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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ssorim Feb 22. 2016

공항에서 만난 사람들.

_공항, 마음을 열다 그리고 담다.

크리스마스 하면 떠오르는 유명한 영화의 첫 장면과 같이 공항. 그 '공항'이라는 단어에는 묘한 매력이 있다. 때로는 눈물짓고 때로는 지루함에 몸부림 치고 때로는 기대 않은 작은 행운이 날아와 오래 기억될 웃음으로 남았다.


_멜버른, 텔레마린 공항.

사진은 멜버른 행 비행기를 기다리던 시드니 공항.

나의 비행기는 11시 55분 출발이었다. 멜버른 발 베를린 행. 한낮의 11시 55분이라면 떠남의 슬픔의 감상에 덜 젖을 수 있었을까? 최저가 항공임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비행기는 자정에 가까운 한밤의 11시 55분에 출발하였다. 실은 나는 그 마지막 날의 단 한 시간이라도 정든 멜버른에 더 머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한밤의 티켓을 끊었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도착한 공항. 한밤의 공항은 한낮의 그것과도 같이 분주했다. 길디긴 카타르 항공 대기선의 내 앞에는 덥수룩하게 수염을 덮은 흔한 호주인의 모습을 한 두 남자가 있었다. 그들 중 하나는 알록달록한 남국의 셔츠를 입고 앞으로는 아주 커다란 서핑보드를 끌어안고 있었다. 공항에서의 서핑보드라. 참으로 안 어울리는 조합이라 생각하며 그를 바라보다 눈이 마주쳤다.  그다음 나는 완전한 이방인과 자연스레 짤막한 대화를 나누었다. 따뜻한 스페인에 간다는 말, 둘 중 한 명만 떠나고 한 명은 그저 배웅을 하기 위해 왔다는 말, 그리고 나의 멜버른의 마지막이 바로 오늘 밤이라는 말.


오래된 여행에서 스스로 놀라운 점은 놀라울 만큼 자연스럽게 사람들과 내가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이다. 스치게 눈이 마주친다. 그 스치던 두 눈동자가 서로를 바라본다. 서로의 눈은 휘어지고 자연스레 미소를 짓는다. 그렇게 나는 사람들을 만났고 무언가를 건넸고 때로는 차갑거나 때로는 따뜻한 무언가를  건네받았다. 길 위에서 나는 혼자였으나 혼자가 아니게 되는 법을 배웠다.


그렇게 텔레마린 공항은 알록달록한 서핑보드로 나에게 남았다.



_파리, 오를리 공항.

어스름이 깔린 공항의 어딘가.

나는 파리 공항에 도착했다. 삼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내가 지난번 샤를 드 골 공항을 떠나며 꼭 다시 한번 파리에 오리라 다짐했던 그날부터. 파리는, 프랑스는 두려운 곳이었다. 호주나 영국, 혹은 독일과는 달랐다. 프랑스인은 프랑스어를 한다. 프랑스인은 프랑스어만을 한다. 소통의 부재에서 오는 혹시 모를 막막함을 나는 미리 조금 염려하고 있었다.


공항의 수화물 게이트에서 나의 커다란 검은 가방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밖은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늦은 저녁이었고 지친 나는 수화물 게이트 앞의 초록색 의자에 쓸쓸히 걸터앉았다. 그렇게 파리에 다시 돌아왔구나 하는 감상에 젖으려는 찰나 내 옆에 아주 가늘고 긴 다리를 가진 누군가 앉았다. 까만 스판 바지를 입고 요염하게 다리를 꼰 까만 피부의 그녀는 아마도 파리지앵 이리라.


우리는 자연스레 짤막한 인사를 주고받게 되었다. 그녀는 아프리카에서 날아와 파리에서 유학 중이라고 말했다. 프랑스어를 완벽하게 구사하진 않았지만, 그녀는 파리지앵이었다. 나는 이제 막 삼 년 만의 두 번째 파리에 도착했다고 말했다. 베를린에서 날아온, 호주에서 지내던, 한국인이라고 말했다. 실은 몽마르뜨 근처의 숙소에 가는 법, 아니 그저 공항을 빠져나가는 법에까지도 무지했던 나였다. 나는 그렇게 막 하는 여행을 좋아했고 그러다 언제나 좋은 사람들이 나타나 나의 길잡이가 되어주리라 믿었다.


그렇게 파리에서의 첫 길잡이는 그녀였다. 그녀와 나는 억수같이 비가 퍼붓는 공항 밖으로 나가 시내로 향하는 '오를리 버스'를 타기로 했다. 우리는 둘 다 우산이 없었고 각자 커다란 짐덩어리들을 짊어진 상태였다. 내가 먼저 표를 끊었다. 나의 짐들은 잠시 그녀의 그것들과 함께 비를 피하고 있었다. 돌아온 나는 낑낑 거리며 버스에 짐을 싣었다. 그녀도 짐을 싣었다. 이번엔 나의 차례였다. 나는 그날 처음 마주한 그녀의 짐을 맡아 버스 한구석에 우리의 모든 것을 지키고 앉았다. 순간 기분이 묘했다. 차창 밖으로는 비가 억수같이 퍼붓고 있었고 오늘 처음 만난 파리지앵은 남루한 초라한 동양인 여행자의 무엇을 믿고 자신의 모든 것을 맡겼다. 그랬었다.


그 저녁 비 오는 오를리 버스의 차창 너머로 나는 나와 그녀의 얼굴을 마주했다. 또한 우리들의 열린 마음을 마주했다.



_뉴욕, 존 F. 케네디 공항.

단지 JFK 였기에 찍은 사진. 일부로 나는 지상으로 나왔다.


