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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나리의사 Dec 17. 2019

콤플렉스 극복기

저는 대머리입니다

 저는 태어났을 때부터 유난히 머리가 컸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형을 낳을 때보다 둘째인 저를 출산할 때, 더 힘들어하셨습니다. 머리가 클 뿐만 아니라, 이마도 넓었습니다. 남들이마에 손가락이 세네 개 들어갈 때 저는 엄지손가락까지 손바닥 전부가 들어갔습니다.  

 19년 전, 수능을 망쳤습니다. 평소 예상 전국 석차에 20을 곱한 성적이 나왔습니다. 저를 지탱해줬던 세계가 무너졌습니다. 전액 장학금을 주는 OO 의대를 가는 꿈은커녕, 전국에서 성적이 가장 낮은 의대 합격도 간당간당당 했습니다. 수능 친 그 날 저녁 바로 재수를 결심했습니다.  

 집안 형편이 그리 좋지 않았던 저는 세상 경험도 쌓고 돈도 벌 겸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수능을 친 다음날 저녁에 면접을 보고 당장 일을 했습니다. 술집 서빙하는 아르바이트였습니다. 아침에 학교를 갔다가 오후 4시부터 밤 12시까지 8시간씩 일을 했습니다. 2000년 11월 당시 시간당 2000원을 받았습니다. 지금은 8350원이네요. 그래도 저는 운이 좋았습니다. 제 친구 정섭이는 주유소에서 시간당 1700~1800원을 받았습니다. 한 달에 8시간씩, 30일을 일해서 한 달 48만 원을 벌었습니다.

 몸도 마음도 힘든 나날이었습니다. 거기다 수능을 치고 난 다음부터 머리가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엎친데 덮친 격입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수능을 친 후, 고등학교 졸업식까지 3개월 만에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앞머리가 M자형이 되었습니다.  

 '대학교 가면 괜찮아지겠지.'라고 생각했지만, 재수가 끝나고 의대에 합격했는데도 좋아지기는 커녕 점점 더 심해졌습니다. 2002년 한국 월드컵 4강 진출을 할 때, 제 별명이 '지단'이 되어버렸습니다. 루니와 지단을 반반 씩 섞어 놓으면 딱 20대 초반의 제 머리가 됩니다.

  '의대'라는 꿈은 이루었는데, 이제는 '머리'가 저를 괴롭힙니다.   

  의대를 다니던 6년 간, 이런저런 방법을 다 써 보았습니다. 머리를 짧게 잘라도 보고, 젤로 머리를 세워도 보고, 양 옆의 머리를 좀 길러 M자 모서리를 덮어도 봅니다. 그래도 숨길 수가 없습니다. 스트레스입니다. 매일 보는 학교 사람들이야 그렇다 치고, 오랜만에 만나는 고등학교 친구들이

 "성훈아, 니 와일노?"

 깜짝 놀라며 물어봅니다. 실제 나이는 20대 초중반인데 액면은 벌써 30대를 훌쩍 넘긴 것 같습니다.

 의대 실습을 나가면, 원래는 학생들에게 바로 말을 놓던 교수님들마저 저를 처음 보면

 "혹시, 정성훈 학생은 나이가 어떻게 되시나요?"

 아주 조심스럽게 묻습니다. 하도 같은 말을 많이 듣다 보니,

 "아, 네, 교수님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25살입니다."

 제 대답을 들은 교수님 얼굴에는 안도감과 함께 저에 대한 안타까움이 잠시 스쳐 지나갑니다.

 "그래요, 그래, 그럼 편하게 말할게."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이 머리 때문에 엄청난 스트레스입니다. 결국 이런저런 방법을 시도하다 못해 그냥 나갈 때 모자를 씁니다. 옷은 그대로인데 모자만 늘어갑니다. 처음부터 모자를 쓰고 과외를 시작한 학생은 몇 달 후 과외가 끝날 때까지 아예 모자만 쭉 써야 했습니다. 내가 모자를 벗으면, 학생이 당황한 얼굴과 얼마 뒤에 내 머리와 이마를 보고 놀란 것에 대해 미안해합니다. 끙.

