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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래 Oct 24. 2022

단감솥밥

딸기로도 김치를 담그는 한국인인데 뭐가 무서워? 

새 천년이 시작되었고, 드디어 청소년이 되었고, 교복을 입었고, 그래서 꼬마요리사는 글렀고. 그렇게 2000년이 왔다. 나는 실력도 없으면서(!) 스스로를 꼬마요리사라고 칭하는 그런 부끄러운 일은 그만하기로 했고, 대신 늘 배움의 자세로 살기로 했다. 2000년에는 내게 두가지 중요한 사건이 있었는데, 하나는 tvN 채널 올리브의 전신인 채널F의 개국이었고, 하나는 제과제빵학원에 다니게 된 것이었다. (채널F는 곧 이름을 푸드 채널로 바꾸고, 올리브로 다시 바꿨다. 지금도 있나?)


제과제빵 학원에 다녔던 기억은 그리 좋지 않다. 정말 재미가 없었다. 3-4시간 정도의 수업시간 중 일부는 필기시험 시간이었고, 요리로 공부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던 나는 성분의 원리와 배합의 비율을 배우는 그 시간이 너무나 지루했다. 배우는 빵들은 내가 먹고 싶은 빵이라기보다 실기를 위한 빵들이었는데 처음으로 만든 빵은 당근빵이었다. 기대와 즐거움으로 가득 찬 요리 시간은 사라지고, 규칙과 통제가 가득한 실기 수업에서 난 금세 흥미를 잃었다. (그 와중에 당근이 맛있다고 느끼게 된 건 행운이다.) 


20여년 후의 나에게 요리가 주는 즐거움은 통제된 상황에서 만들 수 있는 최고의 즐거움도 포함되는데, 기다림과 원칙과 원리를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조금 일렀던 것 같다. 자격증을 따려고 수업을 듣던 대학생 언니, 오빠들은 나를 귀여워했지만 사실 난 정말 싸가지없는 어린애였고, 지금도 샤워를 하다 문득 그날들이 떠오르면 벽을 치며 그 언니, 오빠들에게 사과를 한다. 영등포까지 가서 상담을 받고 학원을 끊어준 그 시절의 엄마를 생각하면 정말 고맙고, 이게 왠 복이었나 싶은데 미안하게도 제과제빵학원은 종종 땡땡이도 치며 그저 한달이 지나길 기다렸다.


그런데 채널F의 개국은 정말 중요한 사건이었다. 집에 케이블 TV를 깔아준 아빠에게 지금이라도 절을 해야겠다고 방금 생각했다. 지금은 요리 뿐만 아니라 먹방, 여행, 뷰티도 함께 다루는 라이프스타일 채널이 되었지만 초창기의 채널F는 말 그대로 ‘요리' 만 다루는 방송이었고, 다양한 국내외의 요리사 및 요리연구가들이 나와 하루종일 레시피를 알려주었다. 그때 제이미 올리버를 만나게 된 거다. 


프로그램 명은 <제이미 올리버의 네이키드 셰프>. 중년 여성이나 혹은 남성이 정해진 레시피로, 각잡힌 요리를 선보이는 뻔한 요리프로그램들 사이에서, 찬장을 뒤져 발사믹을 꺼내고, 요리를 하다 텃밭에 뛰어가 허브를 뜯어서 씻지도 않고!!! 샐러드에 넣는 제이미 올리버의 등장은 너무나도 신선했다. 규칙과 통제를 벗어나 자유롭게 넣고 휘젓고 모양내는 요리라니! 그래도 요리사가 될 수 있다니! 더군다나 제이미는 젊고 귀여웠고, 행복하게 요리했다.


나는 제이미 올리버의 레시피를 따라하는 걸 즐겼는데 그러면서 내게 요리라는 행위가, “행복한” 요리라는 수식어를 갖게 되었다. 레시피는 참고만 한 상태로 두서없이 이것 저것 섞고, 즉흥적으로 만들어내는 요리를 따라하면서 알게 모르게 지금 하는 음식들의 기본기도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맛의 구성이라던지, 손대중의 감각이라던지. 허브의 사용이라던지. 


그때만 해도 태국음식점이라고 불릴만한 장소가 한국에 존재하지 않았을때니, 제이미 올리버가 보여주는 음식들이 얼마나 이국적이고 다채로웠는지 모른다. 또 우리 집은 꽃집이기 때문에, 타임, 로즈마리, 애플민트 같은 허브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그때 제이미 올리버가 모든 음식에 쓰던 재료중에 코리앤더와 샬럿이 있었는데 어디에서도 구하지 못해 너무 궁금했던 기억이 난다. 그 맛을 알고 프로그램을 봤으면 제이미 올리버를 그렇게까지 좋아하진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고수와는 아직도 친해져가는 중이다.)


