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하는 분이 오랫만에 근황을 전했다. 추진 중인 일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함께 비전, 다짐 같은것을 버무린 그런 글이었다. 그분의 하는 일과 지향은 언제나 지지했기 때문에 반가웠다. 하시는 모든 일이 잘 되길 바랐고, 거기에 내가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하지만 나는 댓글을 달거나 좋아요를 누르는 일은 하지 못했다. 그분에게서 지금의 나를 혼란스럽게 만든 한 사람의 죽음과 그림자가 짙게 비쳐있었기 때문이다.
얼마전엔 아주 오래전에 친구신청을 했던 또 다른 동경하는 여자 선배의 수락이 있었다. 아 맞아 내가 이분께 친구신청을 했었지 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분의 타임라인을 들어가봤더니 그분에겐 이젠 고인이 되어 세상에 없는 그분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그분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사람들에 대한 비난이 가득했다. 아마 그런 사람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나조차 그에 대한 글을 올리지 못할 뿐 아직 아무것도 정리하지 못했다.
내가 선택한 것은, 선긋기였다. 관계와 거리에 선을 긋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시간 사이에 선을 그었다. 2020년 7월에 선을 그었다. 그 전과 그 후는 다르다고. 그것은 죽은 사람에 대한 내 마음과 생각이 바뀐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와 나는 상관이 없었다. 그의 죽음 이후를 어떻게 살아갈지를 정한 것이었다. 내가 존경하는 분께서는 아마 속으로 많은 비난, 미움, 경멸 같은 감정을 뒤섞은 채 세상을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나를 그렇게 보고 있을 수도 있다. 다행히 그런걸 섣불리 표현하시는 분은 아니다. 존경하는 분을 가끔 마주치면 인사를 하고 나면 할말이 없어 시간과 시간 사이에 침묵이 이어진다. 여기에 그 원인도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 사람은 왜 죽었을까? 광복절 집회 이후 혼란에 빠져버린 한국을 바라보면서 그 질문이 더 강해진다. 그와 가까이에서 일했던 사람들은 지난 1주일동안 그의 빈자리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의 오바육바하는 제스추어가 도시를 어떻게 지켜왔는지 느낄 수 있다면서. 나도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 건 아니다. 그의 빈자리가 안타깝다. 할일이 많았고 (비록 모든 걸 지지할 순 없지만), 그걸 잘 마치는 흐름에 (잘 마친다는 조건 하에) 구성원으로 존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난 1주일을 보내면서, 죽어버린 그 사람에 대한 이해하지 못함과 원망이 더욱 커졌다.
피해자라는 사람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무슨 생각일까? 죽음을 선택한 건 본인 자신이다. 그를 잃은 상실을 견딜 수 없어도, 자신을 죽게한 건 그 사람이다. 그 사람을 죽음으로 밀어넣었다고? 아니. 그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고, 해야만 했다. 이런 이야기가 어떻게 마무리짓거나 전개될 수 있을지 보여줘야 했고, 그 결과가 어떻든 간에 감당해야했다. 그런데 도대체 왜. 자의식이 너무 과잉되었던 것은 아닐까. 자기와 세상을 동일시했던 것은 아닐까. 사람이 살다보면 여러가지 크고 작은 일, 그중에서도 엄청 큰 일을 겪을 수 있다. 그 사람에게 일어난 모든 일에 인과관계를 만들어서 누구를 탓하는 것은 비논리적인 일이다. 다만 그 과정에서도 지켜야할 것들이 있다. 나는 '공인'이었던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공인으로서 연루된 스캔들에 대해서 해명할 책임이 있다. 사람으로서의 그가 어떤 상황이었을지에 대해선 그 다음일이다. 나는 그와 개인적인 친분도 관계도 없으니까. 이것은 분명 책임에 대한 이야기다.
한 대통령이 의혹 속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고 나서 벌어졌던 상황에 대한 의아함들이 불어나고, 뒤집어지면서 지금 한국의 한 모습이 되었다. 나는 이번 죽음 앞에서 비슷한 냄새를 한번 더 맡았다. 좋아하고, 믿고, 지지하던 사람들과 이성적인 대화가 불가능했고, 그 사람들은 나를 '싸가지 없는' '인간의 기본됨이 없는' 등등의 말로 수식했다. 왜냐면 내가 충분히 애도하는 표정을 짓지 않고, 그의 편에 서서 무죄됨을 지지한다는 눈빛을 보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정말 그에게 묻고 싶다. 대체 왜 그런거냐고. 무덤끝까지 이 질문을 가져가지 않을까 싶다. 대체 왜 그런거냐고. 진실이 뭐냐고.
존경하는 분이 올린 글에 아무 흔적도 남기지 못한채로 여러번 읽다가, 그런 생각을 했다. 차라리 지금의 내가 어리석은 선택, 어리석은 가오를 부렸다는 걸 느끼면 좋겠다고. 언젠가 나이가 먹어서 지금의 어른들과 똑같은 어른이 되어. 자기가 보수가 되어가는지도 모르고 보수가 되어버린, 스스로 진보라고 굳게 믿은 사람이 되어, 그때는 제가 어려서 어른들 뜻을 몰랐죠. 호호 하고 아양부릴 수 있다면 얼마나 편할까. 그러면 나이 먹고 철이 들은 아이처럼, 아이를 낳고서야 비로소 어른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처럼, 그제서야 부모님의 마음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는 사람들처럼, 겪지 않은 자는 미완성일 뿐이다라고 믿는 사람들처럼 그렇게 하나를 이루고 해결하고 성장한 느낌으로 살아갈 수 있을텐데. 언젠가 그런 식으로라도 이분과의 끊어진 다리를 다시 연결할 수 있을까?
존경하는 분에게, 다시 보지 못할 녀석이 되고 싶지 않다. 나의 가장 큰 두려움은 이것이다. 나는 그분이 이성적이라고 생각했고, 공과 사를 구분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했고, 어떤 상황에서든 적재적소의 반응을 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분과 더욱 가까워지면서, 그분 역시 그냥 한명의 아저씨라는 걸 알게되었다. 그분은 아저씨지만, 존경할만한 공인이지. 그 사이 어드매에서 그분과 나는 이미 불편한 길을 걷고 있다.
아빠가 생각이 난다. 아빠와 나는 결국 화해하지 못한채로 헤어졌다. 아빠가 살아있었다면, 안희정사건, N번방사건, 박원순의 죽음을 어떻게 해석했을까. 나는 아빠와 결국 헤어지는 싸움을 했을 것이다. 나는 아빠와 대화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존경하는 분에게서 아빠를 본다.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오점같았던 아빠를, 내 인생에서 가장 존경한 사람에게서 발견한다.
그분이 알았으면 좋겠다. 당신의 감정과 지지하는 마음, 그리고 당신들의 세계가 그렇게까지 다 틀리고 문제였다고 말하는게 아니라는 것을. 다만 믿을 수 없는 사람뿐이고 따를 수 없는 어른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세계에서, 마음을 열고 그나마 지지했던 모습을 가진 사람들을 더이상 믿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리고 그 믿지 못함에 누군가가 침묵으로 응대할 때 느끼는 자신에 대한 복잡한 감정들. 그것에 부딪히고 싸우고 깨지면서 다음 시대가 온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언젠가 나중에 이 일에 대해 마음의 화해를 할 수 있다면. 구세계와 현 세계가. 그 방식은 '제가 너무 어렸어요'가 아니라, '우리도 보수가 되는건 처음이었어' 같은 메세지였으면 좋겠다. 안다. 기대는 금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