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래 Aug 15. 2023

엄마, 제발 엄마다운 엄마를 해주면 안 돼?

엄마 되기에도 적성이 있겠지  


얼마 전 친구랑 대화하다가 “엄마의 엄마가 되어줄 수도 있겠단 생각을 했어.” 하고 가볍게 말을 꺼냈다가, 사색이 된 친구의 표정을 보고 말았다. 친구는 정말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내 손을 잡아주며 말했다.


“소민아.. 엄마가 혼자가 되셨어도, 너가 엄마의 인생을 책임져야 하는 건 아니야.”

“너가 딸이라고 희생을 다짐할 필요는 없어.”


띠용. 잠시 벙쪘던 나는 크게 웃었다. “아니 아니, 나는 희생할 생각은 없고. 음 뭐랄까? 우리 엄마랑 나랑 놓고 보면 전형적인 엄마 역할에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이 나야! 엄마보다 내가 엄마역할이 적성에 맞거든.”


나에겐 오히려 삶에 가벼움을 주었던 생각들이 친구나 주변 사람에겐 충격으로 느껴지는 일이 종종 있는데 이번에도 내가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고 말을 꺼낸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에게 엄마의 엄마가 된다는 생각은 끝없는 희생, 혹은 연민, 의무감, 굴레, 욕망, 투영, 조종 같은 … 이상하게도 모녀관계라는 단어에 따라오는 수많은 감정의 스펙트럼 속 단어와 연결되지는 않았다. 누군가를 꼼꼼히 살피고, 센스 있게 챙기고, 어떤 상황을 대비하고, 마음을 표현하고, 소중한 것을 가져다주는 것을 즐기는 사람으로서의 나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가족과 함께 살 때는 몰랐던 나의 모습이었다. 혼자 살아보니 나는 마치 TV 드라마에 나오는 전형적인 엄마처럼, 사람들에게 밥은 먹고 다니냐 묻고, 집에 오면 밥공기에 꾹꾹 눌러 밥을 내고, 찌개와 국을 함께 끓이고 냉장고에 있는 온갖 반찬을 꺼내 상을 차리며 만족감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그걸 받는 사람의 마음을 굳이 헤아리지 않았다는 점도 너무나 똑같다.


엄마라는 역할에 적성이 있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으면 어땠을까?


우리 집은 어린 시절 꽃집을 했다. 호황기였던 그 시절 우리 집은 상당히 규모도 큰 꽃집을 하고 있었고, 아침 8시부터 밤 12시까지 너무 바빴다. 90년대의 어린이들이 대부분 그랬듯 나도 장사하는 다른 집의 어린이들과 어울리며 애들끼리 컸다. 골목에서 우리끼리 놀고, 동네의 위험한 구석을 탐험하고 (아파트 기계실이나 어린이들만 들어갈 만한 숨겨진 골목 같은 곳들) 걸어서 4분 거리의 초등학교까지 가는 길을 실내화 주머니를 까먹거나 준비물 가방을 놓고 와서 두 번 세 번씩 왕복하며 등교했다. 학교와 (꽃)집이 너무 가깝고, 그곳에 가면 언제나 엄마가 있었기 때문에 엄마의 빈자리를 느끼며 크진 않았지만 나는 엄마가 나를 더 챙겨주길 간절히 바랐다.


고작 4분 거리니까 후다닥 뛰어와도 되지만, 고작 4분 거리니까 비가 오면 엄마가 우산을 들고 데리러 와주길, 나는 집에 가는 길에 횡단보도를 건널 일이 없지만, 엄마는 어느 날 초록 앞치마를 하고 학교 앞 횡단보도에 서있길 바랐다. 가끔은 준비물을 챙겨 학교로 가져다주길, 선생님하고도 자주 만나길, 소민이 이야기를 더 많이 나눠주길. 하지만 꽃집은 너무 바빴고, 저학년이었던 내가 학교를 마치고 비를 맞으며 집에 오면 엄마는 벌써 그런 시간이 된지도 모른 채 일을 하다가 밥때를 놓친 직원들의 식사를 챙겨야 하곤 했다. 그러다 곧 친할머니와 함께 살게 되었고, 나를 챙기는 여러 가지 자잘한 일들은 친할머니에게 넘어갔다. 우리 초등학교는 급식을 느지막이 시작해서 꽤 오랫동안 도시락을 싸다녀야 했는데, 그 일은 할머니가 맡게 되셨다. 이후 고부관계의 전개 양상에 따라 내 도시락을 엄마가 싸주는 날도 있었는데 나는 할머니가 싸주는 도시락을 훨씬 좋아했다. 아직도 이유를 모르지만, 엄마는 내 반찬통에 단무지와 김치만을 넣어주는 일이 많았고, 계란물을 입힌 소세지를 싸주는 사람은 할머니였기 때문이다.


엄마들이 늘 그렇듯 우리 엄마도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자주 우기는데 그중에 하나는 ”나는 진짜 좋은 엄마야. “라는 주장이다. 엄마가 나쁜 엄마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때때로 엄마가 싸준 며칠 째 같은 김치, 단무지 도시락을 열며 친구들에게 야유를 받기도 했던 나는 그런 순간마다 ”엄마가? “ 라며 되받아쳤고, 한 번도 인정해 준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오랫동안 나에게 ‘전형적인 엄마’ 자리는 비어있었고, 나는 엄마가 하루라도 내게 전형적인 엄마가 되어주길 바랐었다. “좋은 엄마”는 전형적인 엄마가 들을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독립을 하고 내 공간이 생기고 그 공간을 ‘집’이라는 장소로 만들어 가며 나는 점점 더 엄마랑 달라졌다. 나의 선택은 주로 전형적이었던 친구들의 엄마를 따라 하곤 했다. 꽃무늬가 이쁜 찻잔 세트를 사고, 80-90년대 중산층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빈티지 가구를 들여놓고, 아랫단에 울긋불긋한 꽃무늬와 레이스가 달린 주방용 수건을 걸고, 실내화를 신고 다녔다. 가끔 엄마는 우리 집에 와서 남의 집 같은 그 낯선 분위기에서 “너랑 나랑은 정말 다르다.” 같은 이야기를 꺼내곤 한다.


나는 이제 엄마가 “좋은 엄마”임을 안다. 우리 엄마는 전형적이지 않았고, 그래서 그 모습 그대로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었다. 자신의 욕망을 투영하거나 자식의 성취를 놓고 닦달하지 않고 분리된 상태로 바라봐주려고 애썼다. 무관심한 듯했지만, 실수할까 봐 두려웠을 것이고 한편으로는 아등바등 살 필요 없게 상황을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시행착오도 있고 연습할 기간도 필요했지만 나를 키우던 엄마는 지금의 나보다 훨씬 어렸기에 그 모든 순간이 노력과 고민의 순간이었음을 이제는 알고 있다. 엄마는 이제 스스로를 “좋은 엄마”라고 우기진 않고 “다른 엄마”라고 표현한다. 엄마, “다른 엄마”라 고마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