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힐끔 보았을 뿐.
70대 후반에 검은색이 하나도 남지 않는 머리에 파마를 하신 할머니가 진료실로 들어오니, 다짜고짜
"선생님, 정말 명의세요. 1년 전에 선생님이 준 연고를 바르고 정말 거짓말처럼 나았어요."
라고 반가워하신다.
"네?"
김정자 할머니는 나보고 명의라고 하시는데, 정작 나는 내가 왜 명의인지를 떠나, 김정자 할머니를 기억하지 못했다.
"그때, 선생님이 제 손을 보고, 연고 주셨잖아요. 그거 바르고, 며칠 만에 완전히 싹 사라졌다니까요."
할머니는 손톱에 봉선화 물을 아이들이 자랑을 하듯, 자신의 두 손을 활짝 핀 채 내밀었다. 그제야 할머니, 더 정확히는 그 상황이 기억이 났다. 몇 개월 전의 일이었다.
"다음 분 들어오세요."
김정자 할머니는 나에게 두 손으로 파란 종이를 건넸다. 건강검진 설문지였다. 내 눈에 들어온 파랗고 하얀 종이보다, 그 종이를 들고 있던 할머니의 두 손이었다.
"손이 왜 이래요?"
"몇 달 전부터 가렵더니, 이게 낫지를 않네요."
"병원에 가신 적은 있어요?"
"고혈압약은 타러 매번 병원 가는데, 막상 물어보지를 않았네요."
피부과 전문의가 아닌 나로서는 피부에 대한 지식이 적다. 기껏 아는 것이라고는
1. 항생제-세균 치료
2. 항진균제-곰팡이에 의한 무좀이나 어우러기 치료
3. 항바이러스제-단순 포진 등 바이러스 감염 치료
4. 스테로이드제-세균, 진균, 바이러스에 의한 감염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경우. 아토피, 접촉성 피부염 등
이 정도가 전부이다.
할머니 손을 보니, 몇 개월이나 되었으니 세균 감염이나 바이러스 감염일 확률은 낮았다. 할머니 손을 잡아보니 땀이 많이 나는 것 같지도 않고, 물어보니 발에 무좀도 없으니, 곰팡이 감염일 확률도 낮았다. 접촉성 피부염일 가능성이 제일 높았다. 종합병원이기에 피부과도 있지만, 피부과로 보내기에는 새롭게 접수해야 하고 또 다른 층으로 이동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할머니, 그냥 속는 셈 치고, 제가 연고하나 처방할 테니 발라 보세요. 딱 3일만 발라 보시고, 효과 없으면 그만 바르시고."
"간지러워서 안 그래도 불편했는데, 그래보죠."
나는 가장 흔히 처방되는 스테로이드 연고를 처방하고는 건강검진 문진을 마치고는 완전히 김정자 할머니를 잊고 있었다.
"선생님 덕분에 몇 달 동안 고생했던 손가락이 나았다니깐. 선생님이 명의야, 명의."
"아니에요. 아니에요. 다른 선생님도 봤으면, 똑같이 접촉성 피부염이라 생각하고 똑같은 연고 처방했을 거예요."
"그래도 나에겐 선생님이 명의야, 명의."
남들 다 아는 접촉성 피부염에 흔한 스테로이드 연고 하나 줬을 뿐인데, 할머니의 과한 칭찬에 괜히 머쓱해진다. 그래도 종이 건네는 손 한 번 힐끔 보고, 진단해 주고, 치료해 줬으니 의사로서 할 만큼 한 것 같아,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