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다.
"김정권 님이시죠?"
의사로서 건강검진을 하면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있다. 건강 검진 검사 결과에 "의사와 상담하십시오.", "진료를 보십시오."라고 적혀 있어도 상당수의 사람들이 아프지 않으면, '괜찮겠지.'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진료를 보러 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건강검진 결과를 일일이 확인하며, 종종 병원 직원에게 "OOO 환자는 꼭 검사 결과 들으러 오시라고 해주세요."라고 한다. 주로 간 수치나, 고지혈증, 당뇨 수치가 높은 경우이다. 그러면 병원 직원이 환자에게 직접 전화를 건다. 하지만 의사인 내가 꼭 직접 환자에게 전화를 거는 경우가 일주일에 몇 번 있다. 당장 추가 정밀 검사나 진료가 필요한 경우이다. 70대 후반인 김정권 님도 그랬다.
"네, 맞는데요."
"안녕하세요? 가정의학과 의사 양성관입니다. 며칠 전에 저희 병원에서 건강검진받으셨죠?"
"예, 그런데요."
"폐 검사에서 이상한 것이 보여서 정밀 검사가 필요해서 연락드렸습니다. 최대한 빨리 병원으로 방문해 주십시오."
70대 후반으로 특이 병력이 없던 김정권 씨의 흉부 엑스레이에는 좌측 폐에 5cm 크기의 혹이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무려 두 개나 보였다. 2년 전에 찍은 사진에서는 없었기에 새로 생긴 것이었고, 하나는 계란크기로 정말 동그랗고 경계가 비교적 균일하여 양성 종양(즉 혹)이, 다른 하나는 주위로 가시를 마구 뻗는 성게 형태로 악성 종양(암)이나 심한 염증일 가능성이 높았다.
"돈 없어요."
생각지도 못한 답변에 머리가 멍했다. 대개는 이상이 있어 병원을 방문하시라고 하면, 잔뜩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결과가 많이 안 좋나요?", "심각한 가요?"라고 묻지 돈이 없다고 대답하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전화기 너머에서 들리는 김정권 씨의 목소리는 달관이라기보다 체념에 가까웠다.
"검사 꼭 하셔야 해요."
"얼마나 드는데요?"
의사는 예상외로 검사비용을 잘 모른다. 폐 CT의 경우, 의료 보험이 되니까 진료비를 포함하여 환자 본인 부담금은 대략 9만 원 정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조영제를 쓴 폐 CT의 경우 검사비는 18만 원으로 10만 원 전후이다.)
"9만 원 정도요?"
"돈 없어서 검사 못 해요."
"..............."
나는 강력한 훅을 연달아 맞은 권투선수처럼 정신이 어찔했다. 그래도 나는 의사로서 본분을 잊지 않았다.
"꼭 검사하셔야 합니다."
"검사하면, 나을 수는 있나요?"
검사를 해서 뭔지 알아야 치료가 되는지 안 되는지 알 수 있는데, 검사도 안 해보고 나을 수 있냐고 묻는 말에 나는 은근 기분이 상했다. 거기다 건강검진 체크란에는 매일 하루 한 값의 담배를 피우고, 매일 하루 한 병의 소주를 마시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술 마시고, 담배 피우는 것만 며칠 아껴도 충분히 검사를 할 수 있었다. 돈이 없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갑자기 짜증이 치밀었다. 나는 목소리를 높였다.
"검사를 해 봐야 알 수 있죠."
"난 검사 안 하렵니다."
"아니, 안 괜찮아요. 꼭 검사하셔야 합니다. 지금은 괜찮지만, 나중에 큰 일 날 수 있어요."
"괜찮습니다. 근데요......."
"네?"
"위는 괜찮아요?"
"........"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고령인 데다 매일 술을 마시기에 속이 쓰려, 자신은 위가 걱정이 되었을 것이다. 위는 위염이 있었지만, 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김정권 씨는 저 멀리 커다란 해일이 몰려오는데, 파도에 신발이 젖은 것을 걱정하는 것이었다. 하.............
내 예상(아마도 폐암일 것이고, 잘해도 심한 폐 염증)이 맞다면, 지금 최선의 치료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완치를 장담할 수 없다. 그렇다고 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괜찮다고 말한 환자는 길어야 몇 달 후면 피를 토하거나, 숨이 차서 병원으로 올 것이다. 그걸 알기에 나는 포기할 수 없었다.
"위염이 있긴 한데, 위가 문제가 아니에요. 폐가 문제지."
"괜찮아요. 그나저나 전화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도 김정권 씨도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 환자가 있는 나는 전화를 끊어야만 했다.
"꼭 검사받으세요."
"감사합니다."
영화나 드라마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의사인 나는 "내가 공짜로 해 줄 테니, 병원에 오세요."라고 말하지도 않았고, 환자의 집에 찾아가서 설득하지도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며칠이나 망설이다 고작 다시 한번 전화를 한 것이 전부였다. 우리 둘의 대화는 결코 만나지 않는 두 갈래의 기찻길처럼 평행선을 달리다 저번보다 더 짧은 대화로 끝이 났다.
그 후로도 나는 변함없이 매일 수십 명의 환자를 보고 있고, 김정권 씨는 매일 술을 먹고 담배를 피우고 있을 것이다. 변하는 것은 김정권 씨의 폐 속에 있는 커다란 혹이었다. 암이든, 염증이든 점점 커서 어느 날 김정권 씨를 통채로 삼키고 말 것이다. 의사인 내가 할 수 있는 건 안타까움에 그저 몇 글자 끄적이는 것이 전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