뉴욕, 아 뉴욕 시티.

브루클린 브릿지에서 바라 본 맨하탄.


그 이름도 찬란한 '뉴욕 시티'는 나의 여정의 마지막 목적지였다. 그저 그 이름만으로도 마음이 설렜다. 실은 두려움의 두근거림도 있었다. 악명 높은, 열 손가락의  지문쯤은 내밀어야 통과할 수 있는 미국 입국 심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스웠다. 나는 베를린에서 '에어 베를린' 항공을 타고 편도로 뉴욕에 날아들었고, 수많은 독일인들 사이에서 홀로 멍하게 입국심사대에 줄을 섰다.


베를린의 공항에서부터 나에게 이런저런 서류를 요구했었다. 불안감에 미루어두었던 귀국 티켓을 구입해두었었다. 내 옆 옆 자리의 입국 심사관은 그 깐깐함이 어찌나 날카롭던지 벌써 두 명의 남자들이 그 칼에 찔려 찔끔거리고 있었다. 어느 날의 나도 짓곤 하던 온 세상이 주저앉는 여행자의 설움을 가득 안은 표정을 하고 그들은 우울하게 서성거렸다. 그 뒤의 남자는 슬금슬금 내가 있는 줄로 끼어들었다. 마침내 나의 차례는 왔고 나는 자연스럽게 카메라를 향해 어색한 미소를 짓고 열 손가락을 스캐너에 가만히 댄 뒤, 담당자의 눈을 바라보았다.


"쾅."

너무도 쉽게 나의 입국 도장은 찍어졌다. 그저 이전 체류국들을 훑어보던 그는 나에게 농담 하나를 던졌다. "뭐 로또라도 당첨된 거야? 무슨 세계일주를 해!" 그에 나는 사라진 긴장과 함께 스며든 미소를 지으며 열심히 일해 모은 돈이라 자부했다.



뉴욕 시내로 가는 '에어 트레인'이란 걸 타고 여덟  정거장쯤을 두 바퀴 돌았던 듯 싶다. 이제 출국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메트로 카드를 내놓으라는 강도질 아닌 동냥질을 하던 흔한 뉴욕의 불량배 아닌 사람들을 마주했고 2호선 순환 지하철처럼 끝도 없이 터미널들을 도는 에어 트레인을 이해하지 못했던 나는 1번부터 8번 터미널을 두 바퀴나 돌고 난 후에야 A Subway를 타는 곳에 도착했다.


뉴욕의 빛바랜 지하철.


메트로 카드를 만드는 것도 일이었다. 직원에게 수소문해 카드 구매기 앞을 서성이던 나와 비슷한 사람을 만났다. 실은 나와 같이 에어 트레인에서 헤매던 사람이었다. 그녀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나와 함께 내린 수많은 베를리너들 중 하나였다. 나는 모바일 지하철 지도가 있었고 그녀는 여느 관광객처럼 종이 지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운 베를린에서 온 그녀와 시내로 나가는 지하철에서 끝없는 수다를 떨었다. 우리는 한참을 헤맸고 한 시간이 지나도록 A Subway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환승역에서 한 정거장을 지나쳐버려 다시  돌아오는 데에 또다시 한 시간을 까먹었다.


그러나 나는 웃을 수 있었다. 우리는 웃을 수 있었다. 그녀와 내가 '함께'였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그러했을 것이다. 내가 슬픔 섞인 짜증에 주저앉아 커다란 캐리어를 던져버리고 싶은 마음을 품는 대신 차가운 뉴욕의 칼바람을 맞으며 시원하게 웃어낼 수 있었던 건 영화 캐스팅 매니저였던 그녀 덕분이었다. 익숙한 베를린의 억양을 가진 그녀는 나보다 열두 살쯤은 나이가 많았다. 한때는 배우가 되고 싶었다고 했다. 아니 실제로 배우가 되었었다고 했다. 그러나 주류가 되지 못한 여느 배우처럼 그녀는 나이를 먹었고 이제는 연기자가 아닌, 연기자를 캐스팅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했다.


우리의 숙소는 비슷했다. 헤어질 때의 우리는 이메일 주소를 교환했다. 나는 내 것을 적어 그녀에게 건넸다. 그리곤 안녕을 말하려 했다. 그러나 그녀는 잃어버릴 수 있으니 자신의 이메일도 적어주겠다며 나를 잡았다. 지금도 가지고 있는 나의 동전지갑 안에는 그녀가 정자로 적어준 그녀의 이메일 주소가 담겨있다. 우린 뉴욕에서의 여행 중 다시 마주하기를 약속했다.


묵던 호스텔이 있던 브루클린의 지하철 역.


우리도 길을 몰라 헤매던 지하철 안에서 그녀가 가지고 있던 관광객의 지하철 지도는 우리보다 길을 모르던 핀란드 여행객에게 건네어졌고 그 덕분에 우리는 환승역을 지나쳐 한 시간을 날렸었다. 그러나 그 덕분에 우리는 크게 웃을 수 있었고 다시 만나 그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를 곱씹어보자 약속했다.


그녀의 이메일 주소는 여전히 내 지갑 안에 소중히 담겨있다. 우리는 결국 뉴욕에서 만나지 않았다. 끝내 서로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아름다운 뉴욕을 만났기를 바랐다. 그녀도 나에게 같은 것을 빌어주었으리라 믿었다.


그렇게 매서운 바람이 불던 뉴욕 시티의 이름 높은 존 F. 케네디 공항.  나의  마음속 그곳에는 여전히 그녀가 있다.



나의  마음속 모든 공항들에는 그곳에서의 친절했던 사람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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