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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석주 영화평론가 Mar 09. 2023

'평등'과 '형제애'의 도시 필라델피아

영화 <필라델피아>(1993)


오늘 소개할 영화는 조나단 드미 감독의 <필라델피아>(1993)입니다. 퀴어영화이자 법정영화, 버디무비로서의 장르적 특징이 있는 영화예요. 톰 행크스와 덴젤 워싱턴이 주연으로 출연했습니다. 할리우드에서 최초로 제작된 퀴어영화가 바로 <필라델피아>예요. 이전에 동성애자들이 등장하거나 에이즈를 소재로 한 영화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것들이 서브플롯에 한정되거나 주변적 소재에 그쳤거든요. <필라델피아>는 할리우드라는 주류 영화 제작 시스템에서 스타 배우들을 기용하여 동성애자와 에이즈 소재를 전면에 내세운 최초의 영화입니다. 이 영화로 톰 행크스는 생애 첫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그는 이듬해 <포레스트 검프>(1994)로 재차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게 되는데요. 이 시기가 행크스의 황금기였죠.


행크스가 맡은 '앤드류'라는 캐릭터는 유능한 변호사이자 게이입니다. 하지만 에이즈에 걸리게 되고, 회사는 '무능력'을 이유로 그를 해고합니다. 이 같은 회사의 결정에 앤드류는 의심을 품게 되는데요. 즉 무능력은 표면 상의 이유이고, 자신이 게이이자 에이즈에 걸렸기 때문에 해고당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앤드류는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려고 하는데, 변호사들이 사건을 맡지 않으려고 합니다. 아마도 동성애 혐오 때문이겠지요.


앤드류는 자신의 라이벌 변호사였던 '밀러(덴젤 워싱턴)'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밀러 역시 동성애 혐오자라 처음엔 앤드류의 요청을 거절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밀러는 앤드류가 에이즈에 걸렸다는 이유로 차별받는 상황을 직접 목격하게 되면서 그를 돕기로 결심합니다. 그러니까 <필라델피아>는 에이즈에 걸린 게이 변호사가 부당하게 해고당한 뒤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고자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과정을 다룬 퀴어영화이자 법정영화입니다. 또 이 과정에서 동성애 혐오자였던 밀러가 앤드류의 처지와 마음을 이해하고, 둘의 교감과 우정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버디무비로서의 장르적 특징도 있죠.


왜 제목이 필라델피아일까요? 필라델피아는 미국 최초의 수도였습니다. 그래서 미국 건국과 관련한 일화가 많은 도시예요. 미국의 독립 선언문이 작성된 곳도 바로 필라델피아입니다. 독립 선언문에는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라는 내용이 있는데요. 자유가 보수의 최대 가치라면, 평등은 진보의 최대 가치잖아요. 실제로 필라델피아는 미국 전체에서 진보 성향이 가장 강한 도시 중 하나입니다. 또 필라델피아는 그리스어로 '형제애'라는 뜻인데요. 미국에서 평등의 가치가 최초로 발현된 도시에서 동성애자가 에이즈에 걸렸다는 이유로 차별받는 상황을 그리고 있기 때문에 영화의 공간적 배경과 그 공간 속에서 벌어지는 상황이 대조되면서 주제가 효과적으로 전달되는 거죠.


영화의 첫 장면에서 카메라는 필라델피아의 평화로운 일상을 포착하는데요. 그러다가 중간중간에 높은 빌딩, 공사 중인 현장, 거리에 내몰린 빈민 등을 연쇄적으로 포착합니다. 즉 표면적으로는 평화롭고 따뜻한 분위기의 도시지만, 거기에도 언제나 사회적 약자는 있기 마련이라는 걸 영화가 보여주는 거죠. 다시 말해 이러한 영화의 첫 장면은 평등과 형제애의 도시인 필라델피아와 그 속에서 성소수자로서 차별받는 앤드류를 연상시킵니다.


백인 남성이 전통적 기득권이지만 앤드류는 동성애자고, 흑인 남성은 상대적으로 차별받는 존재지만 밀러는 이성애자라는 점에서 두 캐릭터는 각각 다수자이자 소수자로서의 정체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습니다. 인종과 젠더의 위계가 교차하는 것이죠. 두 캐릭터가 모두 다면적이고, 입체적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소수자성을 갖고 있고, 그것을 이유로 차별받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이 영화가 보여주고 있어요.


밀러는 앤드류의 변호를 맡지만, 끊임없이 동성애를 혐오하는 태도를 취합니다. 특히 초반부에는 "나도 동성애를 혐오하지만, 해고 과정에 위법이 있다"는 식으로 접근해요. 즉 동성애는 별개로 하고, 앤드류에 대한 회사의 처분을 법리적으로 따지는 거죠. 근데 이 사건의 본질은 회사의 부당해고가 동성애 혐오에서 비롯됐다는 거잖아요. 그걸 마침내 인식한 밀러는 앤드류를 진심으로 응원하고 존중하게 됩니다. 밀러가 무조건적으로, 슈퍼맨처럼 앤드류를 도와주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영화는 밀러를 통해 개인의 태도와 선택에 있어서의 어떤 딜레마를 자꾸 보여주면서 설득력을 강화하고 있어요. 관객이 앤드류보다는 밀러에게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 동일화 대상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전략은 굉장히 유효한 거죠.


영화 후반부에 톰 행크스가 오페라(움베르토 조르다노의 오페라 <안드레아 셰니에> 중 마리아 칼라스가 부르는 아리아 '어머니는 돌아가시고')를 들으면서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 오페라는 슬픈 현실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말자는 내용을 골자로 합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이고, 조명도 굉장히 연극적인데요. 톰 행크스는 이 장면에서 "내가 삶이고, 내가 사랑이다"라는 대사를 하는데, 톰 행크스의 연기가 절정에 달하는 순간입니다. 여기에서 밀러는 앤드류의 진심을 이해하게 되죠.


<필라델피아>는 2018년에 개봉한 피터 패럴리 감독의 영화 <그린 북>과 비슷해요. 여기서도 캐릭터의 인종, 젠더, 계급이 교차하는 구도로 진행되거든요. 비고 모텐슨이 연기한 '토니'라는 캐릭터는 이성애자 백인 남성이지만, 직업이 변변찮고 가난해요. 마허샬라 알리가 연기한 '돈 셜리'는 동성애자 흑인 남성이지만 직업이 피아니스트고 부자거든요.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62년 미국은 인종 차별이 극심했던 시기였는데, 셜리에게는 토니와 같이 싸움 잘하는 백인 남성의 운전기사 겸 보디가드가 필요했던 거예요. 이 영화는 백인 남성인 토니와 흑인 남성인 셜리가 함께 미국 남부로 투어 공연을 떠나면서 겪게 되는 일들을 그린 영화입니다. 두 영화를 비교해서 보면 더 재미있어요.



이 영화는 3월 9일(목) 오후 10시 15분, TBN '낭만이 있는 곳에(100.5MHz)'에서 자세히 소개할 예정입니다.



첫 방 때 기념으로 몰래 찰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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