 아버지, 형, 다른 사촌들과 친척들은 대머리가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 다 괜찮습니다. 한창 젊은 나이에 '나만 왜 이럴까' 화도 나고, 억울하기까지 합니다. 거울을 보면서, '이건 내가 아냐' 부정도 해보고, 학교 수업 시간 외에는 거의 모자를 쓰고 머리가 벗어지는 걸 감추고 다녔습니다. 하지만 의대에서 수업 시간에 모자를 쓰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니다. 거기다 하얀 가운을 입고 실습을 나가야 하니 숨길 수가 없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과 그리고 반복되는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머리가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어요?"로 이어지는 질문들. 사람들은 저를 딱 두 가지로 기억합니다. '의대생' '대머리'

 나이가 들면 들수록 이마는 더 넓어지고, 자신감은 벗겨지는 머리에 반비례하여 줄어듭니다. 거기다 이마 정가운데 머리카락들이 심하게 가늘어졌습니다. 머리를 깎지 않아도 조금 자라다 저절로 떨어져 버립니다.


 시간이 흘러 본과 4학년 여름방학을 맞이 했습니다. 26살이 되는 동안 방학 때마다 과외를 한다고 그 당시 유행이었던 유럽 배당 여행은커녕, 해외여행 한 번 가 보지 못했습니다. 대학교 마지막으로 평생 마음속에 품고 살만한 추억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전국 자전거 여행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혼자 하기는 힘들고 걱정도 되어서 친구들에게 같이 가자고 권유했으나, 모두 거절하였습니다. 그냥 혼자 가기로 합니다. 최소 보름 이상 걸릴 테니, 과외도 그만둡니다. 돈 걱정은 나중에 하기로 했습니다. 다만 잠은 텐트에서 자고, 식사는 편의점에서 때우기로 합니다. 소심하고 가난한 제가 여행을 그것도 과외까지 포기하면서 그것도 혼자서 전국 자전거 여행을 하려고 하다니. 그 여행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제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명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된 거, 저는 끝까지 가보기로 합니다. 저는 그동안 어떻게든 부인하고, 모자 아래 숨겨왔던 제가 대머리라는 사실을 먼저 받아들이기로 합니다. 고통스럽고 잔인한 현실을 피하지 않고 직시해야만, 그다음이 있습니다.


 

 "저는 대머리입니다."   

 저는 제 자신을 받아들이기로 합니다. 그리고 여행 첫날, 가장 먼저 10년 넘게 다녔던 단골 이발소로 갑니다. 저를 배신하기 시작한 머리카락이 저를 완전히 배신하기 전에 먼저 버리기로 결심했습니다.

 "아저씨, 박박 밀어주세요."

 "아이고, 성훈이 학생, 다시 한번 생각해보지? 젊은 나이에"

 얼마 없는 제 머리카락을 저보다 더 소중히 여겨주셨던 이발소 아저씨께서 저를 대신해 걱정해 줍니다.  

 "결심했습니다. 다 밀어주세요."

  여행이 끝나고 윙 소리가 나는 일명 바리깡, 이발기를 샀습니다. 바리깡으로 머리를 밀기 시작한 지 얼마 안가, 아예 면도를 하기로 합니다. 대머리를 넘어서, 완전히 밀어 스킨헤드가 되었습니다.

<우측 위: 26세 사진, 우측 아래:  저의 별명이었던 지단,  좌측 현재 사진, "와 진짜 피부 하나는 끝내주는데">

 

모든 사람들은 자기만의 약점이나 상처가 있습니다. 그것은 심각한 문제일 수도 있고, 남들에게는 아주 사소한 문제로 비칠 수도 있습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그의 딸 안나 프로이트는 스트레스나 불안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방어기제'를 제시했습니다. 억지로 눌러서 무의식으로 숨기려고 하는 '억압', 잊으려고 노력하는 '억제', 아예 인정하지 않는 '부정'부터 '저항',  결함을 다른 것으로 메우려는 비 의식적인 노력인 '보상', 더 높은 차원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승화', 현실을 인정하고 웃어넘기는 '유머'까지 다양한 방법이 있습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대머리가 아니야.' 부정도 해 보고, 머리에 대해서 신경을 끊으려고도 해 보았고, 모자를 써서 숨기기도 했습니다. 10년 가까운 긴 고통의 시간 속에 받아들이기로 합니다. 그리고 '빛나는' 의사 작가가 되려고 노력 중입니다(보상과 승화).

