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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나리의사 Dec 22. 2019

마스크를 쓴 천사

 수술실 생중계 III

 수술에는 많은 사람이 참여합니다. 집도의, 퍼스트 어시스트, 세컨드 어시스트, 써드 어시스트, 마취 간호사, 마취과 의사, 의대 실습생까지. 이 글은 세컨드 어시스트의 경험으로 각 참여자마다 서로의 역할 및 생각하는 바가 다를 수 있으므로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수술실은 1번부터 35번까지 있지만, 4번 방만은 없습니다. 수많은 죽음을 경험하는 의사는 귀신이나 미신을 거의 믿지 않지만, 환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죽을 사(死) 자의 위력으로 수술실뿐만 아니라, 병원 엘리베이터도 4층 대신 F라고 적혀 있습니다.  

 여하튼 3번 방에서 5번 방으로 바로 건너갑니다. 그리고 제 뒤에는 그림자처럼 PK가 따라옵니다. 5번 방에서는 수술이 한창 진행 중입니다. 마취과를 돌고 있는 인턴 재환이도 있네요. 서로 눈으로 아는 척을 합니다.

 제가 인턴이 되어서 처음으로 수술실에 들어와서 가장 신기했던 것 중 하나는, 사람들이 눈만 보고 다른 사람들을 알아보는 것이었습니다. 입과 코뿐만이 아니라 양쪽 뺨 전체를 덮는 마스크에 눈썹까지 내려오는 수술 모자를 쓰면, 녹색 마스크와 수술 모자 사이로 눈 밖에 안 보이는 데 수술실 사람들은 목소리도 듣지 않고 눈만 보고 누구인지 압니다.

 눈썰미가 날카롭지 못한 저는 수술방에서 꿀 먹은 벙어리가 됩니다. 마스크를 쓴 누군가 저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거나 인사를 건네면, 잔뜩 긴장한 채 인상을 쓰고는 유심히 쳐다봅니다. 그러면 상대가 "내다, 성진이."라고 자기 이름을 말할 때야, 겨우 긴장을 풀고 "아, 성진아"그럽니다.

 하지만 수술실에서 보낸 시간이 마취과와 신경외과를 거쳐 10주가 넘어가니, 이제 저도 눈만 보고도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또 다른 문제가 생겼습니다. 알고 지내던 사람은 눈만 보고도 알 수 있지만, 수술실에서 눈만 보던 사람을 밖에서 만나면 알아차릴 수가 없었습니다. 거기다 눈만 보면, 사람들이 모두 예뻐 보입니다.

 지금 수술실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비인후과 왕주원 교수님, 이비인후과 레지던트 3년 차 문수진 선생님, 레지던트 1년 차 최정우 선생님뿐만 아니라 마취과 인턴 정선이, 마취과 간호사, 스크럽 널스 한 명과 실습 중인 간호대생에 인턴인 나와 그림자 PK까지 총 9명입니다.

<마스크를 쓴 천사 아니 마스크를 써서 천사?>

 이 중에 여자는 마취과 간호사와 마취과 돌고 있는 인턴 정선이, 스크럽 널스 한 명, 간호대생까지 4명입니다. 그리고 가끔 수술실에 물품을 공급하는 간호사가 가끔 수술실에 들어옵니다. 대학병원에 있는 간호사 중에서도 특히 굉장한 체력을 요구하는 수술방 간호사는 일단 젊습니다. 대게 20대 중후반이고, 나이가 많아도 35살을 넘지 않습니다. 거기다 말할 필요도 없이 오늘 처음 보는 간호사는 20대 중반으로 보입니다.


