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라는 여행을 마칠 때
초등학교 2학년 그러니까 9살 때입니다. 할머니는 혼자서 농사를 지으셨는데, 밭에서 키운 깻잎을 시장에서 파시다가 쓰러지셨습니다. 김해에 사시던 할머니는 조금이라도 값을 더 받기 위해 123번 버스를 한 시간 넘게 타고 저 멀리 부산 자갈치 시장까지 가셨습니다. 인근 대학병원으로 옮기셨으나, 보호자도 없는 상황에 의식도 가물가물 했습니다. 신원 파악을 위해 경찰까지 응급실로 왔고, 할머니가 비몽사몽간에 "김해 동상동 정섭이"라고 뱉은 한마디에 경찰은 동사무소까지 총 동원해 작은 아버지를 찾아내셨습니다.
지금으로 생각하면 지주막하 출혈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18일간 중환자실에 누워계셨습니다. 그러다 2~3일 안에 돌아가신다는 의사 말에 가족들은 할머니를 병원에서 집으로 모셔왔습니다. 할머니 집에서 간병을 하시던 어머니가 할머니가 살아계신 마지막 모습을 보라고 나와 형을 부르셨습니다.
외상은 없었습니다. 할머니는 다소곳이 말끔히 가르마를 탄 채 누워 계셨습니다.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일어나지 못했고, 눈을 뜨지 못하셨습니다. 어머니께서 누워계신 할머니에게 천천히 한 숟가락씩 입에 검은 한약을 넣어주셨습니다. 어린 저는 할머니가 깊은 잠을 자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죽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게 제가 기억하는 할머니의 생전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이틀 후에 할머니께서 돌아가셨습니다. 가족들은 할머니 집 마당에 천막을 치고 장례식을 치렀습니다. 제가 본, 집에서 치른 마지막 장례식이었죠. 장례가 끝나고 어머니는 그래도 할머니께서는 볼 사람 다 보고 죽기 전에 몸에 좋은 거는 다 드시고 가셨다고 혼잣말처럼 말씀하시던게 기억이 납니다.
열두 살, 그러니까 제가 국민학교 6학년 때였습니다. 드라마 <마지막 승부>와 만화 <슬램덩크> 열풍으로 저와 친구들은 방과 후에도 농구만 했습니다. 같이 농구를 하던 친구 중에 재환이가 있었는데, 집에 농구골대가 있어 자주 학교 마치고 집에 가서 친구들과 함께 농구를 하는게 일상이었습니다. 농구골대라고는 하지만, 재환이 아버지가 만들어 주신 어설픈 링이었죠. 하지만 아무리 뛰어도 손이 닿지 않을 정도로 높았습니다.
재환이는 장남이었는데, 밑으로 남동생만 2명이 더 있었는데 하루는 재환이가 학교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이 아침 조회에 들어오셔서 슬픈 목소리로 재환이 동생이 교통사고로 죽어서 며칠간 학교를 나오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항상 같이 농구를 하던 나, 경남이와 재덕이는 학교를 마치고 재환이네 집에 가기로 했습니다. 장례식 같은 건 잘 몰라서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학교를 마치고 걸어갔습니다. 재환이네 집은 학교에서 10분 정도 걸렸습니다.
재환이네 집 앞에는 2차선 도로가 있었습니다. 저와 친구들은 재환이네 집 건너편 인도로 재환이네 조심스럽게 접근했습니다. 저 멀리 재환이 집 앞에 하얀 소복을 입은 재환이 어머니가 양 옆에 다른 어른들의 부축을 받으며 서 계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거리가 제법 있어서, 정확히 재환이 어머니라고 확신한 건 아니었습니다.) 집에 점점 다가가는데, 재환이 어머니가 우리를 멀리서 보고
"주환이가?"(주환이는 교통사고로 죽은 재환이 동생이름)
라고 부르셨습니다.
"아니요, 어머니, 저희는 재환이 친군데요."
