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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ssorim Mar 24. 2016

베를리너 파리지엔느.

_베를린, 비오는 밤의 예거 마스터.


_비오는 날의 기억.


그날과 꼭 같이 주룩주룩 비가 내린다. 아주 오래간만의 시원한 장대비이다. 빗방울은 거세다 못해 땅바닥을 힘껏 내리쳐 튕겨져 올라 나의 신발 앞코에 가득히 물방울로 맺힌다.


그날과 꼭 같이 비가 아끼는 구두를 흠뻑 적신다. 이번에는 나의 검정 구두를 흠뻑 적셨다. 지난번에는 나의 갈색 구두를 흠뻑 적셨었다. 그는 내가 제일 아끼는 구두였다. 지금도 제일 아끼는 구두, 아끼다 못해 늘 신발장에 얌전히 놓여있는 구두이다. 그 비를 맞던 날 나는 그날 처음으로 마주한 누군가와 함께였고,


우리는 독일의 베를린에 있었다.


베를린의 거리.


_

어느 유명한 영화배우와 꼭 같은 애칭을 가진 '리오'는 프랑스인 특유의 심술궂은 표정으로 호스텔의 커다란 다이닝 테이블의 내 대각선 자리에 앉아있었다. 마음을 닫고 앉은 심술궂은 표정이라 짐작했는데, 알고 보니 갖고 앉은 맥북 화면 속의 숫자와 돈과 그에 당혹스러움에 의한 스쳐가는 찌푸림이었다. 알고 보니 지나치게 유쾌하던 그녀. 그녀는 프랑스의 보르도에서 왔다고 했다. 내가 알던 영국의 캠브리지에서 온 찰리가 으레 '공부 잘하나 보구나'라는 말을 듣듯이 그녀도 으레 '좋은 와인을 많이 마셔보았겠구나'하는 따분한 첫인사를 많이 들었다고 말했다.


까만 다운재킷에 까만 스키니진을 입은 리오와 검은 코트에 검은 스타킹을 신은 내가 우리가 함께 묵던 베를린의 호스텔 앞 거리를 걸었다. 누가 먼저였지? 맥주나 한잔 하자는 제안이 있었다. 비는 꼭 오늘과 같이 주룩주룩 퍼부었고 우리는 우산이 없었다. ATM기를 찾아 헤맸고 또다시 빈자리가 남아있는 노이쾰른의 번듯한 바를 찾아 헤매다 결국 우스꽝스러운 빨간 술집을 찾아 들어섰을 때, 우리는 온통 흠뻑 젖어있었다. 내가 아끼던 갈색 구두도 흠뻑 젖어 물기를 가득 머금어 있었다.



노이콜른의 마담 클라우드. 라이브 공연이 있는 독특한 컨셉의 바이다. 붉은 등 아래서 책을 읽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나보다 단 한살이 많았던 단 스물셋의 그녀는 이미 조기졸업을 하고 정말 하고 싶은 분야의 일을 하는, 그래서 당분간은 페이가 없어도 괜찮다고 말하던, 많은 이들이 탐내는 독일 베를린에서의 인턴 자리를 얻어있었다. 그래픽 디자인을 한다는 그녀의 말에서의 '그래픽 디자인'이 잘 다듬은 대리석 마냥 윤이 나서 탐이 났었다. 아니 탐나기보다 부러운 마음이 빗물과 함께 뚝뚝 떨어졌었다. 공교롭게도 그녀의 남자 '쌍둥이' 형제도 내가 탐내던 빛나는 사람이라고 했다. 반해버린 무지개의 나라 남아공에서 학교를 졸업하는 대로 무언가 멋진 일을 벌일 것을 계획하고 있다고 말했다.


좋아하는 일에는 백프로라 말하던 그녀의 또렷한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그를 발견한 행운과 또 하나, 그녀의 빛나는 재능이 반짝였다.

_



그날의 갈색 구두와 같이. 오늘의 튀어 오르는 물방울에 축축해져 버린 나의 검정 구두와 같이. 나보다 저 앞에 선 사람의 빛나는 눈동자를 마주해 앉으니 나의 기분은 왜인지 흠뻑 젖어 축축해왔다. 그 밤 생각했었다. 그 여행에서 생각했었다. 나는 내가 잘 해내고 있다고 믿었다. 아직 젊다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고, 내 나이에 모험을 하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는 '한참을 먼저 가버린 사람'의 부러움에 으쓱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때로는 나도 그 먼저 간 누군가처럼 낯선이의 반짝임 앞에서 눅눅해져 버릴 수 있음을 깨달았다.


많이 슬프지는 않았다. 그녀와 나와 그의 속도가 다른 것 뿐이었기에. 비어 가는 저마다의 술잔과도 같이. 그날 밤 누가 더 많은 맥주잔을 비워냈을까. 나는 맥주를 빠르게 마신다. 그러나 우리는 돌아가며 한 번씩 맥주를 샀었다. 빨간 술집의 깊숙한 푹신한 소파에서 우리는 축 늘어져 생기 있는 이야기를 나누었고 예거 마스터에 얽힌 에피소드를 들려주던 그녀는 예거밤 이야기를 지나 나에게 예거 마스터 샷을 사주고 싶다고 했다. 그 밤 우리가 잔을 비우는 속도는 달랐다. 그러나 쌓인 잔은 같았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빙그레 사악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가 들고 온 두개의 감기약 내음이 이는 진득한 검은 샷잔을 동시에 들이켰다. 그리고 웃었다.


그날 밤의 술판과도 같이. 언젠가 그녀와 나와 그가, 서로 다르지만은 똑같은 양을, 그 같은 만큼을 들이켜내기를 바랐다.



베를린의 키치한 건물 외벽 콜라주. 그리고 그래피티.
우연히도 왁싱 가게의 이름이 리오였다. 물론 그 밤의 리오의 이름은 'LEO'였지만!


그렇게 다시 빗방울은 먼길을 돌아 오늘이다. 아끼던 구두가 축축이 젖는 것이 왜인지 견딜 수 없었다. 왜인지 마음이 아팠다. 비단 구두 때문만은 아니었을까. 나는 먼길을 나서던 발걸음을 돌렸고 돌아온 구두는 빗물을 씻어낸 뒤 다시 보송해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덕분에 오래전 밤만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날도 마음이 아팠다. 나와 함께 지구 반 바퀴를 돈 아끼던 구두가 젖어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그날 처음 본 반짝이던 그녀 덕에 나는 참을 수 있었나 보다.



눅눅해진 구두는 결국 다시 마르기 마련이었고 그 덕분에 좀 더 낡은 나의 구두는 또 하나의 이야기를 담았다.


다시 빗방울이 나의 위로 튀어 오르는 날 나는 또다시 그 밤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그때쯤이면 또 다른 비 오는 밤의 기억이 덧입혀져 두터워진 추억을 꺼내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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