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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ssorim Feb 24. 2016

미드나잇 인 베를린. #1

_베를린, 오래된 남편과 아내.


오늘의 밤에 나에게는 한잔의 와인 혹은 한잔의 진토닉이 절실했다. 나는 꿈결 같던 지난 겨울 베를린에서의 자정이 그리웠고 그날과 같이 단돈 일유로의 병맥주를 사들고 베를린의 밤거리에 걸터앉아 바로 '너'와 그 술병을 함께 기울이고 싶었다.


_

우리는 오래된 남편과 아내였다. 나는 남편이었다. 나는 밖에 나가 돈을 벌어왔고 이르면 네시, 늦으면 한밤중이 되어야 집에 돌아왔다. 철커덕 끼이잉. 별다를 방범 장치가 없는 단 하나의 문을 열고 기다란 복도를 지나 부엌에 들어서면 너는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 탐스러운 곱슬머리를 어깨에 가만히 널어두고 조그마한 와인잔을 손에 쥐고 있었다.


너는 부인이었다. 너는 집에 남았다. 때로는 요리를 했다. 자리를 비울 때에는 자그마한 오밀조밀한 덮개를 덮은 너의 음식들이 너의 빈자리에 주린 나의 배를 채우기 위해 식탁 위에 올라앉아 너를 대신했다. 너를 대신해 나를 기다렸다. 나는 너의 그 초록색 커리와 한 덩어리의 퀴노아 그리고 오븐에 그을려 쭈글쭈글해진 야채들을 맨손으로 집어 한입에 쏙 넣고는 했었다.


너와 나의 주방.

그녀와 나는 같은 셰어하우스에 살고 있던, 단 둘이 살고 있던 '하우스 메이트'였다. 우리는 그렇게 짧았지만 길던 따스하던 날들에 서로가 '남편과 아내'같다며 실없고 온화한 농담을  주고받았었다.

_


지난 겨울 한동안 헤어졌던 너를 만났다. 반년여 만에 다시 너를 만났다. 다시는 만나지 못할 줄 알았던 너와 나. 우리가 함께 살았던 곳은 호주의 멜버른이었다. 수많은 밤 함께 술잔을 기울이고 새벽까지 끊임없이 이어지던 우리들의 이야기는 먼 바다를 건너 독일의 베를린에서 계속됐다. 너는 바로 전날 아침 내가 다녀왔던 카페의 내가 앉았던 꼭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우리는 어색했다. 서로가 어색한 것이 아니었다. 너와 내가 남반구가 아닌 북반구에 있다는 것이 어색했다.


술자리는 무르익었다. 나는 네가 남긴 피자 한 조각을 먹었고 우리는 사이좋게 진토닉을 한잔씩 비웠다. 너는 '너의 베를린'을 보여주겠다고 말했다. '나의 베를린'을 만들기 이전에 '너의 베를린'을 한번 살짝 들여다보라고 말했다. 늦은 저녁 혹은 이른 밤 우리는 카페를 나섰고 하얗고 커다랗던 베를린의 밤거리를 헤맸다.


그날의 너는 꼭 한번 해보고 싶던 일이 있다고 말했다. 베를린에 산지 다섯 달이나 되었지만 아직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이라 말했다. 베를린에서는 길거리에서 술을 마실 수 있다. 퇴근하는 직장인들은 홀로 돌들이 깔린 거리를 걸으며 한 손에는 맥주병을 쥐고 있다. 그들은 걸었다.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이따금 발걸음을 멈추고 맥주병을 들어 올려 지친 목에 맥주를 부었다.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지하철에 앉아 맥주를 들이켜곤 했다. 실은 그들의 모습은 우리네의 술집 앞에서 소주를 들이켜는 누군가의 모습과는 조금 달랐다. 아니 적어도 내게는 다르게 보였다. 맥주가 소주보다 그 쓰기가 덜하듯 이방인인 나의 눈에 조금은 덜 쓰라린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렇게 베를린에서의 맥주병은 자유를 말하는  듯했고 아주 엄격하게 공공장소에서의 음주가 금지된 '호주'에서 십오 년을 산 그녀는 같은 호주에서 366일을 지낸 나에게 길거리에서 병맥주를 마시자는 제안을 했다. 우리는 슈퍼마켓에 들어섰고 음료 냉장고에 빼곡한 알 수 없는 알록달록한 맥주들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그림이 있는 병을 하나씩 골랐다. 가격을 묻자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남짓의 값이 카운터에서 들려왔다. 아무것도 아닌 것만 같던 돈을 냈고 병뚜껑을 열 수 없던 우리는 당황의 표정을 가게 주인에게 지어 보였다. 그 순간 우리를 바라보던 그의 손가락은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가게 입구의 벽을 가리켰고 그곳에는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병 오프너가 걸려있었다. 그 바로 아래의 커다란 파아란 쓰레기통에는 셀 수 없는 병뚜껑들의 무덤이 있었다.