 저는 오늘 그녀의 두 눈을 봅니다. 현대 과학기술의 발달 때문인지, 아니면 다윈의 적자생존에 의해서 쌍꺼풀이 없는 여자는 모두 퇴화해 버렸는지 알 수 없으나 이때까지 본 대부분의 간호사는 쌍꺼풀이 있었고 오늘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선명할 뿐만 아니라, 깊게 파인 홈은 매혹적입니다. 또한 그 깊은 홈에 매달려있는 검고 긴 속눈썹은 볼륨감이 넘칩니다. 거기다 푸른 하늘을 향해 살짝 들려있는 처마처럼, 나를 향해 부끄러운 듯 들려있는 속눈썹은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설레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 속눈썹이 보호하고 있는 검은 눈동자는 크고도 깊습니다. 수술방이 어두워서 그런지 아니면 나를 보고 설레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검은색 동공 또한 확장되어 있습니다. 거기다 눈망울도 촉촉이 젖어있으니 그 어떤 남자가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을 수 있을까요.  

 

 저는 마스크 속에 숨겨진 그녀의 나머지 얼굴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백옥과 같은 하얀 피부에 오뚝한 코, 앵두 같이 붉고 탐스러운 입술에, 동그란 이마와 그 하얗게 빛나는 이마를 감추고 있는 검고 윤기 나는 생머리. 수술실의 그녀는 김태희보다 더 예쁘고, 한예슬보다 더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수술이 끝나고,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감추고 있던 녹색 마스크와 모자가 벗겨지는 순간, 공룡을 멸종시킨 소행성이 내 머릿속에 떨어지고, 엄청난 지진과 해일이 저의 뇌를 갈라놓고 덮어버리고 맙니다.

 

 모자에 눌려 잔뜩 헝클어진 머리는 떡이 져서, 그 속에 까치 가족이 3대째 집을 짓고 오순도순 살아도 될 정도이고, 마스크를 쓴 입 주위는 입김 때문에 화장이 다 지워집니다. 붉은 립스틱은 입가에 흘러내려, 수술 중에 환자 피를 들이켜 마시다 흘린 것 같습니다.

 한국 여자들이 과거에 두루마리로 얼굴을 가린 건 남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건 여자를 위해서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옷 사이로 얼핏 보이는 크고 아름다운 눈에 반해 결혼을 했는데, 실제로 얼굴을 봤을 때 어금니를 꽉 깨물고, 두 주먹을 불끈 쥔 신랑들이 꽤나 있었을 겁니다.  

 이미 수 십 번이나 그 기대가 무참히 깨져버렸지만 인간이란 언제나 희망을 품고 삽니다.

  

 “스크럽 서라.”

 나를 보자마자 왕 교수님이 말을 뱉습니다.

 “네.”

 짧은 대답과 함께 나는 다시 들어왔던 문으로 나가서 손을 씻고, 저와 함께 수술방에 들어간 PK는 아무 말 없이 한쪽 벽면에 붙어 섭니다.

 레지던트 3년 차인 박수진 선생님이 저를 보고

 “정우 선생님, 손 바꾸세요.”

 라고 합니다. 1년 차인 정우 선생님이 필드에서 나옵니다.

 스크럽 널스가 저에게 묻습니다.

 “몇 번 쓰세요?”

 “아, 네, 칠 반요.”

 굽실거리며 대답합니다.


 스크럽 널스가 저에게 또다시 수술복을 입혀줍니다. 다른 건 몰라도 이 순간의 기분만은 최고입니다. 하지만 찰나입니다. 이제 몇 시간 동안 견인기만 잡고 있어야 합니다. 레지던트 1년 차 정우 선생님이 들고 있던 견인기를 건네받습니다.

 왕 교수님의 수술방은 조용합니다. 음악도 없습니다. 정적과 가끔 전기 소작기로 살 타는 소리만 날 뿐입니다.  얼굴이 유난히 커서 마스크가 작아 보이는 왕주원 교수님은 얼굴만큼이나 덩치도 컸지만 키는 작습니다. 피부는 유난히 검은데, 마스크와 모자 사이로 보이는 찢어진 눈만은 날카롭게 빛납니다. 그 눈빛은 안 그래도 냉랭한 수술실 분위기를 차갑게 얼어붙게 만듭니다. 10명 가까운 사람들이 있음에도 오가는 말은 없습니다. 왕 교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수술도구 이름이 전부였다. “바이폴라”하면 스크럽 널스가 왕주원 교수님이 내민 손 위에 있던 메스를 바이폴라로 바꾸어 주고, 다시 “메스”하면 교수님 손 위에 있던 바이폴라를 메스와 바꾸어 줄 뿐입니다.   

