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영화, 진짜 이야기’ 3
이번 주에 소개할 영화는 이준익 감독의 <동주>입니다. 이 영화는 시인 윤동주의 일대기를 그리고 있는 전기 영화(biographical film, 傳記映畵)입니다.
영화에는 윤동주 못지않게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바로 윤동주보다 4개월 먼저 태어난 사촌형 송몽규입니다.
영화에서 송몽규는 행동하는 혁명가의 모습으로, 윤동주는 고뇌하는 지식인의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이 영화는 다른 무엇보다 두 인물을 포착하는 카메라의 위치에 초점을 맞춰서 볼 때 흥미롭습니다.
영화에 관한 보다 자세한 이야기가 궁금하시다면 5월 10일(일) 오후 6시 20분, TBN(강원) <달리는 라디오> - ‘어떤 영화, 진짜 이야기’(FM105.9)를 들어주세요!
아래의 글은 제가 쓴 <동주> 리뷰입니다.
정지용의 시집 한 권에 얼굴을 환희로 물들였던 청춘. 특정의 이념보다는 삶의 가치가 중요했던 독립운동가. 계절의 움직임과 별 그리고 바람의 존재를 소중하게 생각했던 시인. 흑백의 스크린 위에 그려진 ‘윤동주’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에선 윤동주의 뒷모습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가 짊어졌던 절망과 회한 그리고 부끄러움이 서사의 주된 줄기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송몽규’는 앞모습이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신춘문예로 등단하고, 교토 제국대에 입학할 만큼의 수재였으나 문학과 공부에는 큰 뜻이 없었다. 오로지 민족의 완전한 독립과 자유에 골몰했으며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래서 카메라는 시종일관 송몽규라는 투사의 얼굴을 포착하는 데 주력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윤동주의 뒷모습과 송몽규의 앞모습에 관한 영화라 할 수 있으며 두 인물의 교차점이 뿜어내는 영화적 환영을 주시하는 것이 <동주>를 보다 흥미롭게 읽어낼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이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재일조선인 유학생을 앞에 두고 혁명 의지를 불태우는 송몽규와 시집 번역에 관한 일로 ‘후카다 쿠미’와 조심스럽게 통화하는 윤동주의 모습을 교차편집한 시퀀스다.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볼까”라는 윤동주의 내레이션과 “조선을 깨우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혁명이다”라는 송몽규의 대사는 그야말로 쇼트와 쇼트의 충돌을 보여준다. 이때 카메라는 윤동주의 뒷모습과 송몽규의 앞모습을 차례로 포착하며 두 인물의 낙차를 스크린에 아로새긴다. 영화의 비극은 그 낙차로 인해 발생한 시간의 현현에 있다. 그 시간은 우리가 책을 통해 배운 역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벗어난, 괄호 쳐진 빈칸의 역사 속에 있다. 영화는 그 공백을 ‘윤동주’가 아닌 ‘동주’라는 미시사로 영리하게 메우며 차마 기록되지 못한 역사의 상흔을 스크린 위로 강력하게 체현한다.
이렇듯 윤동주는 독립운동가이기 전에 시인이었고, 시인이기 전에 문학을 탐미했던 평범한 청춘이었다. 등장인물들의 대사에 따르면 문학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살아있는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암울한 세상으로부터의 도피처이기도 하다. 이는 서명을 강요하던 고등 형사에게 “이런 세상에 태어나 시를 쓰길 바라고, 시인이 되기를 원했던 게 너무 부끄럽다”던 윤동주의 울부짖음과 공명하며 그가 처했던 딜레마를 생생히 시각화한다.
<동주>를 수학적 개념의 하나인 '무한수열'에 비유하면 어떨까. 아마 윤동주는 일정한 값에 한없이 가까워지는 ‘수렴하는’ 무한수열일 테고, 송몽규는 양이든 음이든 무한대로 ‘발산하는’ 무한수열일 것이다. 그리고 역사의 수레바퀴는 그 어디에도 수렴하지 않고 발산하지도 않는, 특정한 값을 반복하는 ‘진동’의 힘으로 굴러가는 것이 아닐까. 비극의 운명에 속박된 진자 운동으로 보이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그네를 타고 있는 두 인물의 표정을 앙각(Low angle)으로 잡은 엔딩크레딧은 그래서 더 의미심장하다. 어쩌면 영화는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영화 <동주>는 자신이 자신에게 오롯이 충실할 수 있었던, 눈물에 겨운 소명을 가졌던 청춘들의 가슴 아픈 이야기다.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한없이 뻗어나가길 소망했던 꿈 많은 청춘들의 발자취를 카메라는 관조하듯 차분하게 담아낸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아스라해지기는커녕 더욱 분명해지기만 하는 시대의 잔영. 고통스럽지만 아름다운 삶의 의지. 존엄한 삶이란 결국 이런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