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서 뭐가 제일 맛있어요?
종종 파인다이닝에 가서 가장 만족했던 곳과 가장 최악이었던 곳을 꼽으라는 질문을 받는다. 보통은 당연히 이유를 같이 묻는다. 어느정도 이름이 알려지고 영업을 유지하고 있는 매장이니 맛이 문제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기물이나 공간의 멋짐도 다 내 수준보다 높다. 같은 시간대에 마주칠 수도 있는 다른 테이블의 이상한 손님을 자연재해 같은 것으로 치부한다면, 결국에 가서 파인다이닝의 경험을 기분좋게 정리하는 것은 바로 홀 서비스의 전문성인 것 같다. 혹은 진정성이랄까.
그럼 어떤게 홀 서비스의 진정성일까? 음... 나의 경우엔 내가 즐기는 이 특별한 식사를, 나 만큼이나 함께 즐겨주는 서버의 마음이 진정성인 것 같다. 혹시나 이 글을 읽는 다른 서버분들께서 이게 무슨 미친소리지? 하고 뻣뻣해진 뒷목을 문지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말해본다. 나의 즐거움에 대해서. 사실 나는 나의 제 1 적성을 홀 서비스라고 굳게 믿고 있다. 법적으로 노동이 가능한 나이가 된 이후로 스스로 더이상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8-9년을 꽉 채워 나는 늘 어딘가에서 홀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이 정말 즐거웠다.
내게 홀서비스는 내가 가까이 하지 못하는 요식업의 세계에 속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그리고 그 세계를 매일 매일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나는 내가 일하는 매장을 (웬만하면) 사랑했고, 내가 일하는 매장에서 내가 서브하는 음식들이 항상 너무 맛있어보이고 너무 훌륭하고 완벽해보였다. 배가 너무 고픈날은 손님들이 얼마나 부럽던지! 커텐으로 가려진 작은 테이블에 옹기종기 모여 메뉴도 바뀌지 않는 한솥도시락에 진라면 컵을 먹는게 현실이었지만.
그래도 나는 누군가의 식사에 내가 개입하고, 그 식사를 더 나은 경험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에 매일 매일이 즐거웠다. 내가 가장 기다리고 기대했던 순간은 “여기 뭐가 제일 맛있어요?” 라는 손님의 질문을 받을 때다. 평소에 어떤 음식을 좋아하시는지, 이탈리안은 종종 즐기시는지 몇가지 문답을 한 후에, 함께 온 사람과의 분위기나 상황을 고려해 몇가지 음식의 조합을 추천한다. 손님이 맛있게 먹었다고 한마디만 해주면 셰프도 아닌데 셰프만큼이나 어깨뽕이 생겼었다. 그런 기쁨에 참 오래도록 ‘홀'이라는 공간에서 일을 했다. 내가 사람들보다 조금 더 빨리 알게 된 맛들을 추천하는 것이 좋았고 가장 마지막에 오래 일한 곳은 세계맥주를 팔던 웨스턴바였다. 이제는 그만둬버린 나의 제1적성 홀서비스를 생각하면 내가 너무 빨리 태어났나라는 생각이 든다.
홀서비스는 내가 가장 좋아했던 일이지만, 사실 요리사가 이미 내게 가능한 선택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일이기도 하다. 아마 요리를 했다면 나도 주방에 들어가고 싶었겠지. 내가 요리사의 꿈을 한창 키우던 초등학생~중학생 때에, 나는 요리사에 대한 정보를 일간신문이나 스포츠신문에 나오는 레스토랑, 다이닝 칼럼에서 얻었다. 청담동의 레스토랑이나 특급호텔의 주방장 인터뷰가 많이 실렸고, 저명한 사람들의 추천 레스토랑으로 그곳들이 소개되었다. (기억이 불완전할 수도 있지만) 특히 1999년~2002년은 청담동에 파인다이닝레스토랑이라 불리는 엄청 비싼 식당들이 생기고 소개되던 시기였던 것 같다. 그 전엔 호텔레스토랑이 중심이었고, 호텔에서 일하던 셰프들이 독립해서 청담동에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을 만들기 시작하지 않았나 추측한다. 지금도 그곳이 파인다이닝의 메카고.
