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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ssorim Feb 26. 2016

미드나잇 인 베를린. #2

_베를린, 취기 어린 너와 나의 밤.


너와 나의 밤은 끝이 없이 길었다. 너와 나의 밤은 도무지 아침이 내려앉아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너의 나라는 유럽의 동쪽의 어딘가였고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반으로 끊어져 있었다. 그 전쟁 때문에 너는 난민이 되어 너의 나라를 떠났고 독일을 거쳐 날아온 호주에서 너와 나는 처음 만났다.


너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 어떠한 역사 공부보다도 나의 뇌리에 꽂혔다. 나의 이야기를 했다. 그 어떠한 영어 공부보다도 제대로 설명하고자 하는 집중력이 강했다. 너와 나의 나라는 끊어져 있었다. 우습게도 러시아와 미국은 더 이상 서로에게 비우호적이지 않다. 그들의 차갑던 싸움은 오래전에 끝 맺혀 있었다. 그러나 너와 나의 나라는 여전히 온전히 하나로 이어질 수가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게 다른 사람들의 싸움에서 끊어져 버린 너와 나의 나라가 닮았다. 첫 번째 술자리에서 너와 나는, 그를 시작으로 우리의 많은 닮은 점들을 찾아냈었다.


너와 나의 밤의 풍경.



그렇게 우리가 다시 만난 베를린에서, 닮은 너의 작업실에 놀러 가게 되었다. 너는 베를린에 작업실을 가진 예술가였다. 우리는 너의 작업실 근처였던 커다란 마우어 파크의 입구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 저녁 나는 베를린의 버스에 올라탔었다. 아뿔싸, 스쳐가는 여행자에게 이국의 버스는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오분 남짓 늦어버렸고 너에게 연락할 수단 또한 가지고 있지 못했다. 추운 날의 밤거리에서 떨고 있을 너를 생각해 숨이 턱턱 막히도록 뛰었다. 공원의 입구까지 숨이 막히게 뛰었다. 곱슬곱슬한 머리를 하늘 위로 말아 묶은 너의 모습이 멀리서 보였다. 기다란 남색 코트에 발목까지 올라오는 워커를 신은 너는 커다란 와인병을 가슴에 안고 그 하얀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우리는 너의 작업실에서 와인 한잔씩을 마셨다. 너의 작업실은 오래된 학교 건물로 아주 높은 천장에 걸맞은 아주 키가 큰 커다란 하얀 문을 달고 있었다. 그렇게 하얗던 너의 작업실은 무언가 너를 닮아 있었다. 나는 언제나 진정한 너의 색깔을 가진 네가 빛나 보였고 어쩌면 그런 너를 보면서 '나의 색깔은 무엇일까' 고민했던 것 같다. 너는 나보다 열두 살쯤은 더 많았다. 그게 나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아무래도 나의 색은 아직 투명한 빛이었다. 그래서 나의 유일한 위안에 불안한 마음을 포개어 두고 너의 시간을 따라 내가 너의 나이쯤이 되었을 때, 그때는 비로소 나만의 색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너는 나에게 언젠가 다가올 앞날의 '나'를  올려다보게 해주었다.



그렇게 열두 살쯤은 나이 차이가 나던 너와 나이지만 우리는 많이 닮아 있었다. 그래서인지 우리가 함께일 때면 술에 취하지 않고도 술을 진탕 마신 것과 같은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어제와 내일이 아닌 지금 바로 이 순간에만 흠뻑 빠져 낼 수 있는, 그런 커다란  웃음소리를 거리에 뿌릴 수 있었다. 아, 네가 없었더라면 나의 베를린은 얼마나 메말랐을까!


베를린의 거리. 하얀 벽과 높은 천장이 흔하다.
그녀의 작업실 근처의 마우어 파크. 커다란 벼룩 시장과 거리 공연이 열려 일요일에 자주 찾았다.


나는 우리가 나눈 '취하지 않고도 술에 흠뻑 취한 듯한 '취기 어린', 어쩌면 '광기 어린' 웃음을 내는 순간들'에 나 스스로와 나의 삶이 무한하다고 느꼈다. 그런 온전한 행복의 순간에 나는, 오롯이 그 행복에만 취할 수 있다. 바로 너를 다시 만나서 그러한 무한한 순간의 베를린을 남길 수 있어 나는 행복했다. 함께한 상대가 나에 대해 평가하고 때로는 실망할 거란 일말의 걱정 없이 나의 모든 것을 드러낼 수 있던 밤들이 때때로 가라앉은 나를 포근하게 덮는다. 그렇게 나는 여전히 너와의 베를린을 그린다.



