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멜버른, 달콤한 초콜릿 향의 기억으로 남아주기를.
유명한 영화 '맨 인 블랙'의 패러디는 아니다. 'Guy in Black, ' 'Man in Black'이라는 말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정으로 뒤덮인 한 남자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물론 여기에서 '가이'는 '남자'라는 뜻을 가진 영어 단어가 아니다. 이는 내가 멜버른에서 만난 '가이'라는 남자의 이름일 뿐이다. 친구들은 그의 이름을 가지고 자주 농담을 하곤 했고 그 역시 자신의 이름을 가지고 하는 말장난을 즐겼다. 가이는 아이리쉬계 특유의 검은 머리칼에 때로는 검은 비니를 눌러썼으며 언제나 까만 티셔츠에 까만 바지를 입고 기다란 검정 목양말 위로 낡은 검정 닥터 마틴 워커를 신은 남자였다. 때때로 그의 웃옷에는 짙은 녹색만이 섞여 들고는 했지만 그의 늘 매는 중간 크기의 크로스백 마저도 검은빛을 띠었다. 그는 말 그대로 '검은색의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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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내가 살던 쉐어하우스로 이사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아래층에 있던 세탁기에서 이제 막 세탁물을 꺼내오던 그는 역시나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정의 차림을 하고 투덜거렸다. 자신의 빨래에 하얀 보풀이 묻어 나왔다는 것이다. 세탁기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냐 물었다. 나는 뭔가 흰 것을 같이 넣어 빤 것이 아닐까라는 말을 무심코 던졌다, 어쩌면 흰 수건 같은? 그러자 그의 두 갈색 눈동자가 나를 아주 강렬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곤 무게를 실어 말했다.
화가 난 듯한 그 한 마디 후 그의 갈색 눈동자 위로 자리한 두 검은 눈썹은 꿈틀거렸고 그는 특유의 커다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엄청난 콧대에 조금 긴 편인 인중 그리고 날렵한 턱선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얇은 입술은 기다란 온화한 미소를 만들어 내었다.
그를 처음 만나던 날을, 나는 아직도 분명하게 기억한다. 나는 걸어서 삼분 거리인 동료의 커다란 집 겸 창고에서 열리는 '타코 나잇'에 초대받았었다. 여덟 명 남짓의 사람들이 모였다. 어둑어둑한 밤거리를 걸어 동료 커플이 사는 커다란 창고에 다다랐고 그 뒤편으로 가자 따스한 불빛이 뿜어져 나오는 작은 문이 있었다. 자그마한 레몬 나무와 커리 나무가 있는 안락한 그곳에 먼저 도착한 나는 커다란 장작을 때는 철제 난로 앞에서 몸을 녹이고 있었다. 밖은 꽤나 쌀쌀한 날씨였다.
이십 분 전 내가 들어왔던 그 따뜻한 입구의 문이 열리고 기다란 사람이 들어왔다. 굳이 설명하자면 일본 만화 '원피스'의 상디와 같은 모습이었다. 검정 비니, 검정 코트, 검정 일자바지, 커다란 닥터 마틴 워커를 신은 190센티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깡 마른 남자가 그 문으로 들어왔다. 그는 크로스백을 턱 내려놓았고 성큼성큼 그 긴 다리로 난롯가로 다가왔다.
사실 그 저녁, 나는 초대한 동료들과 '동료와 친구의 사이'에서 길을 잃고 있었다. 그 타코 나잇은 그들과 그들의 오랜 친구들과의 자리였고 이제 막 그들의 삶을 엿보기 시작한 이방인인 내가 비집고 들어가기에는 촘촘했다. 켜켜이 쌓인 그 세월의 틈에 비해, 나는 너무도 작았고 본래 엄청나게 사교적인 사람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 저녁의 나는 나의 모든 외향을 끌어 '누구와도 잘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를 바랐다. 그런 나의 노력들이 우리들 사이의 언어의 장벽을 조금이나마 좁혀 주기를, 마음의 거리를 조금이나마 줄여 주기를 바라며 버거운 마음으로 그 창고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런 움츠린 작은 나에게 갑자기 커다란 손이 날아왔다. 그 커다란 손이 나온 검정 코트의 소매자락을 따라 올려다보니 이제 막 비니를 벗어 부스스한 머리칼을 반대편 손으로 매만지는 검은 남자가 보였다. 흔한 호주식의 인사였다. 성큼성큼 걸어와 손을 내밀며 '만나서 반가워, 난 가이라고 해!'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뜨던 나는 그의 손을 잡아 흔들었고 그의 손이 얼음장과 같았음에 또 한번 놀랐다. 바로 그다음 순간 그는 사과했다. '미안, 내 손이 이렇게 차가운 줄 몰랐네. 손 시렵게 해서 미안'이라고 그는 커다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는 검은 남자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이 모두 검었다. 