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미키 타카히로 감독이 연출한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를 봤습니다. 제목부터 일본 로맨스 영화의 분위기가 느껴지네요. 이 영화는 일본에서 작년 7월에 개봉했고요. 한국엔 두 달 전에 개봉해서 장기 상영하고 있습니다. 동명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했고요. 현재 90만 가까이 되는 관객수를 동원했습니다. 이 영화는 2000년대 이후 한국에서 개봉한 일본 로맨스 영화 가운데 흥행 1위를 기록하고 있어요. 역대 일본 로맨스 영화 중에서는 <러브레터>에 이어서 흥행 2위를 기록하고 있는 셈이죠.
영화에는 두 청춘이 등장합니다. 소녀 '마오리'와 소년 '토오루'인데요. 마오리는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자고 일어나면 전날의 기억을 잊어버리는 병을 앓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잠에서 깨면 기억이 사고를 당하기 직전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사고 이후 마오리는 늘 일기장을 봐야지만 자기가 사고를 당했고, 전날에 어떤 일을 했는지 알 수 있어요. 그 과정에서 마오리는 우연히 같은 학교에 다니던 토오루와 연애를 하게 됩니다. 이 같은 설정 때문에 약간은 판타지스러운 로맨스 영화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일본 로맨스 영화를 특별히 좋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와이 슌지 감독의 <러브레터>가 대표적이에요. 이와이 슌지 감독의 작품 중에서는 벚꽃의 풍경이 아름답게 펼쳐지는 <4월 이야기> 같은 영화도 있습니다. 또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나 <지금 만나러 갑니다>라는 영화 역시 한국 관객이 많이 접한 일본 로맨스 영화예요. 두 영화는 한국에서도 리메이크가 돼서 각각 한지민 씨와 남주혁 씨가 또 손예진 씨와 소지섭 씨가 주인공을 맡으면서 주목을 끌었죠.
반면에 일본 로맨스 영화가 취향이 아닌 분들도 꽤 있어요. 감정적으로 과잉적인 측면이 없지 않고, 일본어 특유의 억양 때문에 낯간지럽다는 이유에서인데요. 제가 그런 느낌을 받았던 최근의 일본 로맨스 영화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였습니다. 하지만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아사코>나 <드라이브 마이 카>처럼 몽환적이면서도 도회적이고, 동시에 서늘한 느낌의 로맨스 영화도 분명히 있습니다.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기억이 머리에 새겨지는가, 아니면 가슴에 새겨지는 가에 관해 질문하는 영화입니다. 자고 일어나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기억을 모두 잃는 여자와 그런 여자를 애인으로 두고 있는 남자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지점은 사람이 사랑을 기억하는 방식입니다.
가령 이불 밖으로 나가는 것도 귀찮아하는 사람이 연애를 막 시작할 땐 상대를 만나러 가거나 데려다주는 게 전혀 싫거나 귀찮지 않잖아요? 이것이 바로 사랑이 몸을 물리적으로 추동하는 것일 텐데요. 이 영화에서 사랑은 추상적인 감정이라기보다는 물리적인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오리가 병 때문에 매일 토오루에 대한 기억은 잊어버리지만, 토오루를 만나면서 했던 행동은 마오리의 내면에 계속 쌓이는 거예요. 미키 타카히로 감독은 그런 지점을 영화적으로 잘 시각화해서 보여줍니다.
이런 예도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허진호 감독의 <봄날은 간다>를 보면 상우가 은수에게 피를 멎게 하는 행동을 가르쳐줍니다. 상우와 헤어진 뒤에 은수는 자신도 인식하지 못한 사이에 상우가 가르쳐준 행동을 따라 하게 되는데요. 이게 전 애인의 행동이 나의 행동으로 전유된 거잖아요. 헤어지고 나면 상대방에 대한 기억이나 감정이 남을 수도 있지만, 상대방으로부터 내가 받았던 영향이 물리적인 행동으로 남게 되는 경우도 많으니까요. 사랑하면 서로를 닮는다는 말은 그래서 나온 것 같기도 합니다.
저번에 제가 크리스마스 추천 영화로 <캐롤>을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드린 적이 있는데요.
테레즈는 왜 하필 '맑다'라는 동사를 썼을까? 사랑이 사람의 머리를 맑게 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를 정확하게 사랑할 수 있다는 감각이 사람의 머리를 맑게 하는 것이리라. 사랑은 모호한 감정이 아니라 정확한 행동이다. 테레즈는 캐롤을 정확하게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캐롤을 만나 비로소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게 된 테레즈가 동성애를 부정하는 듯한 애인에게 "평생 오늘처럼 머리가 맑은 적이 없었어!"라고 일갈하는 장면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누군가를 정확하게 사랑한다는 것'에 관한 의미입니다. 자고 일어나면 모든 기억을 잊어버리는 마오리가 끝내 토오루를 잊지 못했던 이유. 그것은 아마도 마오리가 토오루를 정확하게 사랑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가 미학적으로 우수한 영화는 아니에요. 후반부의 전개가 다소 급작스럽고, 낡은 측면이 있거든요. 또 토오루 역을 맡은 미치에다 슌스케와 마오리 역을 맡은 후쿠모토 리코의 외모 덕분인지는 몰라도 영화를 보는 내내 근사한 아이돌 스타의 영상 화보를 보는 듯한 느낌도 들었습니다. 그러한 연출이 영화의 감상을 해치기도 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사랑과 기억이라는 소재를 적절히 결합해서 관객의 마음을 강하게 추동하는 힘이 분명히 있습니다.
이 영화는 1월 15일(일) 오후 2시 30분, TBN(강원) 두시N영화관(FM105.9)에서 자세히 소개했습니다.
여담
1. 제 인생 최초로 극장에서 혼자 본 영화입니다. 밤 10시 30분 영화였는데, 저 말고 아무도 없더라고요. 쉽게 하는 경험은 아닌데, 아무튼 참 묘하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