그리고 또 그 외에도 요리잡지 ‘에쎄'를 엄청 열심히 읽었다. 다른 요리잡지도 몇개 있었는데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는다. 정말 신기하게도 레스토랑 씬을 읽어내는 칼럼들에서 말하는 요리와 요리잡지 에쎄에서 이야기하는 요리는 완전히 달랐다. 에쎄는 조금 더 신세대 주부들 대상으로 예쁘고, 맛있는 요리와 살림이야기를 담았던 것 같고 ‘전문성'의 영역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에쎄에도 주부들이 참고할 수 있는 정보를 전달해주는 많은 전문가가 함께했을 테지만, 가정식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전문가로 보이지 않았던 것 같기도. 그리고 뭔가 신문엔 남성 요리사만 나오고, 에쎄에는 여성인 요리연구가들이 주로 나왔달까? 나는 언제부턴가 주방에 굳건하게 서있는 셰프보다, 카메라 앞에서 아기자기하게 음식을 설명하는 요리연구가를 익숙한 나의 미래처럼 그리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알게모르게 성역할을 구분지으며 장래희망을 그리던 그 시기에, 갑자기(는 아니겠지만) 신문에서 한국조리과학고등학교라는 전문 요리학교가 교명을 변경했다는 소식을 보게 된다. “바로 저기야!!!” 나는 드디어 내가 갈 수 있는 고등학교를 찾았다고 생각하고 엄마에게 쪼르르 달려가 소식을 전했다. 엄마는 대놓고 반대하는 의견을 내진 않았지만, 내가 충분히 영향받을 수 있는 여러가지 걱정을 공유해주었다. 뭐 친구들과 헤어져서 시흥시에 있는 고등학교에 다닐 수 있겠냐, 전문학교에 가면 편견과 선입견에 많이 부딪힐텐데 이겨낼 자신이 있냐, 요리하는걸 좋아해도 요리가 직업이 되는 건 다르다, 막 소리지르고 군대처럼 해도 재밌게 할 수 있겠냐, 제과제빵 학원 다녀서 알겠지만 맨날 요리만 하는 것도 아닐거다 등등, 그렇게 구체적인 상황이 그려지고 나니 내 대답은 “아니요, 아니요, 아니요" 였다. 엄마가 걱정하는 것 중 무엇도 자신이 없었다.
해보면 또 다를수도 있었겠지만, 그 모든 걸 다 이겨내고 훌륭한 요리사가 되는 미래가 ... 어쩐지 내 미래는 아닐 것 같다는 생각으로 그냥 뺑뺑이로 살던 동네 어느 학교에 진학했다. 이후 푸드채널을 즐겨봤으니 자주 조리과학고 학생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매번 빼앗긴 나의 미래 같았고 (한번도 내 미래였던 적 없음) 부럽기도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요리 경연 프로그램에서도 조리과학고등학교 학생들이 많이 나오고, 또 셰프님들의 인터뷰를 보다가도 조리과학고등학교 출신이라는 점에 깜짝 깜짝 놀란다. 그때 그 학교를 갔으면, 내 인생이 어떻게 송두리째 변했을 지 상상하기도 어렵다. 그리고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국사회가 이만큼이나 와서, 요리를 바라보는 시각에 변화가 있기까지.
요식업의 세계에 미련이 남아 선택한 홀서비스는 정말 내 적성에 딱 맞는 너무 즐거운 일이었다. 셰프님들의 어깨넘어로 가까이에서 음식이 만들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그 음식의 마지막 터치를 확인해 손님께 내어지는 과정을 담당했고, 무엇보다 그날 손님의 식사 경험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는데에 내 역할이 정말 중요했다. 그야말로 요리의 완성을 담당하고 있다는 듯한 책임감으로 일을 했었다.(먹을 것에 진심인 먹보는 다른 사람이 먹는 일에도 너무 진심이니까요.) 거기에 더해 내가 서빙하고 있는 음식들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 것도 내게는 너무 좋은 경험치였다. 내게 낯선 음식들을 서빙하며 음식문화의 기본에 대해서 많이 배웠다. 그게 지금 음식을 즐기며 사는데에도 큰 자원이 된다.
처음에는 한식, 중식, 양식, 일식 이런 식으로 큰 카테고리에서 모든 분야를 경험해보고 싶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한식은 다신 서빙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사람들이 쉽게 여기는 음식을 서빙하면, 그 음식을 서빙하는 사람도 쉽게 본다는 것을 금세 알게 되었다. 미스터 초밥왕 때문에 동경했던 일식 레스토랑은 결국 경험해보지 못했고 (다찌가 있는 스시야가 막 생겨날 때 쯤이라), 중식은 잠시 일을 했지만 내가 뜨거운 국물에 대해 가진 공포를 결국 이겨내지 못하고 그만뒀다. 내가 오래 일을 했던 곳은 목동에 있는 중형백화점 행복한 세상에 있던 해산물 뷔페 레스토랑 스폰지, 그리고 목동 현대백화점에 있던 이탈리안 레스토랑 본뽀스또였다.
그중에서도 본뽀스또의 경험이 지금도 많이 기억에 남는다. 거기서 일을 할 때는 학교에서 이탈리아어까지 교양과목으로 듣고 있었다. 본뽀스또는 지금 떠올려보면 평범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처럼 보이는데 당시에 내게는 너무 비싼 음식을 파는 레스토랑처럼 느껴졌다. 본점은 청담동에 있었고, 낮부터 와서 한끼에 5-6만원씩 쓰는 목동 아주머니들이 스테이크를 썰었고, 나는 도대체 저렇게 돈을 쓰려면 돈이 얼마가 있어야할까? 궁금했던 것 같다. 얼마나 격조 높았냐면... 그냥 아르바이트생이었던 나는 처음 3개월 동안은 음식과 관련된 건 건들지도 못했다. 내 일은 빈 접시를 치우는 것. 그걸 한두달 하고 나서야 테이블 기본세팅을 하게 해줬다. 3개월이 지나서야 처음으로 주문을 받을 수 있었고, 음식을 가져다드리는 건 더 이후의 일이었다. (이런 텃세가 너무 심해서, 이곳을 정말 좋아했음에도 결국엔 그만뒀다.)