 "여보, 여보, 여자가 뽑은 최악의 남자 외모 1위가 대머리래. 자기 어떡해? 최악의 남자와 결혼했어."

 "그러게, 내가 정말 최악의 남자랑 결혼했네. 나 아니었으면 자기 어떡할 뻔 그랬어?"

 저를 세상에서 가장 잘 이해해 주는 아내와 머리가 없다는 사실을 웃어넘깁니다.(유머)

<25살, 실습 때 사진, A+을 줄 수밖에 없는 벗어진 이마>

 스킨헤드가 되니, 몇 가지 장점이 있습니다. 먼저 의대 실습을 나갔을 때, 의대생임에도 불구하고 환자들이 저를 교수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제가 신체검사를 하려고 하면 환자분들이 아주 적극적으로 도와주셨습니다. 거기다 교수님들 또한 제가 안타깝고 또 부담스러워서 그랬는지 성적을 잘 받았습니다. 본과 4년간 유일하게 임상 실습에서 A+을 받았습니다. 4학년 1학기 전체 23학점 중에 16학점인 임상실습에서 A+을 받았으니, 당연히 장학금이 따라왔습니다.

 거기다 귀찮게 이발소나 미용실을 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머리를 감고 말리는 데 시간이 전혀 걸리지 않습니다. 특히 추운 겨울철과 바쁜 아침 출근 시간에 남들보다 훨씬 유리합니다. 세수할 때, 그냥 손만 이마 위로 몇 던 더 올려주면 끝입니다.

 10년 넘게 얼굴을 면도하면서 머리를 같이 밀면서 깨달은 점도 있습니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라는 속담은 거짓말이라는 것을. 자기 머리, 자기가 잘만 깎습니다.

 더욱이 어딜 가나 주목을 받기에 나쁜 짓을 하기는 글렀습니다. 또한 결혼식에서 사진을 찍으면 아무리 많은 사람들과 함께 찍어도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혹시나 제가 만에 하나라도 유명해진다면,

    이 "빛나는 외모" 때문일 겁니다. 그때는 제 약점이 바로 장점이 되는 겁니다.

뒷이야기 I

<7살 조카가 그린 나 사진>

7살 된 딸이 집에서 자꾸 저에게 모자를 씌우며, "아빠, 이제 대머리 아냐." 그럽니다. 혹시나 학교 갈 일 있으면, 딸 친구들이 저를 보고 "너희 아빠, 대머리지?"하고 약을 올릴까 걱정입니다. 그래도 아들이 아니라, 다행입니다.












뒷이야기 II


 제가 이 글을 올리기 전에 가장 먼저 아내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자기랑 살다 보니, 당신이 머리가 없다는 걸 잘 모르겠어. 그리고 당신이 그 컴플렉스를 극복한 건, 내가 당신이랑 결혼해줘서 그런 거야."

 (순진한 아내는 잘 모르고 있습니다. 사실 외모에 결함이 있는 저는 오래전부터 저에게 극도로 불리할 수 밖에 없는 소개팅과 미팅을 과감히 접고, 계속 마주치는 사람에게 저의 진실한 마음을 보여주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그 결과 숨어 있는 보석 같은 아내(가 걸려들었습니다)를 만난 겁니다. 아내의 말대로 외모는 계속보다보면 희석되기 마련이고, 대학교 3년 후배이자 같은 면담조(멘토링)인 아내는 제가 싫으나 좋으나 계속 볼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저는 처음부터 이 모든 걸 감안하고 계획을 세워둔 것이었습니다.)

<네, 저는 처음부터 계획이 있었습니다, 선배님>




 참고로 이 글에는 치명적인 오류가 있습니다. 대머리는 치료받으면 됩니다. 이미 저를 포함한 의대 동기 5명 중 저는 대머리고, 2명은 머리가 벗어지기 시작해서 약을 먹고 있습니다. 치료 받는 두 친구는 눈에 띄게 좋아졌습니다. 제가 수능을 마치고 머리가 빠지자마자 치료를 받았더라면 아마 이런 글을 쓸 필요도 없었을 겁니다.

 지금은 이미 앞머리에 모공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의학으로도 어쩔 수 없습니다. 어느 시인의 문구처럼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많이 좋았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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