그 저녁 그의 손은 차가웠다. 추운 밖에서 한참을 자전거 핸들을 잡고 있던 그의 손은 시리게 차가웠다. 그러나 나는 그의 따뜻한 눈을 보았다. 그의 순수하게 빛나던 갈색 눈동자를 보았다. 비록 그의 손은 찼으나 나를 바라보며 경쾌하게 인사를 건네던 그의 눈은 긴장해 얼어있던 나를 포근하게 녹였다. 그곳의 내가 더 이상 홀로 떠있는 외톨이가 아님을 가만히 알렸다. 나를 잡아 내리 끌어준 힘 있는 커다란 손과 안락한 미소였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동네 술집에서 열리는 무료 공연을 보러 갔다. 월요일 밤의 Northcote Social Club에서는 무료 라이브 공연이 열렸다. 그곳으로 향하는 길 나는 내가 준비했던 소박한 비스킷을 꺼냈다. (호주식 영어에서는 쿠키 대신 비스킷이란 단어를 쓴다) 모두에게 건넸다. 완전한 채식주의자이던 그는 코를 킁킁거리며 경계의 눈빛을 보냈지만 나는 그가 먹지 못하는 것은 전혀 넣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비스킷'이라 말했다. 아니 적어도 '지난 6개월간 먹은 것들 중 가장 맛있는 비스킷'이라 말했다. 캄캄한 밤의 날씨는 쌀쌀했고 동네의 골목을 따라 조그만 나와 창고에 사는 동료, 길 건너 창고에 사는 커다란 알래스카에서 온 루카스, 웹디자이너 퍼루와 꺽다리의 까만 가이가 걸었다. 조심스레 건넨 초라하던 나의 비스킷이 그 밤하늘의 별과 같이 빛났다. 아니 적어도 나의 기분은 장마철 땅에 튀기는 거센 빗방울만큼은 튀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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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나는 가이와 몇 번을 더 마주했고 내가 호주를 떠나기 한 달 전쯤 그는 내가 살고 있던 집에 이사를 왔다. 그는 나를 처음 마주하자마자 그 밤의 비스킷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는 그 맛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고 마침내 그가 그를 세 번째 언급했을 때에의 나는 그 비스킷을 구워냈다. 그렇게 세 번이나 이야기한 건 만들어달란 무언의 압박이 아니었느냐 말했다. 그 농담과 함께한 나의 웃음에 그는 어떻게 알았냐는 까만 웃음으로 답했다.
나는 그 까만 가이를 좋아하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 감정에 빠지기에는 우리가 마주한 시간이 너무 적었고 그에게는 아마도 이미 오래된 파트너가 있었다. 그러나 지극히 나의 기준에서 정말로 이상적인 이성상이라 생각했다. 특유의 그 친절한 대화 매너는 그가 영문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했고 언제나 눈을 빛내며 조근조근 설명하는 말투는 후에 교수나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그의 꿈에 꼭 들어맞았다.
언제나 까만 옷을 입었다. 드럼을 치고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불렀으며 세 개쯤의 밴드에 속해 있었다. 알고 보니 영상을 만드는 필름 메이커이기도 했다. 그가 하는 공연에는 그가 만든 영상이 깔렸다. 그러다가는 영문학과 영화학 박사 과정을 밟는 대학원생이며 학업을 마치면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말을 했다. 왠지 '호밀밭의 파수꾼'과 같은 책을 붙잡고 강의를 하다가 종이 울리면 이번 주말에 내가 하는 락 공연을 보러 오라는 말을 던지고 교실을 나가는 그의 모습이 상상되었다. 이따금 한가할 때면 즉흥적으로 피아노를 쳤고, 때때론 온통 까만 락스타 같은 차림으로 자전거를 끌고 나와 그완 어울리지 않는 '주립 도서관'에 일을 하러 간다며 집을 나섰다. 비건으로 완전 채식을 시작한 지 5년째가 되었다는 금욕적인 모습을 보여주다가도, 하이 상태가 되어 나무에 기어오르다 심하게 긁혔다며 다친 팔을 내게 들이밀기도 했다.
이상한 가이에게, 작별의 편지를 적을 만큼 애틋하지는 않던 가이에게, 내가 마지막으로 남긴 것은 소름 끼치게 그와 닮은 간결한 일러스트를 곁들인 초콜릿 비스킷의 레시피였다. 이미 마지막으로 그와 나의 하우스 메이트를 위해 쿠키를 구워낸 후였다.
_초콜릿 비스켓의 레시피.
나는 링클레이터와 샐린저를 좋아하는 그가 영원히 까만 사람으로 남기를 바랐다. 언제나 새로 만나는 사람을 놀래키는 뒤죽박죽인 그의 자유로운 삶을 언제고 유지하기를 바랐고, 누구에게나 다정스레 눈을 맞추고 이야기하는 포근함과 움츠러든 낯선이에게도 따뜻한 손을 내미는 다정함이 영원하기를 바랐다.
끝으로 그의 커다란 웃음과 닳고 단 닥터 마틴 구두가 언젠가 다시 만날 그와 여전히 함께이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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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가이.
달콤한 초콜릿 비스켓 향으로 나를 기억해주기를.
너는 여전히 그곳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