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제균 감독이 연출한 <영웅>은 동명의 뮤지컬을 영화로 옮긴 작품이에요. 그러니까 뮤지컬 영화고요. 안중근 의사가 만주 시찰을 위해 하얼빈역에 도착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전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정성화 씨가 뮤지컬에 이어 영화에서도 안중근 역할로 출연하면서 화제를 모았죠.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 다음으로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역사적 인물을 꼽을 때, 안중근 의사를 많이 거론하는 것 같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대한제국 시절 활동했던 독립운동가고요. 일본이 대한제국을 병탄하기 위해 설치한 조선통감부라는 기관이 있는데, 그곳의 초대 통감을 지냈던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역에서 저격한 인물입니다. 한국 입장에서는 침략의 원흉을 제거한 영웅이지요.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후 뤼순 감옥에서 순국합니다. 사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고요. 옥중에서 쓰셨던 ‘동양평화론’이 미완의 유서로 남아 있습니다.
주지하다시피 <영웅>은 뮤지컬 영화입니다. 뮤지컬 영화는 16세기 프랑스에서 발생한 보드빌(vaudeville)이라는 형식을 기원으로 하는 장르입니다. 보드빌은 춤과 노래가 결합한 통속 희극인데요. 노르망디 지역에서 불리던 풍자적 대중가요에서 비롯됐습니다. 뮤지컬 영화는 당연히 무성영화 시대에는 존재하기 어려웠고, 유성영화가 등장하자마자 인기를 얻기 시작한 장르예요. 이 장르는 기본적으로 밝고 경쾌합니다. 인물들이 고난에 빠지거나 갈등을 겪더라도 끝에 가서는 함께 춤과 노래를 부르면서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리는 특징이 있죠.
고전 뮤지컬 영화로는 <오즈의 마법사>나 <사랑은 비를 타고>, <사운드 오브 뮤직> 같은 작품들이 있고요. 한국에서 탄탄한 팬층을 형성하고 있는 <원스>나 <비긴 어게인>, <위플래쉬> 등의 영화들도 음악영화의 틀로 묶어서 뮤지컬 장르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대중적으로 가장 성공한 뮤지컬 영화는 아바의 노래로 이뤄진 <맘마미아>가 있습니다. 최근작으로는 <라라랜드> 같은 영화가 대중성과 작품성을 모두 인정받으면서 뮤지컬 영화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자리매김하게 됐죠. 디즈니에서 제작된 <미녀와 야수>나 <라이온킹>, <겨울왕국> 시리즈도 애니메이션을 기반으로 한 뮤지컬 영화입니다.
사실 한국 관객은 뮤지컬 영화를 그렇게 선호하지 않습니다. 음악과 관련한 영화들이 대체로 어렵다(정반대로 유치하다)는 고정관념이 있기 때문이에요. 이처럼 충무로가 취약한 장르 중 하나가 뮤지컬 영화라서 잘 제작되지도 않습니다. 한국에서는 신상옥 감독의 <아이 러브 마마>와 같은 고전 뮤지컬 영화가 있고요. <영웅> 직전에는 류승룡 씨와 염정아 씨가 출연했던 <인생은 아름다워>가 대중음악을 활용한 조금은 변칙적인 뮤지컬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영웅>에 관해 얘기해 보겠습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관람 포인트라는 게 딱히 없는 영화입니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카메라와 편집의 예술인데, <영웅>은 뮤지컬을 영화로 가져오면서 전혀 영화적으로 구현하지 못한 케이스입니다. 쉽게 말해 뮤지컬의 장면들을 카메라로 가까이에서 찍은 후 병렬적으로 죽 나열한 듯한 느낌이 든다는 거죠.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안중근이라는 역사적 인물을 다루면서 연출이 상당히 경박합니다. 극 중에서 안중근이나 독립운동가들의 행위를 코미디나 액션으로 눙치는 부분이 너무 많아요. 특히 영화 초반부에 배정남 씨가 연기한 '조도선'이라는 인물이 시계탑에서 일본 경찰들을 저격하는 전후의 총격과 추격 장면은 전형적인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식 연출입니다. 안중근 의사가 지붕에서 달리는 마차 위로 떨어지는 액션도 그렇습니다. 너무 유치해서 아연할 정도예요.
안중근을 제외하고 이 영화에 등장하는 다수의 캐릭터들은 기능적으로 소비됩니다. 박진주 씨가 연기한 '마진주'라는 캐릭터를 다루는 방식을 보면, 이 영화의 미진한 젠더 감수성을 알 수 있어요. 외모로 이상한 농담이나 따먹거든요. 더욱 심각한 것은 명성황후에 관한 부분입니다. 윤제균 감독은 명성황후에 국모 프레임을 씌우는 데에서 나아가 그의 시해 장면을 필요 이상으로 전시합니다. 2023년에 이르러 명성황후의 뛰는 심장을 움켜잡으며 웃는 야쿠자의 얼굴을 스크린으로 봐야 하는지요. 이는 시대적 감수성과 맞지 않는 연출입니다.
또 김고은 씨가 연기한 '설희'라는 캐릭터가 명성황후를 보좌했던 궁녀로 나오는데요. 설희는 명성황후의 복수를 위해 일본 최고의 게이샤가 되어 이토 히로부미의 측근이 됩니다. 그의 곁에 있으면서 독립운동가들을 위해 일종의 정보원 역할을 하는 거죠. 이게 말이 되는 캐릭터 설정인가요? 정황상 이토 히로부미는 설희가 조선인인지도 몰랐던 거로 보입니다. 대한제국의 궁녀가 일본인도 속일 만큼의 완벽한 일본어를 구사하면서 게이샤로 변모해 이토 히로부미의 측근이 된다? 개연성도 없고, 전혀 현실적이지도 않죠.
설희가 이토 히로부미의 살해에 실패하고, 자살하는 전후의 과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구금된 설희는 일본의 원수급에 해당하는 자를 살해하려 했던 사람인데, 갑자기 늦은 밤 별다른 제지 없이 자연스럽게 문을 열고 나와서 자살합니다. 서사적으로 말이 되는 일인가요? 이렇듯 <영웅>은 장면과 장면 사이에 최소한의 연결 고리가 없는 영화입니다. 설령 원작에 그런 캐릭터 설정과 내용이 있더라도 과감하게 삭제하거나 영화적으로 적절하게 변용해야 하는데 윤제균 감독에게는 그런 의지가 없어 보입니다.
<영웅>은 참담한 수준의 뮤지컬 영화입니다. 이건 배우의 탓이 아니라 오롯이 연출의 문제입니다. 뮤지컬 영화니까 스토리는 좀 허술해도 된다? 뭘 그렇게 세세하게 따지냐? 이는 뮤지컬 영화에 대한 모독입니다.
이 영화는 1월 8일(일) 오후 2시 30분, TBN(강원) 두시N영화관(FM105.9)에서 자세히 소개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