그 말에 재환이 어머니는 무릎을 휘청하며 쓰러지려 하셨습니다. 양 옆에 계시던 어른들이 얼른 재환이 어머니를 부축했습니다. 우리는 재환이 어머니가 주환이가 죽은 것을 받아들이시지 못하고, 우리를 주환이라고 착각했다가 우리가 주환이가 아니자 충격으로 쓰러진 게 아닐까 추측했습니다.
동생 장례를 마치고 온 재환이는 원래 말이 적었는데, 그 후로 말이 더 줄고 표정에 그늘이 졌습니다.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저는 그때 하얀 소복을 입은 재환이 어머니가 충격으로 휘청 거리셨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가끔 그때가 떠 오릅니다. 그 이후로 그 어떠한 경우도 급사는 피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물론 피하고 싶다고 피할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10년 전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근무할 때였습니다. 응급실 B 구역 1번 베드에 환자가 실려왔습니다. 요양원에서 몇 년간 있다 열이 나고 컨디션이 쳐진다고 온 80대 할머니가 오셨습니다. 의사라는 직업 중 가장 슬픈 것 중에 하나가 '보고 싶지 않은 모습'을 봐야 한다는 겁니다. 환자분은 원래부터 말씀도 거의 못하셨다고 했습니다. 80대 할머니는 성인 치고는 몸이 너무 작았습니다. 몇 년째 제 발로 일어서지도 앉지도 못한 듯 몸에 근육이란 근육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근육이 없으면 남는 건 뼈와 가죽뿐이었습니다. 살아있는 송장, 숨 쉬는 송장이었습니다. 담당 내과 선생님은 들릴 듯 말 듯 한숨을 내쉬며
"나는 저렇게 살지는 말아야 할 텐데.......... 저게 도대체 살아있는 건지, 저렇게 살아서 뭐하겠니"
말했습니다. 저 또한 말없이 고개를 끄떡였습니다. 같이 온 아들로 보이는 50대 아저씨의 표정에는 당혹감이나 슬픔이 없었습니다. 다만 조금 번거로운 일을 하는 표정이었습니다. 이런 일이 일상인 듯했습니다.
몇 년 전 인구 천 명 남짓한 시골 보건 지소에 있을 때였습니다. 시골은 탄생보다 죽음이 더 일상적인 곳이었습니다. 며칠 전에 돌아가신 남편의 상을 치른 정순자 할머니가 보건소에 오셨습니다. 멀쩡하던 남편이 폐렴으로 병원에 입원한 지 3일 만에 돌아가셨다네요. 얼굴에 주름이 깊었습니다. 말 끝에 슬픔이 뚝뚝 떨어져 나왔습니다. 홀로 보건지소를 나가시는 정순자 할머니 뒷모습이 한없이 작아 보입니다.
다음날 마을 할머니 두 분이 오셨습니다. 시골에는 모든 곳에 귀가 있고, 눈이 있습니다. 마을 모든 사람들이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걸 알고 계셨습니다. 마을 할머니들께서는 할아버지의 죽음이 호상(好喪)이라고 하시며
'그렇게 며칠 아프지 않고 확 죽어버려야 남은 가족 고생 안 시키는데.'
'나도 그렇게 죽어야 되는데' 라며 고인의 죽음을 부러워하셨습니다.
한 번은 박말녀 할머니가 남편 장례를 치르고 보건지소에 오셨습니다. 남편분께서는 몇 년간 누워계시다 돌아가셨습니다. 할머니의 표정은 밀린 방학 숙제를 마친 아이의 표정이었습니다. 정순자 할머니와는 다르게 홀가분해하셨습니다. 마을 할머니들은 아예
"아유, 진작에 돌아가셨어야 했는데. 얼마나 그동안 박말녀 할머니가 고생했는데."
덩달아 후련해하셨습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죽음을 보았습니다. 응급실에서도 근무를 하다 보니, 객사한 경우도 많았고, 내 앞에서 마지막 숨을 쉰 사람도 있었습니다. 호스피스 병동을 돌 때는 긴 시간 동안 촛불처럼 서서히 생명이 타들어간 분들도 보았습니다.
많은 분들이 삶과 이별하는 것을 보면서 제가 맞이하고 싶은 죽음은 이렇습니다.