마지막으로 네가 내게 건넨 말, "앞으로 네가 무슨 일을 하든 나는 네가 잘 해낼 것을 믿는다." 그리고 우리가 가진 두 번의 포옹. 아, 너는 불안에 휩싸인 나의 어깨를 포근히 토닥이고 또 한 번의 포옹을 건넸었다. 우리가 언젠가 어딘가에서 또다시 만날 것 같은 아주 강한 예감이 든다고 너는 내게 달콤하게 속삭였다.


언제고 너는 나의 베를린, 페일 에일, 진토닉 그리고 모스코 뮬. 그렇게 닮은 우리가 전혀 기대치 못한 곳에서 또다시 만나 아무렇지 않게 술잔을 기울이기를. 어느 오월의 모스크바쯤에서 너를 마주하기를 바라본다.


베를린의 밤. Spree 강.



_미드나잇 인 베를린.


어느 취기 어린 밤 우리는 아주 우스꽝스러운 아파트 혹은 빌라를 보았다. 아니 우스꽝스럽다기보다 뭔가 기묘한 고풍스러움을 가진 건물이었다. 입구의 철창도 그만의 고풍스러움으로 휘어져 있었고 그 너머로 보이는 로비의 오묘한 불빛에 우리의 궁금증은 커져만 갔다. 실은 그를 들여다보는 우리의 모습이 더 우스꽝스러웠으리라. 키가 큰 곱슬머리의 여자와 조그마한 생머리의 꼬마가 엉덩이를 쭉 빼고 철창 틈새를 들여다보고 있는 꼴이란.


짐작치도 못한 사이 갑자기 바로 옆에 다가온 누군가가 우리에게 말을 시켰다. 무언가 죄지은 기분이 든 우리는 화들짝 놀랐다. 그는 덥수룩한 까만 곱슬머리에 까만 수염을 달고 둔한 손짓으로 뒤통수를 긁적였다. 검정 라이더 재킷과 늘어난 회색 티셔츠, 청바지에 검정 컨버스를 신은 남자는 미국인이라기엔 무언가 웅얼거리는 발음의 미국 영어로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궁금하면 집 안을 구경시켜 주냐는 것이었다.


놀란 내가 멍하게 있는 사이, 커다란 그녀의 눈은 호기심에 반짝였고 그 장난스러움을 두 눈에 가득 담아 나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우리는 그 덥수룩한 남자의 뒤를 따라 아파트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영화에서나 본듯한 로비였다. 아이보리빛의 대리석이 반짝였고 그 오묘한 조명들과 같은 샹들리에와 비상등이 있었다. 앞서 말한 기묘한 고풍스러움의 철창에서 이어진 듯한 검은 철제 손잡이를 따라 우리 셋은 대리석 계단을 올랐고 그는 자신의 집 문을 활짝 열어 완전한 이방인인 우리 둘을 들였다.


다른 누군가의 집을 들여다보는 일. 그의 기묘함이 있었다. 그 덥수룩한 남자는 또다시 머리를 긁적이며 냉장고에 맥주라도 있었으면 한잔하는 건데 아쉽다고 농담처럼 들리는 진심을 진지하게 꺼냈다. 그러곤 가장 신기한 것을 보여준다며 우리를 엘리베이터로 이끌었다. 엘리베이터의 층수 표시는 그의 말대로 가장 신기했다. 그는 화살표 모양으로 되어있었고 마치 자동차의 계기판처럼 층이 바뀔 때마다 그 화살표가 좌우로 움직였다. 얼핏 나침판 같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는 홀리듯 엘리베이터의 계기판을  들여다보았고 어느새 일층에 도착해 있었다. 그 덥수룩한 남자는 빠르게 우리를 엘리베이터로 밀어 넣은 뒤 이미 자신의 집으로 돌아간 뒤었다. 쿨한 끝인사를 남긴 채로. 우리는 그게 아주 능숙한 그만의 구경꾼 처리 방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건물 밖으로 나온 우리는 그 건물의 인테리어가 얼마나 끔찍하게 우스꽝스러웠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며 큰 소리로 웃었다. 그리곤 그 한밤중의 남의 집 건물 투어가 얼마나 기묘하고 우스꽝스러운 일이었는지에 또다시 큰 소리로 웃었다.


그 모든 게 바로 '너와 나의 밤'이었기에. 그리고 '베를린에서'였기에 가능했음에 그 밤, 너와 나는 끊임없는 웃음을 지었다. 포근한 소파에서의 와인에 진하게 취했었다.

_



안녕, 한때의 나의 영원한 술친구.

너는 여전히 그곳에 있다.



너의 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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