그 모든 것이 너무 우스웠다. 너무 즐거워 우스웠다. 우리는 서로를 향해 싱긋 웃었고 베를린의 밤거리를 향해 맥주병을 든 손을 내밀었다. 힘차게 걸었다. 두 걸음 남짓 떼었을까? 우리는 여전히 온전한 베를리너가 되지 못하고 있었다. 맥주병을 든 손을 감춰야만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무언가 죄를 짓는 듯한 괜한 죄책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우리는 까맣던 그녀의, 짙은 푸른빛이던 나의, 그러하던 우리들의 기다란 코트 자락에 맥주병을 감추는 시늉을 했다. 그리곤 커다랗게 웃었다.


베를린의 겨울 나무.


한때의 일명 '남편과 아내'는 이제 다른 대륙에서 다시 모여 범죄를 저지르는 '국제 조직의 일원'이 된 기분이었다. 그에 사악한 시원한 웃음을 지었다. 너와 나는 그 베를린의 취기 어린 밤거리를 시원하게 쏘다녔다. 그리곤 이제는 기억할 수 없는, 끊임없는 이야기를 나눴다. 멜버른의 부엌에서부터 이어진 대화였다. 너의 동생이 어릴 적 궁둥이를 난로에 덴 이야기, 나의 태어난 해가 너무나 운명 같게도 네가 너의 나라를 떠난 해와 같다는 이야기, 너와 나의 끔직이도 불친절했던 웨이트리스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그날 밤 길거리에서 마시는 차가운 병맥주에 우리는 다리를 베베 꼬았다. 추위에 코트 깃을 세워 단단히 여몄다. 그러나  마음속 깊은 곳은 따스했다. 엉덩이가 차가워 오고 다리가 베베 꼬였지만 우리는 한참이고 자리를 지키고 앉았었다. 그렇게 너와 나는 돌들이 총총히 쌓인, 영화 속에서나 볼 법한 가스등이 흐드러진 유럽의 밤거리를 입김을 내뿜으며 걸었다. 그 순간 나는 이 모든 것이 마법이라 믿었다. 너와 내가 함께 걷던 그 한밤중의 베를린의 밤거리가 마법이라 굳게 믿었다.



안녕, 한때의 나의 우스갯 안사람.

너는 여전히 그곳에 있다.



불빛. 유리잔. 다이닝 테이블.


(다음 편에 계속.)



덧, 나의 추억을 위하여.

_쌀살한 크라이츠베르그의 밤거리를 걷던 우리는 자정이 다 된 시간 아주 험상궂은 얼굴로 거리의 한구석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베레모를 쓴 남자에게 길을 물었다. 그 세상에서 가장 험상궂은 얼굴을 한 남자는 입에 문 담배를 손에 들었고 눈썹을 꿈틀거리며 우리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세상에서 가장 천사 같은 얼굴로 우리에게 길을 가르쳐 주었다. 아, 마음을 열자. 보이는 것이 다는 아니다.


_우리가 다리를 베베꼬며 앉아있던 누이쾰른의 강다리. 그 돌다리 위에서 술 취한 두 건전한 주정꾼들이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알고 보니 저 멀리서 우리에게 윙크와 손짓을 보내는 여자들이 떨쳐낸 귀찮은 술 취한 수다쟁이들이었다. 우리는 정중했고 적당히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결국엔 흥미로운 사실을 알았다. 사상에 의해 갈라졌던 베를린. 그 보이지 않는 '다름'은 여전히 존재한다는 이야기를 말하던 그 이십 대 후반의 청년은 자신은 아직도 동베를린 쪽에 자주 가지 않는다 말했다. 술취했었기에 솔직할 수 있었던 이야기였을까? 뜻밖의 흥미롭던 현지인의 가만한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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