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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석주 영화평론가 Nov 20. 2022

고전적이면서도 세련된 퀴어영화

영화 <파이어 버드>(2022)


이 영화는 젊은 군인 '세르게이'와 전투기 조종사 '로만'의 사랑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세르게이 페티소프라는 배우의 실제 경험을 담은 작품이에요. 영화를 연출한 피터 리베인 감독이 10여 년 전에 '로만 이야기'라는 책을 읽고, 이 책을 영화로 만들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1970년 냉전(cold war) 시대 때, 에스토니아의 소련 공군 기지에서 2년 간 의무 복무를 했던 세르게이가 당시 같은 부대의 전투기 조종사였던 로만을 보고 첫 눈에 반하게 되면서 겪게 되는 이야기를 담은 회고록이 바로 '로만 이야기'입니다. '파이어 버드'는 '로만 이야기'를 스크린으로 펼쳐낸 작품이고요.


퀴어는 한국어로 '이상한'이라는 뜻입니다. 원래 성소수자를 비난하는 용어였는데, 성소수자들이 오히려 이 용어를 자신들의 정체성을 표출하는 데 적극적으로 사용하면서 일종의 정치적 언어가 됐어요. 이를테면 "그래, 나 이상한데 어쩔래?" 뭐 이런 의미가 퀴어에 담겨있는 겁니다. 퀴어영화는 성소수자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거나 성소수자와 관련한 서사가 펼쳐지는 영화를 말합니다. 인간의 여러 정체성 중에 인종이나 성별, 나이 등은 대충 겉으로 티가 나잖아요. 근데 성 정체성은 당사자가 말하지 않는 이상 잘 모르거든요. 그런 점에서 퀴어영화는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퀴어들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한편으로는 굉장히 공적인 느낌도 있는 거죠.          

 

대중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퀴어영화는 이안 감독이 연출한 '브로크백 마운틴'입니다. 할리우드 톱 배우들인 제이크 질렌할과 지금은 고인이 된 히스 레저가 주연으로 활약했고요. '브로크백 마운틴'은 '파이어 버드'와 서사적으로 아주 유사한 작품이에요. 우연히 만난 두 남자가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주변 환경이 이들의 사랑을 지속할 수 없게 합니다. 그래서 두 남자는 서로의 정체성을 외면하면서 살다가 가끔씩 만나서 사랑을 나누게 되는데요. 퀴어영화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분들은 '파이어 버드'를 보자마자 '브로크백 마운틴'을 떠올릴 것 같네요.          


주지하다시피 이 영화는 냉전이라는 시대적 상황과 폭력을 관리하는 군대라는 공간에서 동성 간의 사랑을 그리고 있습니다. 영화의 시간적 배경과 공간적 배경 그리고 동성애라는 소재가 유기적으로 잘 맞물린다고 볼 수 있어요. 우리가 흔한 수사로 '전쟁 같은 사랑'이라고 표현하잖아요. 동성 간의 사랑, 정확하게 말하면 동성결혼을 일부 국가에서는 제도적으로 용인하고 있지만, 여전히 많은 국가에서 금지하고 있습니다. '파이어 버드'는 동성 간의 사랑이 엄격히 금지되었던 소련에서 일어난 실화라서 더욱 여운이 남는 영화라고 할 수 있죠.


주인공들의 직업에 관해서 좀 말하고 싶습니다. 우선 로만은 직업 군인으로서 전투기 조종 일을 하는데요. 남성적인 활력이 넘쳐나는 군대라는 공간에서, 그것도 하늘을 나는 조종사라는 직업은 어떤 점에서 굉장히 자유롭고 마초적이잖아요. 군대와 조종사라는 단어에는 남자다움을 과시하고 우월하게 여기는 모종의 분위기가 담겨 있다는 말입니다. 근데 로만이 사랑에 있어서는 소수자이고, 억압적인 삶을 사는 거잖아요. 로만의 성 정체성과 직업 사이에서 오는 충돌의 이미지가 이 영화 도처에 깔려 있습니다. 아울러 의무 복무를 하던 세르게이는 전역하고 난 뒤에 배우의 길을 걷는데요. 무대가 아닌 현실에서도 자신의 성 정체성을 연기하면서 살아야 하는 거니까 두 인물의 직업이 정체성과 부딪히는 데서 오는 극적인 재미 같은 것들이 영화에 있습니다.

    

굉장히 고전적인 느낌의 퀴어영화입니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동시대 관객들과 호흡하기에 구식으로 느껴진다거나 촌스럽진 않아요. '브로크백 마운틴'이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처럼 고전적이면서도 세련된 퀴어영화가 보고 싶으신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이 영화는 11월 20일(일) 오후 2시 30분, TBN(강원) 두시N영화관(FM105.9)에서 자세히 소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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