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윤여정을 떠올릴 때마다 생각나는 말이 있다. 윤여정과 함께 오랫동안 작업했던 드라마 작가 노희경의 촌평이다. 그는 한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해 “윤여정처럼 등장인물을 모던하고 세련되게 이해하고, 해석하고, 표현하는 사람을 본적이 없다”고 말했다. 윤여정은 비슷한 나이대의 연기자들이 주로 가족에게 희생적인 ‘엄마’ 역할에 머무르고 있을 때, ‘여자’를 연기했다. 그는 동시대를 살고 있는 여자들의 현재와 미래, 욕망을 온몸으로 표현한 배우였다.
또한 노희경의 말처럼 윤여정은 지긋한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멜로를 제일 잘 할 것 같은 배우”이다. 그래서 윤여정에게는 ‘국민 엄마’라는 칭호가 어울리지 않는다. 한국영화에서 여자들이 등장하면 거의 대부분 남자들에 의해 강간당하거나 죽어나가던 시절에 그는 성녀와 창녀의 이분법적 구도를 허물고, 모성애 신화에 집착하는 충무로를 비웃으며 자신의 욕망을 마음껏 분출하는 삶의 단독자를 연기했다.
윤여정이 대중에게 처음으로 눈도장을 찍었던 영화는 아마 김기영의 <화녀>(1971)일 것이다. 영화에서 윤여정은 위선적인 가부장 사회에 균열을 가하는 하녀 ‘명자’를 연기했다. 이후 그는 오랜 공백을 깨고 1985년에 개봉한 박철수의 영화 <에미>에 출연, 인신매매단에 납치된 딸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어머니 ‘홍여사’ 역을 맡았다. 이 영화에서도 윤여정은 딸을 납치한 남자들을 상대로 기괴한 복수극을 펼치며 뒤틀린 모성을 연기해 큰 주목을 받았다.
2000년대 들어서 윤여정은 본격적으로 동년배의 배우들과는 확연히 다른 길을 걷게 된다. 그 징표와도 같은 영화가 바로 임상수의 <바람난 가족>(2003)이다. 영화에서 윤여정은 한국전쟁 후유증으로 성불구자가 된 남편을 두고 바람을 피우는 여자 ‘홍병한’을 연기했다. 남편이 죽고 난 뒤에는 자신만의 인생을 살겠다며 가족 앞에서 남자친구와의 결혼을 선언한다. 이어 윤여정은 2012년에 <돈의 맛>이라는 영화로 다시 한번 임상수와 호흡을 맞춘다. 재벌가의 최고 실세 ‘백금옥’ 역을 맡은 그가 젊은 남자 비서를 유혹하는 장면은 오직 윤여정만이 할 수 있는 연기로 회자된다.
영화 <죽여주는 여자> 스틸컷
이 외에도 윤여정은 홍상수의 <자유의 언덕>(2014)에서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게스트 하우스 사장 ‘구옥’ 역을, 이재용의 <죽여주는 여자>(2016)에서는 삶을 포기하고 싶은 사람들을 실제로 죽여주는 박카스 할머니 ‘소영’으로 분해 다채로운 모습을 선보였다. 이처럼 윤여정은 자식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쏟는 엄마 역할에만 국한하지 않고, 끊임없이 연기 변신을 시도하는 등 넓은 스펙트럼을 가진 배우로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