 그러다 보니 왕주원 교수님과 같이 수술하는 것을 의사뿐만 아니라 간호사들도 모두 싫어합니다.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왕주원 교수는 수술을 멈춘 채, 아무 말도 없이 실수를 한 사람을 노려 봅니다. 왕주원 교수의 눈빛을 받은 사람은 어쩔 줄 몰라하며 당황하고, 더 자주 실수를 합니다.


 수술방에서 기피 대상 1호는 OO과 정 OO 교수님이었습니다. 화가 나면 자기 손에 있던 수술 도구를 벽에 던지기도 한다는 소문이 들렸습니다. 욕설이 난무한다는 말도 있었습니다. 당연히 모든 사람들이 정교수님의 수술에 들어가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실력을 떠나서 인품이 최악이었지만, 다른 건 몰라도 정치, 흔히 말하는 빽만은 최고였습니다. 어느 사회든 그렇지만, 병원에서도 똑같습니다. 수술을 잘하는 사람이 교수로 남아 있는 게 아니라, 힘 있고 권력 있는 자가 교수로 남고, 그 대표적인 사람이 정 OO교수였습니다. 운이 좋았는지, 저는 정 OO 교수님 수술에 들어간 적은 없어서 풍문으로만 들었습니다.

 '을'도 안 되는 레지던트나 간호사들이 할 수 있는 저항이란 아는 사람이 교수님을 추천해달라고 하면, 다른 교수님을 추천하는 게 전부였습니다. 몇 명이나 되냐구요? 극히 소수지만 각 병원마다 2~3명은 있는 듯 합니다.


 여하튼 오늘 왕교수님 수술방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두 시간만 버티면 될 듯합니다.

 수술은 손기술입니다. 내과는 진단만 정확히 내려지면 쓰는 약의 종류와 용량은 정해진 프로토콜을 따르기 때문에 의사마다 크게 차이가 없습니다. 정반대로 수술을 집도하는 의사의 실력은 천차만별입니다. 똑같은 재료로 요리를 해도 맛이 모두 다르듯, 똑같은 질병을 가진 환자를 똑같은 기구로 수술해도 결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누가 정말 수술을 잘하냐고요? 언론에서 정하는 명의? 아닙니다. 오로지 수술방에서 같이 수술하는 사람들만이 알 수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수술은 천천히 진행됩니다. 큰 혈관이 나오면 옆으로 피하고, 작은 혈관이 나오면 묶고, 피가 나오면 지지고. 정상 구조물 확인하고, 지방이 나오면 가르고, 근육이 나오면 밀어젖히고, 박리하고, 자르고, 묶고, 지지고, 또 박리하고, 자르고, 묶고, 지지고. 이 방에 들어온 지도 2시간이 지나가고 수술도 끝을 향해 달려갑니다. 수술방에 걸려 있는 시계를 보니, 벌써 한 시입니다. 배가 고파옵니다. 교수님이

 "인턴 선생님, 밥 먹고 오세요."

 하기만을 기다립니다. 이비인후과는 적어도 밥은 먹으러 보내주니까요. 가장 힘들다는 신경외과요? 인턴인 저는 점심은커녕, 저녁도 못 먹었습니다. 저는 그냥 수술 한 케이스 대신 외래 40명 보는 것을 선택하기로 했습니다. 수술방에 있는 간호사를 포함한 모든 선생님들께 경의와 존경을 표합니다.


 이상으로 수술실 생중계를 마칩니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수술에 대한 편견을 조금 무너뜨리기 위해서 쓰긴 했는데 오히려 잘못된 선입견을 심어줄까 걱정도 됩니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지만, 여러 장님이 코끼리를 묘사한 걸 모으면 가장 정확한 코끼리를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해서 글을 써 보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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