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류만으로 일단 H대 의대를 전체 2등으로 졸업한 정지훈 선생님을 뽑았다.
의대생이라면 안다. 의대 전체에서 2등을 할 정도면, 그 사람이 얼마나 성실하고 부지런한 인간인지.
술을 좋아하거나, 연애에 빠져서는 절대로 나올 수 없는 성적이다. 날고 긴다는 인재들 가운데, 일 이등을 다투었다면 그건 성실함의 가장 중요한 보증수표였다. 아무리 힘들어도 참아낼 것이고, 친절할지 안 할지는 몰라도 적어도 자기가 맡은 환자를 꼼꼼하게 봐줄 것이다.
다른 한 명은 의대를 다니면서 노인 치료에 대한 논문을 공동으로 쓴 김유진 선생님이었다. 성적은 그리 높지 않았지만, 대학교 때 노인 치료에 관한 논문을 쓸 정도가 되면 과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고 판단했다. 2년 동안 논문만 몇 백번 읽고 발표를 했기에 딱 보자마자 알았다. 이건 누구처럼 아버지 친구에게 부탁한 논문이 아니라, 자기가 직접 쓴 논문이란 것을.
일단 이 두 명은 면접에서 심각한 문제만 없다면 서류만으로 합격이었다.
"야, 이 선생님은 이력서를 손으로 썼네. 뭐지?"
"아니, 가장 기본적인 걸 안 지키면 어떡해?"
"그러게, 이건 좀 심한데."
"이 선생님은 가족 사항에 이름만 쓰고 나머지는 하나도 안 썼네. 이름도 한자 쓰는 칸에 순 한글 이름도 아닌데 안 썼네."
"뭐고? 가족을 밝히기 싫은 건가? 직업은 그렇다 쳐도 생년월일도 안 썼네."
"뭐 사회에 불만이 있나?"
이력서만으로 2명은 아웃되었다.
의대를 졸업하면, 출신 대학과 상관없이 수련 병원을 고를 수 있다. 전문의가 되려면 인턴 1년을 하고, 특정과(안과, 내과, 흉부외과)를 정해서 3~4년간 수련을 받으면 전문의가 된다.
1년간 인턴을 할 병원도, 레지던트를 할 병원도 각각 지원할 수 있다. 좋은 과(성형외과, 피부과) 및 좋은 대학병원(서울대학교 병원, 세브란스, 아산병원, 삼성병원 등)은 항상 경쟁이다.
의사들은 출신 대학에 따른 차이(차별?)를 대체로 받아들인다. 서울대를 졸업한 의사는 연세대나 고려대를 나온 의사보다 인턴이나 레지던트를 지원할 때 유리하다. 다른 병원을 지원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반대로 지방에 있는 P대 같은 경우는 서울에 있는 아산병원이나 삼성병원에 인기 있는 과(피부과, 성형외과)를 지원을 할 수 있지만, 거의 뽑히지 않는다. 그래서 주로 지방 의대생인 경우는 성적이 좋은 학생들이 주로 서울로 올라온다.
A대학 OO 병원 가정의학과 레지던트를 뽑을 때는 A대 출신이 제일 유리하고(서울대는 없었다), 그다음이 A대 지방 캠퍼스를 나온 사람, 그다음이 A 대학 OO 병원에서 인턴을 다른 대학 출신 순이었다.
출신 대학, 의대 성적만큼 중요한 게 평판?!이다.
말 그대로 다른 사람의 평가였다. 대학교 동기나 선후배, 같이 1년간 인턴을 한 병원에서의 평가가 정말 중요하다.
"OO 인턴 선생님, 당직 때 일을 깔아 두고 전화를 안 받다가 동기랑 크게 싸웠는데, 못 들었나?"
"야, 그 선생님 , 짱돌(의대 내에서 고집이 세고, 규칙을 어기며 자기 마음대로 하는 아웃사이더)로 유명했다."
이 말을 듣고서도 뽑아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평판을 조사하는 데는 아무래도 A대 출신이나, A대 부속 OO병원에서 인턴을 한 사람은 조사하기 쉬웠다. 하지만 이번에는 타 대학 출신이 많았다. 의국 내 모든 인원이 아는 후배, 동기를 총동원해서 지원자의 평판을 뒷조사? 하였다. 10명이 넘는 의국원들이 사립탐정처럼 뒷조사를 했다.
사고를 사람 한 선생님을 제외하기로 했다.
앞서 H대 차석이었던 정지훈 선생님과 관련 논문을 쓴 김유진 선생님 모두 젊었다.
젊으면 무조건 가산점이 붙었다.
나이가 많으면 아무래도 체력이 부족하고, 체력이 부족하면 밤에 당직을 서다가 콜을 못 받고 졸거나, 너무 힘이 들어서 중간에 포기할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남자가 좀 더 선호되었다.
혹여나 여자 선생님이 임신이라도 하면 그 선생님이 출산 휴가로 3개월 쉬는 동안 남은 사람들이 정말로 죽어 나간다. 거기다 가정의학과는 여 선생님들이 선호하기에 어느 정도 성비를 맞춰야 했다. OO대 지방 캠퍼스 출신 남자 선생님 2명이 합격선에 올랐다.
4명은 합격, 3명은 불합격, 13명이 남았다. 그리고 13명 중에 3년을 함께할 4명을 선택해야 했다.
가정의학과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지원한 선생님도 있었다. 마이너스. 다른 과를 지원했다가 떨어져서 온 사람도 있었고,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도 있었다. 다들 고만고만했다. 면접관 6명의 의견이 서로 갈렸다. 일단 젊은 사람을 뽑자는 의견도 있었고, 면접에서 말을 잘하는 사람에게 가산점을 주자는 의견도 있었다. 우리는 결국 공을 교수님들께 넘겼다.
교수님께서 우리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해주셔서, 우리가 선택한 4명은 그대로 합격했고, 3명은 그대로 떨어졌다.
면접관이었던 우리는 지금 생각하면 차마 떠올리기조차 부끄러운 형편없는 질문을 하기도 했다. 말이 면접이었지, '말로 하는 해병대 캠프' 분위기였다. 어떻게든 약점을 찾아내서, 사람을 곤경에 처하게 한 후, 궁지에 처했을 때 드러나는 모습을 보려고 했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간에, 상당히 불편한 경험이었을 텐데 면접을 보러 오셨던 선생님들께 동기와 의국을 대신해 이 자리를 빌어서 사과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