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말을 못 하니까, 몸으로 나타나는 거예요.
신도시에 있는 병원인 데다가, 주위에 중고등학교가 있어서 학생들이 많이 옵니다. 대학생 때나 대학병원에서 수련을 받을 때는 암, 심근경색, 뇌졸중 같은 중증이나 응급 질환을 많이 봐왔습니다. 전문의를 따고 나와서 지금처럼 입원실 없는 외래 진료를 보면 일 년에 암이나 심근경색 등 을 진단하는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이제는 암과 같은 중증 질환 대신 의대를 다닐 때는 시험에도 나오지 않는 감기, 단순 복통, 설사, 생리통은 물론, 교과서에도 없는 모기 물린 후 생긴 염증, 꾀병 등으로 학생들이 의사인 저를 찾습니다.
여학생들은 100이면 90은 몸에 달라붙는 교복을 입습니다. 치마는 당연하고, 하얀 와이셔츠도 그렇습니다. 청진은 언제부턴가 그냥 등 쪽으로 해서 와이셔츠 위로 듣습니다. 화장은 100명 중에 80명은 합니다. 하얗게 도화지를 얼굴에 깐 다음, 눈꺼풀을 오렌지색과 분홍색 중 하나로 칠합니다. 예전에는 100이면 100, 눈 옆을 검게 숯 칠을 하고 다녔는데 지금은 그래도 70명 정도만 일명 스모키 화장?(맞나요?)을 합니다.
머리를 말고 그 플라스틱 통, 고데기?를 그대로 이마에 달고 오기도 합니다. 빼는 걸 깜빡 잊은 건지 아니면 그것도 패션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가끔씩 윗 눈꺼풀에 얇은 테이프를 붙이고 오는 학생들도 있습니다. '그런다고 없는 쌍꺼풀이 생기지는 않습니다.'라고 말해주고 싶은 걸 간신히 참습니다.
귀걸이를 안 하는 여학생은 거의 없습니다. 한쪽 귀에 6개까지 보았습니다. 팔찌를 귀에 걸고 다니는 여학생도 있었습니다. 전 그 학생을 보고 어렸을 때 오락실에서 하던 스트리트 파이터의 달심이 갑자기 떠올라 웃음을 참느라 고생을 합니다.
15세 김다연 학생입니다. 특별한 과거력은 없고, 저희 병원에는 몇 달에 한 번씩 온 적이 있습니다. 단순 복통, 두통, 감기로 내원했네요. 차트에서는 특별한 내용이 없습니다.
대학병원에 있을 때는 환자 때깔을 봤다면, 의원에서는 관상을 봅니다. 그게 그거긴 하지만 좀 더 자세히 말하면 대학병원에서는 사람 얼굴을 보자마자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환자의 중증도를 때깔이라고 하고, 의원에서는 딱 보면 느끼지는 인상입니다. 대학병원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때깔보다 관상을 보는 게 훨씬 더 어렵습니다. 때깔은 중증도만 보면 되지만, 관상은 이 환자가 정말로 아픈 건지 아니면 꾀병인지부터해서 급성인지, 만성인지, 주사를 맞아야만 제대로 된 치료를 받는다고 여기는지, 아니면 주사를 극도로 싫어하는 성향인지를 파악해야 합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항생제를 기피하는지, 반대로 '마이신'을 꼭 먹어야 낫는다고 여기는지, 실비가 있어 영양제를 원하는지, 적극적으로 검사를 원하는 환자인지 이 모든 걸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다연이 학생이 진료실로 들어옵니다. 160cm, 52~53kg로 평범한 체격에 어깨까지 내려오는 생머리를 하고 있습니다. 가까이서 보니 얼굴에 그 나이 특유의 여드름과 여드름을 감추기 위해 화장을 조금 했습니다. 눈 화장은 하지 않았네요. 눈도 코도 입도 무난합니다. 길거리에서 여러 번 마주쳐도 기억하지 못할 인상입니다. 그래도 굳이 꼽으라면 평범한 게 가장 큰 특징입니다. 표정을 가장 어두우면 0, 가장 밝으면 10이라고 했을 때, 5 아니 좀 더 자세히 살펴보니 얼굴에 보일 듯 말 듯한 그늘이 있습니다. 4.5정도 됩니다.
