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ssorim Mar 22. 2016

핫 초콜릿과 소녀감성.

_베를린, 그녀와 나의 벨기에 초콜릿.


카카오. 초콜릿. 핫 초콜릿. 꿀꿀한 날의 진득한 핫 초콜릿 한잔으로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행복의 위안을 얻을 때가 있다. 오늘과 같이 한없이 기분이 내려앉는 날의 밤이면 나는 핫 초콜릿 한잔을 끓이다 지난 겨울 마셨던 쌉쌀한 카카오 음료를 떠올렸다. 벨기에 정통이라던 베를린에서의 그 '핫 초콜릿'과 '사랑스럽던 그녀'를.


Kaschk, Mitte

_

베를린 중심부인 미떼 지구에서  마음먹고 벨기에 정통 초콜릿 가게를 찾아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때의 나는 왜 그리도 그 가게가 궁금했을까?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스쳐가게 말했을 뿐임에도. 아마도 그저 그녀를 놀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곳에 그녀가 한눈에 반해버린 사람이 있다는 말에.


어느 취기 어린 밤, 우리는 그 가게 앞을 함께 스쳤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곳이 어딘지를 또렷이 기억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날 밤 걸었음직한 그 넓지 않은 범위에서 '벨기에 정통 초콜릿'을 파는 가게를 찾아내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구글 지도를 몇 번 뒤적이니 맞을 법한 가게를 찾을 수 있었고, 그곳은 내가 머물던 '서커스'라는 이름의 호스텔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괜찮은 식당이라고 친구가 일러주었던 곳을 지나쳤고, 며칠 전 밤 내가 심야 영화를 보기 위해 영화관을 가던 길과 같은 거리를 지났다.


베를린의 거리.


가는 길에 오래된, 반지하의 요리 서적 가게에 들렀고 그곳에서 나와 몇 블록 가지 않아 보이던 간단한 간식거리를 파는 슈퍼마켓에서 왼쪽으로 돌아보니 며칠 전 그녀와 내가 스쳤을 법한 초콜릿 가게가 나왔다.



하얗고 높다란 문을 넘어 내가 가게에 들어서니, 그녀의 설명과 정확히 일치하게도, 가게의 주인으로 보이는 구불거리는 긴 머리를 뒤로 단정히 묶은, 꼭 같이 구불거리는 콧수염을 가진 남자가 가게 내부에서 한국에서는 중국집에서나 붙여있을 법한, 그러나 다분히 이국적인 분위기의 나무 발 사이를 '미끄러지듯이', 아주 유연하게 빠져나와 나를 맞이했다. 미끄러지듯이 유려한 그의 말솜씨는 정신없이   굴러내려갔고 나는 어느새 생 카카오 열매와 볶은 카카오 열매를 그와 함께 맛보고 있었다. 그를 조금 멀찍이서 관찰할 수 있게 되었을 때에는, 이미 내가 매주 토요일 오후에 있다던 유료 초콜릿 강습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나서 핫 초콜릿 한잔을 주문하고 난 후였다.


우연히도 그는, 그녀와 내가 함께 알고 있는 '누군가'와 비슷한 기운을 풍기는 사람이었다. 부끄럽게도 그 이유 때문에 그에게 반해버린 건지도 모른다고 내 친구는 소녀와 같이 웃었었다. 그리곤 내가 가서 직접 확인해야겠다는 말에 손사래 치며 얼굴을 붉혔었다. 실로 그가 처음 미끄러지듯 나오는 바로 그 모습에서부터, 나는 이미 그 비슷한 기운을 눈치챌 수 있었다.


Kaschk, Coffee and Bar.


삼십대 초반의 그녀는 소녀와 같이 이제는 없을 줄 알았던 첫눈에 반하는 사람을 마주했다고 우리가 세번쯤 함께 했던 바의 높다란 의자에 걸터앉아 말했었다. 그녀보다 열살 이상 어린 나도 앞으로는 첫눈에 반하는 일은 잘 없지 않을까 하는 소녀스럽지 않은 소녀가 되어버린 후였다. 그런데 그런 그녀의 소녀같은 모습에 나는 조금은 신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연스러운 일이라 여겼다.


처음 그를 마주하던 날의 그녀 역시 내가 머물던 그 호스텔에 머물고 있었고 우연히 그 가게를 보았다고 했다. 그녀가 그 앞을 지나쳤을 때에는 아직 가게가 제대로 문을 열지 않았던 때였다고 말했다. 정리가 미처 되지 않은, 무엇을 파는 지 알 수 없는, 아마도 인테리어 용품 가게일 법해 그녀는 조심스레 그 공간에 들어섰고 아무도 서있지 않은 쇼케이스 앞에서 잠시 기다렸다고 했다. 그런 추운 베를린의 어느날, 그는 여느 때와 같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미끄러지듯 사무실에서 그녀의 앞으로 나왔고, 그에 그녀는 마치 순진한 수줍은 초등생으로 돌아가 어버버하며 말을 제대로 건넬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둘은 꽤나 긴 이야기를 나눴고 왠지 모를 두려움의 두근거림에 그 뒤로 한 네 달 쯤은 그 가게에 다시 갈 수 없었다고 그녀는 말했다.



나도 어느 날의 나를 떠올렸다. 내가 나의 '그'를 본지 한두 달쯤 지난 후였을 것이다. 이미 그가 있는 줄 알고 있던, 아니 그가 일하는 날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맞다면 그가 서있을 것이 분명한 가게에 들어섰다. 아, 오늘은 아니구나 하는 찰나에 저 뒤편 창고에서 무언가를 정리하는 그를 볼 수 있었다. 나는 주뼛거렸고 그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안녕이라는 말을 건넸다. 마치 그가 나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잠시 마주한 손님에게 인사를 건네듯이.


아마 그때의 내 얼굴엔 그녀와 같은 미소가 어렸으리라. 그러했으리라.


_

그녀의 소녀 같음에 나도 내 이야기를 건넸었다. 우연이 필연과도 같이 느껴져 잠시 소녀 같아졌던 순간에 대해 즐겁게 이야기했다. 우리는 끊임없이 맥주를 홀짝였고 내가 그녀의 스파이가 되어 그 가게에 자주 들락거려볼까 하는 실없는 농담에 자지러지듯 웃곤 했다. 세상에서 가장 꾸밈없는 커다란 웃음을 짓곤 했다.



그렇게 그 밤의 이십 대와 삼십 대의 소녀들은, 우리 모두가 영원히 소녀일 것임을 깨달아 기뻤다.



맥주를 홀짝이던 바 테이블.


    Belyzium Artisan Chocolate


한편 그녀가 첫 눈에 반한 사람이 있던 그 가게는 평온했다. 마음을 따스하게 만들어주는 곳이었다. 그의 초콜릿은 나와 우리가 아는 그런 진득하고 달콤한 초콜릿은 아니었고, 대신 '쌉쌀한 이루어지지 못한 설렘의 맛'의 핫 초콜릿이었다.


그날과 다른 날과 오늘의 핫 초콜릿이 그와 그녀와 나의 그날과 진한 검은빛의 안락함을 내게 건넨다. 여느 날의 두근거리는 불안의 밤에도 나는 여느 때와 같이 핫 초콜릿 한잔을 손에 들고 있겠지. 그리고 그 추억에 소녀와 같은 미소를 짓고 있겠지.


Belyzium Artisan Chocolate






매거진의 이전글 가이와 초콜릿 비스켓.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