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도 한 듯, 안 한 듯 평범한 얼굴이었다. 30살의 그녀는 항상 무기력하고, 의욕이 없었으며, 늘 피곤하다고 했다. 가장 간단한 우울증 척도 검사에서 14점으로 우울증이 의심되었다. (10~19: 중간 정도 우울증, 20~: 심한 우울증) 다행히 자살 시도 등은 없었다.
“우리나라 사망 원인 1위는 암, 2위는 심혈관 질환입니다. 하지만 40세 미만에서는 사망 원인 1위는 자살입니다. 자살의 가장 흔한 원인은 우울증이고요.”
로 시작한 설명이 길어졌다. 정신과 진료를 권하고, 최소 3번은 약을 조절해야 효과 있으니, 마음에 드는 의사와 병원을 만나면 꾸준히 치료받기를 당부했다.
그날 오후, 각종 혈액검사를 담당하는 진단검사의학과에서 전화가 왔다.
선생님, 오늘 혈액 검사한 정미경(가명) 환자 헤모글로빈 수치가 6.0이에요.
우리 몸은 화력 발전소이다. 입으로 먹은 음식을 폐로 마신 산소로 태워 에너지를 얻는다. 이 산소를 운반하는 게 바로 적혈구이다. 적혈구는 산소를 운반해 주는 택배 기사에 해당한다. 김진경 씨 몸에는 이 택배기사가 반 밖에 없어, 산소가 안 가고, 산소가 없으니, 불이 잘 안 붙어 발전소 효율이 떨어지니 에너지가 부족하고, 에너지가 부족하니, 의욕이 없고, 피곤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그녀의 문제는 마음이 아니라, 몸이었다.
마음이 아픈 우울증이 아니라, 몸이 아픈 심한 빈혈이었다. 사람들은 빈혈(진단)하면 어지럽다(증상)를 생각하지만, 사실 경한 빈혈은 증상이 없고, 심한 빈혈은 대부분 피곤하다. 물론 피곤하다는 증상의 원인은 우울증, 빈혈, 심부전, 치매, 신부전, 간부전, 갑상선 기능 이상 등 무수히 많다. 그러므로 검사를 안 하면 알 수가 없다.
나는 기본을 간과하고, 성급히 진단을 내렸다. 정신과 질환의 기본은 다른 원인이 아니라는 전제하에 시작한다. 마음이 아파도 무기력해지지만, 몸이 아파도 무기력해진다. 나는 즉시 환자에게 전화를 했다. 우울증이 아니라, 빈혈이 심해서 피곤하고 무기력한 것이며, 즉시 정밀 검사와 치료가 필요하다고 전했다.
의사가 된 지 15년이나 지났지만, 언제나 진료는 기본에 충실해야 함을 새삼 깨닫는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