"몇 개월전에 배가 아파서 왔었고, 다연이 학생 오늘 어디가 아파서 왔나요?"
"네, 머리가 아파서요."
두통. 두둥.
살아오면서 머리가 한 번도 안 아팠던 사람은 없습니다. 가장 흔한 증상이지만 두통의 진단명만 해도 세계적으로 가장 권위 있는 ICHD(국제두통질환 분류, International Classification of Headache Disorders)를 보면 A4 용지 13장에 이릅니다. 단순히 증상만으로 진단되기도 하고, MRI 등의 정밀검사를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두통 환자를 보는 1차 진료의는 두통을 가장 먼저 MRI나 CT 등의 정밀 검사가 필요한 경우와 진통제를 주면서 경과 관찰하는 경우로 나눕니다. 그 기준이 바로 Red flags!! (일명 위험 경고)입니다.
"머리가 언제부터 아팠어요."
"몇 달 됐어요."
'음, 꽤 됐네.'
"머리 어디가 어떻게 아파요?"
"양쪽 관자놀이가 누르듯이 아파요."
'오케이.'
가장 강력한 단서가 나왔습니다. 범인을 거의 다 밝혀낸 것 같습니다. 이제 몇 가지만 확인해 보면 됩니다.
"눈이 안 보이거나, 팔다리 한쪽에 힘이 빠지는 것 있나요?"
"아니요, 그런 건 없어요."
"다친 적 없죠?"
"네."
끝으로 양쪽 관자놀이를 만져봅니다. 혈관염으로 인한 두통일 경우, 딱딱한 혈관이 만져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뭐 만져지는 거 없죠?"
"네."
"하루 중에 언제 제일 아파요?'
"아침에요."
범인은 밝혀냈지만, 범인을 잡아서 아예 격리시키거나 없앨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잠시 침묵을 지킵니다.
"음, 긴장형 두통이에요. 병 이름에 원인이 나와있어요. 긴장해서 그래요. 스트레스를 받거나, 힘들면 생겨요."
"아, 네."
다연이 학생의 시선이 아래로 향합니다. 곰곰이 맞는지 생각해보고 있겠죠. 잠시 기다립니다. 다연이 학생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네, 맞는 것 같아요."
"주말이나 방학 때는 어때요?"
"그러고 보니, 학교 안 갈 때는 괜찮은 거 같아요."
"배는 어때요?"
"네?"
"속이 불편하거나, 부글거리거나 그런 건 없어요?"
"아침에만 좀 그래요."
"주말에는 괜찮죠."
"네."
다연이 학생은 지금 몸이 아픈 게 아니라 마음이 아픈 거예요
"마음이 말을 못 하니까, 몸으로 나타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학교 안 가는 주말이나 방학에는 괜찮고, 학교 가는 평일에만 그것도 아침에 더 아파요."
"..........네, 그런 것 같아요."
"일단 몸은 특별한 이상은 없어요. 약을 드리기는 할텐데, 몸이 아픈 원인을 아는 것만으로도 증상이 조금 호전됩니다. 스트레스라는 게 안 받기는 어렵지만, 스트레스를 어떻게 하면 적게 받을까, 어떻게 스트레스를 풀까, 고민해보세요. 아시겠죠?"
"네, 감사합니다."
진료실을 나가는 다연이 학생 표정이 4.5에서 4.9 정도로 약간 좋아진 것 같습니다. 또한 제가 충고한대로 고민을 하는 모습입니다. 여기서부터는 자신이 정답을 찾아야 합니다.
일요일 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내일 등교나 출근으로 마음이 갑갑해질 겁니다. 월요일인 내일이 되면 마음이 아픈 어떤 사람은 배가 아프고, 또는 머리가 아프다면서 병원에 올 겁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마음이 아프진 않나요?
모두 좋은 밤 보내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