제이미 올리버 말고도 새로운 요리사들이 많이 등장했다. 중학생이었기 때문에 당시를 정확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채널F(이후의 푸드채널)이 등장하며 젊은 요리사들이 요리사라는 직업으로 TV에 나오고, 자신의 일을 만들고 소개하는 최초의 시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때 한국 다이닝씬의 가장 중요한 매장들은 프렌차이즈 패밀리 레스토랑, 뷔페식 레스토랑이었다. 물론 호텔이나 청담동에는 지금같은 파인다이닝 매장이 있었겠지만. 그때는 음식문화의 새로운 조류를 “퓨전 요리"로 소개했다. 동서양의 조화를 의미하는 “퓨전"은 이후 여기저기 들어간 케찹이나 치즈 같은 것으로 오염된 단어가 되었지만, 그때도 컨템포러리와 이노베이티브가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기억나는 또 다른 프로그램 진행자는, 엽기가수로 이름을 날렸던 싸이(psy)의 누나, 박재은 요리연구가다. 프랑스의 이름난 요리학교인 르 꼬르동 블루에서 수학했다는 그 분은 오렌지를 잘라서 볶다가 끓여서 와인을 붓고 스테이크 소스를 만든다던지 하는 과일을 음식 재료로 활용하는 방법을 많이 보여줬다. 언제가 괴식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자기가 만든 요리를 너무 맛있다고 먹는 그 모습에 넘어가서 말도 안되는 재료들로, 말도 안되게 그 레시피들을 따라했었다. 물론 내가 만든 요리는 지옥의 맛이 났다. (그때부터 프렌치가 약간 공포의 대상이자 동시에 경외의 대상이었다. 나는 절대로 못할 요리처럼 느껴지는.)


하지만 그때 박재은님 덕분에 정말 중요한 ‘맛의 경험'을 했다. 어느날 박재은님이 알려준 레시피는 단감을 밥에 넣어 짓는 단감 솥밥이었다. 상상이 되시는지? 나는 지금도 그 요리가 원래 무슨 맛인지는 모른다. 무쇠솥과 냄비의 차이점을 알리 없는 22년 전의 나는, 주로 라면 끓이던 양수냄비에 불리지도 않은 쌀을 감과 함께 넣고 밥을 지었다. 친할머니는 나를 뜯어말렸지만, 나는 할머니에게 이게 프랑스 요리라고 큰소리를 치며 고집을 부렸다. 결과물은 처참했고, 쌀과 감은 모두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마치 바나나를 처음 발견하고 먹어본 신석기시대 사람처럼, 새로운 차원의 맛을 느끼게 된 것이다. 단감의 달콤한 맛이 은은하게 베어든 바삭한 누룽지는 튀겨서 설탕을 뿌린 누룽지와도 비교할 수 없는 맛을 냈다. 쌀의 단맛과 단감의 단맛, 살짝 누른 곡식의 고소한 맛은 우연의 조합이었지만, 이 레시피는 단감을 과일뿐만 아니라, ‘당'을 첨가할 수 있는 새로운 도구로 알려주는 계기가 되었다. 더 나아가 각각의 재료를 틀에 박힌 방식이 아니라, 재료 그 자체의 성분으로 인식하게 하는 눈을 주었다.


당시 TV에 버젓이 방영되었던 논란의 레시피를 하나 더 소개하자면 바로 초콜렛 리조또였다. 지금도 유튜브에서 제이미 올리버의 초콜렛 리조또 레시피 영상을 확인할 수 있다. 도대체 서양인들에게 쌀이란 무엇인지, 그는 버터를 넣어 쌀을 볶다가, 크림을 넣고, 다크 초콜릿 커버춰를 중탕해 밥 위에 부었다. 그때 나는 심각하게 제이미 올리버가 진짜 요리사가 맞는지, 잠시 의심했고 만나는 사람마다 아무도 관심없는 초콜릿 리조또 이야기를 하며 충격에 빠졌던 기억이 난다. 사실 최근에도 제이미 올리버의 초콜렛 리조또 들어본 적 있냐고 유튜브를 검색해서 보여준 적도 있다. (혼자 괴롭기 싫거든요.)


 지금이야 내가 바게트나 식빵에 누텔라를 발라 먹는 일이나, 그들이 볶던 쌀에 초콜릿을 붓는 일이나 아주 멀리서 보면 비슷하다고, 그렇게 볼 수 있다고 생각은 한다. 언젠가 갔던 워크캠프에서 캐나다인 친구가 맨날 쌀만 먹고 빵을 안먹어서 힘이 안난다고 투덜댔던 날도 그 충격에 초콜릿 리조또가 떠올랐었다. 그러니까,,, 이 친구들에게 쌀이란 쌀일 뿐 밥이 아닌거다. 오트밀로 만든 초콜렛 쿠키를 먹듯, 초콜릿 리조또도 그런 음식이겠지.


그때의 한국은 여행가이드북에 ‘설탕 뺀 사이다 같은 맛이 나는 탄산수를 마시는 낭패를 볼 수도 있으니 생수를 살 땐 항상 GAS 유무를 확인하라'는 주의사항이 당연하게 적히던 아주 닫힌 세계였다. 아는 맛을 옳은 맛으로 여기고, 어떤 문화권에 가든지 ‘한국음식'을 당당하게 요구하던 사회였기 때문에 아마도 다이닝의 세계는 황폐 그 자체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기대/예상과 다른 맛"을 맛없음으로 인지했고, 스스로의 입맛을 절대 의심하지 않았으니까. 요리사들도 새로운 시도를 하기엔 어려웠을 것이다. 


그때 먹고 지옥같다고 느꼈던 나의 요리들도 (물론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지금 먹으면 맛있는 요리일 수도 있다. 오렌지를 넣어 졸인 스테이크 소스는 프렌치 코스에서 단골로 나오는데 그때마다 지옥같던 나의 오렌지 소스가 생생하게 겹쳐지기도 하니까. 생각해보면 그런 밋밋한 음식의 세계에 채널F가 있었고, 그걸 보며 알지 못하는 재료와 요리의 맛을 상상하며 성장한 어린시절이 아니었다면 이 풍요로운 맛의 세계를 아주 늦게야 깨달았을 수도 있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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