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접속'(1997)
'8월의 크리스마스'(1998)
'봄날은 간다'(2001)
'파이란'(2001)
'인어공주'(2004)
'사랑니'(2005)
'건축학 개론'(2012)
'연애의 온도'(2013)
'헤어질 결심'(2022)
'패스트 라이브즈'(2024)
내가 좋아하는 한국 멜로드라마 10편. '멜로드라마'라고만 지칭하기엔 저변이 넓은 영화들도 있지만, 적어도 이 10편은 내겐 로맨스 영화로 기억되는 작품들이다. '만약에 우리'를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 영화를 저 리스트에 포함시킬 수 있을까, 잠시 생각했다.
2.
임권택 감독의 말을 빌리자면, 안성기 씨는 희로애락을 과장하지 않는 배우였다. 들뜨지 않게 기쁨을, 찡그림 없이 아픔을, 눈물 없이 슬픔을 표현할 줄 아는 배우. 그리고 해사한 웃음. 유난히 곱고 맑았던 그의 미소를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 같다.
3.
2019년부터 기자 생활을 했으니 올해로 8년 차다. 몇 년 전, 진지하게 이 일을 그만하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한 선배가 이렇게 말했다. "흘러가는 대로 몸을 맡겨봐."
당시엔 숨 돌릴 틈도 없이 버거운 상황이라 무슨 저런 신선 같은 소리를 하나 싶어서 야속하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그때의 힘듦은 내 삶의 중요한 변곡점으로 남아있다. 그 시기가 없었다면 감히 이룰 수 없는 성과도 많았다.
그 이후로 힘들 때마다 선배의 말을 종종 떠올리게 됐다. 아등바등 애쓰기보다 그냥 흐름에 몸을 실어보자는 태도가 생긴 것. 그렇게 생각하면 신기하게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세상에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일이 더 많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삶은 조금 덜 버거워진다.
4.
그런 관계가 있다. 만나면 반갑지만, 평소에 자주 연락하지 않는 사이. 서로에게 큰 기대는 없지만, 상대방이 행복하길 바라는 사이. 오랜만에 만나도 어색하지 않고, 각자의 관심사에 대해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이.
그런 사람에게 "올해 목표가 뭐예요?"라고 물었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생존이요"라고 답했다. 그 한마디가 마음에 남아 한동안 자주 떠올리게 될 것 같다.
5.
언젠가 영화 리뷰에서도 쓴 적이 있는데, 우리가 멀어진 이유는 더 나은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른이 된다는 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려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몸의 감각을 믿게 되는 일이다.
'만약에 우리'가 품고 있는 정서 역시 이와 닿아 있는 듯하다. '한때는 당신이 나에게 가장 따뜻한 집이었어'라는 고백. 어쩌면 그것은 모든 멜로드라마가 관객에게 건네는 뒤늦은 당부이자 위로의 언어일지도 모르겠다.
'만약에 우리'는 이별 후에도 버젓이 흘러가는 시간성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영화다. 그 시간을 견딘 자만이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기. 서로를 원망하기보다 그때 당신이 나에게 가장 따뜻한 집이었다는 사실을 추억하기. 다시 볼 수 없어도 멀리서나마 상대의 앞날을 축복하기. '만약에 우리'가 관객들에게 선사하는 위로의 이미지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