서, 특히 호스피스 환자를 볼 때 가장 어려운 점 중 하나는 보호자에게 환자 상태를 설명하는 것이다. 각종 의학용어를 쉽게 설명하는 것도 정말 만만치 않은 일인 데다가, 얼마나 심각한 지를 단 번에 사람들에게 이해시키는 건 매우 어렵다.
자동차를 운전하다가 액셀을 밟아도 차가 안 나가서, 수리점에 갔다고 가정해보다.
"인젝터가 고장 났네요."
로 설명이 끝이다. 사람들은 인젝터가 자동차 엔진에 연료를 주입하는 장치이며, 어떤 구조이며,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심장이 안 좋습니다."
라고 말하는 순간 사람은 왜 심장이 안 좋아졌는지, 어디가 얼마나 안 좋은지, 어떻게 해야 좋아지는지, 어떤 음식을 먹어야 좋아지는지 가능한 한 많이 알기를 원한다. (이런 점에서 한의사가 참 부럽다. 한의사한테는 잘 안 물어보던데.) 심장의 구조, 역할, 기능, 저하 시 증상, 검사, 각종 수치, 진단, 치료를 어떻게 일반인들에게 잘 쉽게 설명할 수 있을까?
라면을 겨우 끓일 줄 아는 딸에게 김장 담그는 법을 가르쳐야 하는 어머니 심정이다.
언니가 누군가와 전화통화를 하면서 담당의사인 나에게 물었다.
"저희 동생이 좀 어떤가요? 얼마나 심각한가요?"
"하아."
나는 일단 한숨부터 쉬었다. 이걸 어떻게 쉽고 빠르게 그리고 확실히 설명할 수 있을까. 머리가 아팠다.
"저희 사촌이 의사인데, 전화를 좀 바꿔달래요."
"아, 네. 전화 바꿨습니다. 담당의사 정성훈입니다."
"저희 작은 누나 얼마나 심각한가요?"
40대에 점잖은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예, 헤모글로빈(빈혈을 나타내는 수치로 12까지가 정상이다.)이 5.4이고, BUN/Creatine(콩팥 기능을 나타내는 수치로, 크레아틴의 경우 1.5 이하가 정상이다)은 90/8입니다."
"아,,,,,,,, 정말 심각하네요....... 저희 큰 누나 좀 바꿔주세요."
그것이 전부였다. 큰 누나는 의사인 사촌과 한참 통화를 하더니 전화를 끊고는 더 이상 환자 상태에 대해 질문을 하지 않았다. 내게 고개를 숙이며 말없이 인사를 하고 말없이 병실로 조용히 들어갔다. 아마 의사인 사촌 조카가 담당의사인 나를 대신해서 작은 누나의 얼마나 안 좋은 상태인지 잘 설명해 준 것 같았다.
의사는 가장 최악의 보호자이지만, 때로는 가장 최고의 보호자가 되기도 한다.
나와 아내는 우리 딸이 가끔 아파서 병원에 가면 항상 조심스럽다. 의사라고 할까, 말까, 항상 고민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