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하는 나라는 닮아 있다.

제정 러시아와 조선의 평행이론

by 빛나리의사

톨스토이가 “모든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아 있다.”고 말했지만 “모든 망해가는 나라는 서로 닮아 있다.”


위기의 순간, 무능한 지도자가 등장한다.

무능한 지도자가 무능하고 타락한 인물을 중용한다.

나라가 망한다.


이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제정 러시아와 조선 말기는 서로 비슷하게 무너져 내린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대원군이 재집권을 하고, 민자영(명성황후)은 도망쳐 자신의 친정이 있는 충주로 내려간다. 그녀가 다시 왕궁으로 복귀할 수 있을지를 떠나서, 목숨마저 위태롭던 상황에 한 무당이 민자영을 찾아온다.

“감히 왕비마마를 배알한 연유는 환궁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드리기 위함입니다!”

<진령군_배상렬 지음> 97p

무당의 말대로 민자영은 다시 왕궁으로 복귀하여 권력을 잡는다. 민자영은 무당을 총애하기 시작한다. 특혜란 말이 무색해질 정도이다.


창덕궁 동쪽의 성균관에 인접한 숭동에 새로운 관왕묘가 건설되었다. 사람들은 이를 가리켜 북관왕묘, 또는 북관묘라 불렀다. 중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가운데 하나인 관우를 중국 곳곳에 사당이 있으며, 조선에서도 도성의 중심지에 동묘를 세워 극진하게 추모하던 터였다. 새로운 관왕묘의 주인은 무당이었다... 고종과 민자영은 그에게 ‘진령군’이라는 군호를 내렸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왕의 아들이거나 왕실과 지근거리에 있는 종친, 또는 딸이 왕의 부인이어야 군호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105p


황제 니콜라이와 알렉산드라에게는 혈우병을 앓는 황태자, 알렉세이가 있다. 그는 배 안의 출혈로 목숨이 오락가락하고 의사들마저 포기했을 때, 라스푸틴이 등장한다.


“착한 아이야. 네 병은 곧 나을 것이다. 그러나 너의 미래는 오직 신만이 안다.”

<라스푸틴_조지프 푸어만 지음> 89p

기적과 같이 황태자 알렉세이의 병이 기적처럼 낫는다. 황후 알렉산드라는 라스푸틴을 ‘신이 보내준 사람’이라 믿으며 전적으로 신뢰한다.

비선 실세는 막강한 권력을 쥐게 되고, 사람들이 그들 앞에 엎드린다. 부패와 비리, 청탁이 판을 친다.


마음대로 궁궐을 출입하면서 언제든지 고종과 민자영을 만날 수 있는 무당은 민씨 일파도 감히 건드릴 수 없을 정도로 거물이 되었다. 왕과 왕비에게 권력을 분배받은 무당이 인사에 개입하는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주요한 내직의 임면을 주무를 수 있는 무당에게 물 좋은 지방의 군수나 현감을 바꾸는 것 정도는 우스운 일이었다. 어떻게든 무당에게 줄을 대기 위한 자들이 북관묘 앞에 장사진을 쳤다. 무당의 뜻이 곧 어명인 세상이 되기에도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129p


러시아도 다를 바가 없다.

라스푸틴의 영향력의 궁극적 원천은 ....알렉산드르 궁전이었다. 1915년 1월 26일, 알렉산드라가 차르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우리의 친구가 해결해달라고 가져온 민원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요.”... 1915년 8월 30일에 보낸 편지의 내용은 이러했다. “우리의 친구에게서 받은 민원서류들을 동봉합니다. 청원서마다 일일이 가부를 표시해주세요. 모두 가라고 표시되리라 믿어요.”... 라스푸틴은 차르와 만났을 때 100장의 민원 서류를 한꺼번에 전달한 적도 있었다. 230p


1916년 말, 라스푸틴의 권력은 정점에 달했다. 구도자들과 민원인들은 라스푸틴의 아파트 주변 보도를 가득 매운 채, ‘성자 그리고리’와 함께 어울리고 싶어 아우성을 쳤다... 그의 측근과 친구들은 러시아정교회와 정부의 요직을 거의 독차지했다. 니콜라이와 알렉산드라는 중요한 의사결정 과정에서 그의 충고를 들었다. 307p


너무나 닮은 모습에 소름이 돋는다.

하지만 선비의 나라, 조선에 인물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목숨을 걸고, 직언을 하는 자는 어느 사회에든 있었고 조선도 예외가 아니었다.


요사이 괴아힌 귀인이 몰래 여우같은 생각을 품고 스스로를 성제의 딸이라고 거짓말을 하며 북관왕묘의 주인이 된 다음 요사스럽고 황당하며 허망한 말로써 뭇사람들을 속이고 함부로 군 칭호를 부르며 감히 임금의 총애를 가로채려 하였습니다..... 140p


사간원에서 정언을 지냈던 안효제가 자신의 목숨을 걸고 무당을 정면으로 비판한 것이었다. 사간원에서 관직을 지냈던 권봉희도 가담했다.


기근이 거듭 들어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고 저축은 다 떨어졌으며 기강은 헤이 해지고 이교가 횡행하고 있습니다. 141p


둘은 다행히? 목숨을 건지고 흑산도와 추자도로 유배를 간다.

그리고 조선은 1910년, 제정 러시아는 1917년 망한다.


나는 <진령군> 책의 표지에 적힌 “조선을 홀린 무당 진령군”, “나라가 망하는데는 한 사람이면 충분하다!” 문구와 <라스푸틴>에서 “만약 라스푸틴이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세상은 훨씬 더 나은 곳이 되었을 것이다.”388p 마지막 문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진령군과 라스푸틴은 억울하다. 세상에 널린 게 사기꾼이고, 요승이고, 무당이다. 어차피 자신들이 아니라도 알렉산드라와 민자영은 다른 요승, 무당에게 홀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제정 러시아와 조선을 망하게 만든 건, 라스푸틴과 진령군이 아니라, 라스푸틴과 진령군에게 홀린, 알렉산드라와 민자영, 그리고 황제 니콜라이와 고종황제이기 때문이다.


또다른 진령군의 등장-진령군과 같은 고장인 충주에서 성강호라는 자가 귀신을 볼 수 있다 해 고종이 불러 민자영을 볼 수 있게 하라고 명했다. 하루는 민자영의 신위가 모셔진 경효전에서 다례를 행하던 성강호가 갑자기 계단 아래로 엎드렸다. 고종이 연휴를 묻자 “황후께서 임하사 탑으로 오르셨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고종은 탑을 어루만지며 대성통곡했고.. 이후부터 공식적으로 제사를 지낼 일이 있으면 고종은 반드시 성강호에게 물었다.... 고종은 황후가 생각날 때마다 성강호를 불렀다. 불과 일 년 만에 성강호의 관직이 협판에 이르렀으며 그의 문전이 저자 같았다. 218p


대선이 가까워 온다. 또 다시 무능한 자들과 무당들이 판을 칠 것이다. 부디 역사에서 교훈을 얻었기를 빈다.


**책에 대한 평가

라스푸틴: 꼼꼼한 자료 조사로 훌륭한 평전이다. 관심 있는 분이라면, 추천.

진령군: 전반적으로 자료나 조사가 부족해서 평전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