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석주 영화평론가 Jul 12. 2020

[명작으로 알아보는 영화 언어] ‘오프닝 시퀀스’

대중의 큰 사랑을 받았거나 강력한 팬덤을 보유하고 있는 영화를 선정하여 그 영화의 명장면을 분석합니다. 대중에게 친숙한 영화의 장면 분석을 통해 간단한 영화 언어를 습득할 수 있다면, 콘텐츠를 소비하는 관객들에게 영화를 조금 더 분석적으로 관람할 수 있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줄 것입니다.


책 『행복 소통의 심리』의 저자 나은영 교수는 “첫인상은 소통의 시작”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만큼 사람에게 첫인상은 상당히 중요한데, 영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화의 첫인상은 바로 ‘오프닝 시퀀스’(opening sequence)입니다. ‘타이틀 시퀀스’(title sequence)라고도 하는데,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등장하는 장면들의 집합을 말합니다.


대개의 감독은 오프닝 시퀀스에 영화의 전반적인 지향과 가치, 태도나 정서 등을 담습니다. 그러니까 오프닝 시퀀스는 영화의 ‘선언’이자 ‘출사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민재 감독, 영화 <작은 빛> 스틸컷

조민재 감독의 영화 <작은 빛>(2020)의 오프닝 시퀀스의 한 장면입니다. 영화의 주인공 진무(곽진무)는 달리는 버스에서 빠르게 지나가는 바깥 풍경을 카메라로 촬영하고 있습니다. 영화는 그러한 진무의 모습을 옆에서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는 총 두 대의 카메라가 있는 것이죠. 하나는 진무의 카메라, 다른 하나는 영화의 카메라. 이는 ‘찍는 것을 찍는’ 구도로써 영화에 대한 영화, 즉 메타시네마의 향기를 강하게 풍깁니다.


뇌수술 후 기억을 잃을 지도 모른다는 의사의 말에 진무는 자신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들을 카메라에 담습니다. 진무는 그 과정에서 자신의 잃어버렸던 과거를 되찾고, 가족에게 폭력을 휘둘렀던 죽은 아버지와 비로소 화해합니다. 진무는 이 모든 것을 ‘찍는 행위’를 통해 성취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독은 오프닝 시퀀스에서 “이 영화는 무언가를 찍는 진무를 옆에서 바라보는 영화입니다”라고 선언한 것이죠.


임대형 감독, 영화 <윤희에게> 스틸컷

임대형 감독의 <윤희에게>(2019)의 오프닝 시퀀스 중 한 장면입니다. 달리는 기차 안의 모습인데요. 그런데 이 시점은 전지적인 카메라의 시점일까요, 아니면 영화 속 인물의 시점인 걸까요.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을 차치하고 오프닝 시퀀스만으로 이 영화를 재단한다면, <윤희에게>는 기차를 타고 어딘가로 떠나는 영화임에는 분명해보입니다.


영화가 시작되고 나면, 우리는 윤희(김희애)가 자신의 첫사랑이었던 쥰(나카무라 유코)을 만나기 위해 한국에서 일본으로 떠나고, 쥰과의 짧은 재회 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위 오프닝 시퀀스는 영화 중반에 윤희가 자신의 딸 새봄(김소혜)과 함께 쥰을 만나기 위해 오타루로 향하는 전철 내부와 유사합니다. 그러니까 오프닝 시퀀스의 운동성은 바로 윤희의 운동성과 상통합니다. 그리고 이 영화는 로드무비로서의 장르적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 역시 오프닝 시퀀스의 기차와 연관해 생각해볼 수 있죠.


김보라 감독, 영화 <벌새> 스틸컷

김보라 감독의 <벌새>(2019)의 오프닝 시퀀스의 한 장면입니다. 카메라는 주인공인 은희(박지후)의 집 현관문에서 서서히 줌 아웃(zoom out : 피사체에서 멀어져 가는 것처럼 보이도록 하는 촬영 기법)하며 익명의 수많은 집을 포착합니다.


이 영화는 은희가 1994년에 겪었던 지극히 사사로운 체험들을 나열하는데,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면 은희의 체험이 곧 우리 모두의 체험으로 환원되는 역전 현상이 벌어집니다(성수대교붕괴사건 등). 어쩌면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인 이야기일 수 있다는 것을 이 영화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감독은 오프닝 시퀀스의 카메라 움직임을 통해 표출하고 있죠.


김진유 감독, 영화 <나는보리> 스틸컷

김진유 감독의 <나는보리>(2020)의 오프닝 시퀀스의 한 장면입니다. 영화의 주인공 보리(김아송)는 화면 바깥에서 화면 안으로 천천히 걸어들어옵니다. 뭔가 불안해보이지만 천천히, 아주 조금씩 걷고 있죠. 이내 보리는 누군가를 향해 해맑게 인사합니다. 그리고 다시 걸으면서 화면 밖으로 사라집니다. 이는 영화의 엔딩 시퀀스에서도 그대로 반복됩니다.


이 영화는 코다(coda : 청각 장애인 부모 밑에서 태어난 비장애인 자녀)인 보리의 성장담을 그리고 있습니다. 영화에서 보리는 코다로서 여러 어려움을 겪지만 끝내 그것을 극복하고 한 단계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원래 삶은 끝없이 불안하고 흔들리는 것이라고 했던가요. 동시에 삶이란 그런 불안과 흔들림 속에서도 묵묵히 앞으로 걸어 나가는 일일 것입니다. 감독은 그것을 오프닝과 엔딩 시퀀스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보리의 행위를 통해 명징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보리는 이렇게 천천히, 아주 조금씩 걷고 있으며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갈 것입니다”라는 걸 말이죠.


이처럼 오프닝 시퀀스는 영화의 저류에 흐르는 가장 큰 물줄기를 압축해 표현한 것입니다. 혹시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2019)의 오프닝 시퀀스를 기억하시나요? 카메라는 서서히 틸트 다운(tilt down : 카메라를 수직으로 밑을 향하여 움직이면서 촬영하는 기법)하며 인물을 압살하듯 포착합니다. 오직 이 장면으로만 영화를 표현해본다면, “기생충은 떨어지면서 누군가를 짓누르는 영화”입니다. 생각해보면 <기생충>은 하강과 몰락의 이미지가 강한 영화이죠. 그것을 감독은 오프닝 시퀀스의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카메라 움직임을 통해 ‘티’를 내고 있는 겁니다.


어떠신가요? 이제부터 영화의 첫인상인 오프닝 시퀀스를 유심히 보게 되겠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