저에게는 아이가 있고, 아내가 있고, 부모님이 계십니다. 저의 삶은 온전히 제 것이 아닙니다. 따로 사시긴 하지만, 부모님이 아프거나 뭔가 일이 있으시면 부모님 대신 결정을 내리고 일을 해결해야 합니다. 8살짜리 우리 딸 주희가 앞으로 스스로 돈을 벌어 자신의 삶을 꾸릴 때까지 전적으로 저의 책임입니다. 또한 나를 믿고 결혼한 아내에게 의지하고, 또 아내를 지켜줘야 합니다.
만약 제가 갑작스럽게 죽는다면, 저는 남편이자, 아빠, 아들로서 의무를 다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평생 가지고 갈 충격과 상처를 남깁니다. 죽는 순간은 물론 죽어서도 죄책감을 가질 것입니다.
아들로서, 남편으로서, 아빠로서 제 의무가 끝났을 때, 삶이 끝났으면 좋겠습니다.
외상은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 모습을 흉하게 남기고 싶지는 않습니다. 60세 이상에서 사망원인 1위는 암이고, 2위는 심장질환, 3위는 뇌혈관 질환입니다. 암이나 심장질환은 괜찮은데, 뇌혈관 질환은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특히나 중풍이 와서 사지마비로 힘들어하는 모습을 가족들에게 보이고 싶지는 않습니다. 치매도 비슷한 이유로 아니길 바랍니다.
참을 수 있을 만큼 아팠으면 좋겠습니다. 아프지 않으면 저에게 닥친 죽음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으니까요. 적당히 통증이 있어야 죽음을 인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통증이 너무 심하면 얼마 남지 않는 시간을 참고 버티는데 보내야 하고, 그런 제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힘들 테니까, 의사가 넉넉하게 진통제를 투여해줬으면 좋겠습니다. 마약성 진통제라도 상관없습니다. 중독을 걱정해야 할 만큼 제 삶의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을 테니까 말입니다.
보름 전후로 아프다가 삶을 마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가족들, 친지들이, 지인들이 저를 보러 올 수 있을 테니까. 더 이상 길어지면 사람들이 지칩니다. 마지막 순간이 어느 정도 알 수 있어서, 가족들이 옆에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좋고, 가족들도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짊어질 필요는 없으니까요.
중환자실에서는 죽고 싶지 않습니다. 저를 잘 모르는 의사와 간호사만이 제 마지막을 지켜보는 건 슬픕니다. 그들은 제 생명을 살리기 위해 노력하겠지만, 제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제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이 순간 제가 하고 싶은 게 하고 싶은 말이 뭔지 모릅니다. 제 삶을 온전히 알고 이해해줄 아내와 딸, 소중한 지인과 가족들 품에서 눈을 감고 싶습니다.
제가 듣고 싶은 말은 제 삶과 인생을 긍정하고 인정해주는 말입니다.
"아빠, 그동안 수고하셨어요. "
"여보, 당신과 함께여서 행복했어."
라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뭔가를 볼 수 있다면 제가 매년 만들고 있는 가족 앨범을 보고 싶습니다. 제가 쓰고, 만든 책 중에서 우리 가족을 위해 만든 가족 앨범이 가장 인기 있는 책입니다. 우리 딸이 벌써 10번도 넘게 봤습니다.
26살 여름에 혼자서 15박 16일로 전국 자전거 여행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낙동강을 건너서 고향 김해에 들어섰을 때, 저 멀리 집 뒷산이 보였습니다. 그때 자전거 여행처럼, '인생'이라는 여행을 끝내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느낌이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조금은 허전하겠지만 한편으로는 속 시원하고 아쉽지만 가슴 벅찬.
그리고 아내와 딸이 보여주는 가족 앨범을 보면서, 이번 인생 힘들었지만 즐거웠다며 함께 했던 시간을 추억하고 싶습니다.
우리 딸, 건강하고 지혜롭게 자라기를. 아빠도 노력할게.... 세상에서 아빠가 제일 사랑하는 사람은? 알지? 당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