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리 감독이 연출한 <다음 소희>는 지난해 열린 제75회 칸영화제 비평가주간 폐막작에 선정된 작품입니다. 칸영화제 비평가주간은 프랑스평론가협회 소속 평론가들이 선정한 작품을 상영하는 섹션입니다. 국내영화로는 허진호 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1998)가 해당 섹션에 초청된 적이 있습니다. <다음 소희>는 한국영화 최초로 비평가주간 폐막작에 선정되면서 주목을 끌었습니다.
이 영화는 '소희(김시은)'라는 여고생이 졸업을 앞두고, 콜센터로 현장 실습을 나가서 겪게 되는 일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소희가 속한 팀은 방어팀이에요. 서비스를 취소하려는 고객을 어떻게든 설득해서 그것을 유지하도록 만드는 일이지요. 고객이 감정적으로 화를 내거나 욕하는 상황이 다른 팀보다 더 많은 거예요. 콜센터 안에서도 가장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팀에 소희가 배치된 거죠.
<다음 소희>는 한 여고생이 현장 실습을 나가서 부당한 처우를 받는 상황을 비판적 시선으로 조명한다는 점에서 사회고발영화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콜센터 노동자의 고충과 애환을 다룬다는 점에서는 노동영화로서의 장르적 특징이 있는 영화이기도 하고요. 복지 제도의 모순점을 꼬집은 켄 로치 감독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와 여성 노동자들의 애환을 그린 부지영 감독의 <카트>(2014) 같은 영화와 궤를 같이 합니다.
이 영화는 소희가 당하는 일들을 구조적인 관점에서 파헤치고 있어요. 회사에서의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소희는 결국 자살하는데, 그 사건을 '유진(배두나)'이라는 형사가 담당하게 됩니다. 수사 끝에 유진이 알게 되는 것은 이 사건이 단순히 소희의 일탈 문제도 아니고, 그 콜센터만 유독 근무 환경이 나빠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거예요. <다음 소희>는 과도하게 경쟁하는 줄 세우기 문화가 학교와 회사 그리고 사회 전체에 퍼졌을 때, 그것이 얼마나 한 개인을 파국으로 몰아가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극 중에서 소희는 춤추는 걸 좋아하는 여고생으로 나와요. 영화는 시작하자마자 소희가 혼자 연습실에서 춤추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소희는 춤을 단순히 취미 활동으로 여긴 게 아니라 직업으로도 연결해보고 싶은, 일종의 꿈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그 꿈이 좌절되고, 콜센터로 오게 되면서 안 좋은 일들을 겪게 된 거죠. 그건 소희의 친구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앞서 이 영화가 소희의 춤추는 장면으로 시작한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이때 카메라는 소희를 뒤에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소희는 계속 특정 동작을 실패하고요. 이와 달리 마지막 장면은 소희의 자살 이후, 소희의 휴대폰을 검수하는 유진의 시선으로 전개됩니다. 유진은 소희의 휴대폰 속 영상을 보게 되는데, 여기서 소희는 계속 실패했던 동작을 성공하며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여요. <빌리 엘리어트>(2001)에서 피루엣(pirouette)을 처음으로 성공하며 미소를 짓는 빌리처럼요.
<다음 소희>는 소희의 춤추는 모습으로 시작하고, 끝나는 영화입니다. 누군가의 시선(카메라의 시선/첫 장면)에서는 소희가 직업적인 댄서를 하기엔 실력이 좀 부족한 사람으로 비쳤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유진의 시선(소희의 휴대폰의 시선/마지막 장면)에선 충분히 댄서로서의 성장 가능성이 있는 모습이었단 말이죠.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의 대비에 바로 이 영화의 비극성이 있습니다.
소희는 자살하기 직전에 한 시골 가게에서 맥주를 마십니다. 그 순간 문틈 사이로 아스라한 빛이 비치는데요. 이 빛은 소희의 사건을 수사하다가 좌절된 유진이 소희가 마지막으로 다녀갔던 그 가게에 갔을 때 똑같이 그녀를 비춥니다. 이 빛은 아침에 뜨는 해가 아니라 석양(夕陽)인데요. 무너지는 건 그들의 마음뿐만 아니라 세상을 비추는 해도 마찬가지였던 셈이죠.
이 영화는 2월 12일(일) 오후 2시 30분, TBN(강원) 두시N영화관(FM105.9)에서 자세히 소개했습니다.
여담
1. 저는 이 영화를 지난해 칸영화제에서 직접 봤는데요. 그때 본 영화들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작품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