2000년대 초중반 쏘렌토, 프리모바치오바치, 노리타 같은 곳의 흥건한 까르보나라가 유행을 하던 시절이었다. 주방에서 시저샐러드가 나왔다는 뜻으로 종이 땡~ 울리면, 정장을 갖춘 매니저님이 샐러드위에 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를 마구마구 갈아 올렸다. 주방과 홀이 이어지는 공간이 향긋한 풍미좋은 치즈냄새로 가득찼다. 해산물 로제파스타가 나왔다는 소리로 종이 땡~ 울리면, 서버가 앞에 서고 주방장님이 루꼴라 한줌을 잔뜩 올려주셨다. 그 접시를 들어 올릴때 퍼지는 루꼴라향. 먹어본적은 없지만 진하고 깊은 향은 매일 같이 맡을 수 있었다.
손님들은 백이면 백, 이 야채가 뭐에요? 물었고, 나는 루꼴라같은건 맨날 먹는 사람처럼 네, 이건 루꼴라에요. 로켓이라고도 불러요. 이탈리아에서 시금치처럼 먹는 채소에요. 라고 대답했다. 도대체 어디서 루꼴라를 구해서 먹을 수 있을지가 너무 고민이었던 시절, 루꼴라를 먹기 위해서라도 본뽀스또에 꼭 와서 밥을 먹겠다고 다짐하던 시간들이었다. 그때부터는 모양만 흉내낸 아무음식이나 먹고 싶지 않아졌다. 조금만 갈아도 공간을 꽉 채우는 향을 가진 치즈, 코를 가져다대지 않아도 진한 향이 올라오는 루꼴라처럼 마지막 하나까지 진짜로만 채운 음식들을 봤고 그런 걸 먹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내가 홀서빙 아르바이트를 하던 때는 물론 최저시급이 막 3,000원을 넘겼을 때였고(80년대 아닙니다 ㅠㅠ, 2000년대 입니다..), 홀 서비스라는 직무는 사실 직업의 종류로도 인정받지 못하던 때 같다. 나도 늘 직업의 개념보다는 아르바이트의 하나로 홀서비스를 선택했고. 그래서 주어지는 한계도 확실했다. 매장에서 홀서비스 담당직원이 하대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홀서버 아르바이트생이기 때문에 그 상황도 너무 거지같았다. 홀서비스는 호텔에서 일하게 될 경우에는 조금 달랐겠지만, 아마 그래도 요식업의 세계에서 가장 낮은 태도로 일하는, 그래서 어떤 사람들에겐 정말 낮게 취급되던 일이 아니었나 싶다. 지금은 그래도 홀서비스의 중요성을 많은 회사, 매장에서 인지하고 있고 전문성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많이 바뀌었다고 생각한다. (한국사회는 그래도 갈 길이 멀겠지만)
나는 파인다이닝매장이든 동네 백반집이든 언제나 홀서비스를 주의깊게 관찰한다. 그리고 서비스의 정점엔 결국 “당신이 맛있게 먹었으면 좋겠다, 최고의 식사시간이었으면 좋겠다"는 진심이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그게 파인다이닝 서비스를 받고도 형식적이거나 때론 무례한 서비스에 기분이 상하는 이유고, 동네 백반집에 가서도 감동을 맏는 이유다. 물론 두 매장은 기대받는 서비스도, 내용도, 종류도, 규칙도 다를테니 동일 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어디건 손님이 맛있게 먹든 안먹든 주어진 역할만 하고, 주어진 업무만 처리하겠다는 태도는 정말 곤란하다. 요새는 다이닝 물가가 정말 많이 올라서 한끼에 2-3만원을 호가하는 식당도 많아졌지만, 일하는 사람들이 음식과 상관없는 태도로, 고객의 식사와는 관련이 없다는 듯한 태도로 일을 하면 내 식사시간이 너무 가엾고, 돈이 너무 아깝다.
지방도시의 파인다이닝 매장에선 음식의 퀄리티에 비해 가격은 낮아서 이래도 되나 싶지만, 서비스 부분에 있어서는 너무 부족한 태도일 때도 많아 가격이 납득이 되기도 한다. 아마 기대치와 경험치의 시차에서 생겨나는 문제들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이런 문제도 다 격차에서 발생한다. 기회가 많은 도시와 그렇지 않은 곳의 격차, 경험이 적거나 많은 나이와 연륜에 따른 격차, 해외경험이나, 다이닝 경험의 빈도에서 발생하는 격차 등등. 마음이 불편해도 대놓고 불편해하지 못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래도 음식을 다루는 사람이라면 그 일의 직업윤리 중 하나가, 상대의 소중한 식사시간에 관여하고, 만족도에 책임을 갖는 일이라는 걸 잊지 않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가끔 접시를 던지듯 내던지고 화난 표정으로 다음 테이블을 향해 가는 사람들을 보면, 그냥 빨리 로봇한테 서빙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