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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석주 영화평론가 Mar 16. 2023

내 마음의 모양을 알아준 사람

영화 <레옹>(1994)


오늘 소개할 영화는 1994년에 개봉한 뤽 베송 감독의 <레옹>입니다. 장 르노와 나탈리 포트만, 게리 올드만 주연으로 출연했습니다. 할리우드에서 제작된 미국영화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요. 프랑스인 감독이 프랑스 자본으로 만든 프랑스영화입니다. 배경만 미국 뉴욕이에요. 세계적으로 총 4000만 달러가 넘는 수익을 거뒀습니다. 한국에서도 수도권 기준 60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습니다. 개봉 이후 한국에서 레옹의 모자와 안경, 코트를 따라 입는 '레옹 신드롬'이 유행하기도 했지요.


장 르노가 맡은 '레옹'이라는 캐릭터는 청부살인업자입니다. 옆집에는 가정 폭력에 시달리는 소녀 '마틸다'가 살고 있는데요. 이 역할을 나탈리 포트만이 맡았습니다. 어느 날 마틸다의 가족이 마약 사건에 연루되는데, 마약단속국 소속이지만 사실상 마약을 밀수하는 깡패나 다름없는 경찰들에게 무참하게 살해됩니다. 이 부패 경찰 '스탠' 역을 게리 올드만이 맡았어요. 영화는 가정 폭력에 시달렸던 마틸다가 가족 중 자신이 유일하게 좋아했던 남동생의 복수를 위해 레옹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레옹>은 범죄 장르의 갱스터 영화와 멜로드마라의 특징이 적절하게 배합된 영화입니다. 고전적 할리우드 갱스터 영화는 깡패나 경찰들의 활극에만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이 영화는 관객들에게 액션 장면의 쾌감을 선사하면서도 레옹과 마틸다의 정서적 교감을 조각하는 데 주력합니다. 말하자면 비일상과 일상이 적절한 균형을 이루는 범죄영화예요. 중년의 남성이 가족을 잃은 아이의 복수를 위해 자신의 몸과 마음을 던진다는 점에서 원빈이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 <아저씨>(2010)와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레옹하면 선글라스, 우유, 화분 등이 떠오릅니다. 선글라스는 세상(혹은 사람)과 단절된 레옹의 생활을 보여줍니다. 레옹은 잠도 제대로 자지 않고, 문맹이기도 하고, 늘 우유를 마시는데요. 이러한 설정은 그가 어른이 아닌 아이의 모습에 더 가깝다는 걸 표상합니다. '덜 자란 어른'인 셈이죠. 대개의 갱스터 영화 속 남주들은 프로이트식으로 말하면 유아기를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 많은데요. 폭력과 살인 등의 행위를 일삼지만, 굉장히 천진난만하고 유치한 면모를 보이기도 합니다.



또 레옹은 화분에 강한 집착을 보이는데요. 마틸다가 "화분을 왜 그렇게 사랑하느냐?"고 묻는데, 레옹이 "항상 행복해하고 질문도 안 해. 나처럼 뿌리도 없어"라고 대답합니다. 땅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화분은 레옹의 상황과 겹칩니다. 즉 화분은 레옹의 분신이라는 점에서 '화분=레옹'이라는 도식이 성립하죠.


마틸다는 매우 불우한 가정환경에 놓여 있는 소녀입니다. 아빠의 폭력과 새엄마의 무관심 속에 방치돼 있죠. 그래서 또래에 비해 어른의 느낌이 많이 납니다. 마틸다가 "나는 다 컸어요. 나이만 먹으면 돼요"라고 말하자 레옹은 "나랑 반대구나. 난 나이는 먹을 만큼 먹었어. 문제는 아직 어려서 그렇지"라고 대답하는데요. 두 캐릭터의 성격과 구도를 한 번에 보여주는 대사예요. 영화를 보고 있으면 마틸다가 어른 같고, 레옹이 아이 같을 때가 많습니다.


마틸다는 글쓰기를, 레옹은 총쏘기를 서로에게 가르쳐 준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누가 누구를 일방적으로 도와주거나 구원하는 서사는 아닙니다. 둘은 서로에게 강한 정서적 유대감을 느끼고, 동등한 입장과 위치에서 교류하고 교감합니다. 남성이 여성을 구원하는, 남성 영웅 만들기 서사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중년 남성인 레옹과 12세 소녀 마틸다의 성적 긴장감에 초점을 맞춘다고 비난을 받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들의 관계를 남녀 관계로 재단하기엔 너무도 복합적인 감정이 둘 사이를 흐르고 있어요. 오히려 둘을 유사 부녀 관계로 보는 게 더 적합한데요. 정상적인 과정에서 제대로 된 돌봄을 받지 못한 마틸다가 레옹에게 느끼는 것은 연인으로서의 끌림이 아니라 아버지에게 느끼는 부(父)를 향한 정, 즉 인간애에 더 가깝습니다.



레옹과 마틸다가 헤어지는 장면에서 레옹은 "네 덕에 삶이 뭔지도 알게 됐어. 나는 행복해지고 싶어. 잠도 자고 뿌리도 내릴 거야. 사랑해"라고 말합니다. 과거의 아픈 기억으로 어쩔 수 없이 킬러의 삶을 살며 방랑했던 레옹. 이 장면은 그런 레옹이 마틸다를 향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의 진심을 전하는 순간입니다. 결국 인생은 친한 지인이 아닌, 어느 날 우연히 만난 누군가로부터 위로를 얻는 과정의 연속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마틸다를 먼저 구해주고 밖으로 나가던 레옹을 스탠이 뒤에서 저격한 뒤 확인 사살을 위해 다가가는데요. 그 순간 레옹이 스탠의 손에 수류탄 안전핀을 쥐어주면서 "이건 마틸다의 선물"이라는 대사를 합니다. 자신의 손에 있는 게 수류탄 안전핀이라는 걸 안 스탠이 "젠장"이라고 나지막이 읊조리는데, <레옹>의 명장면 중 하나예요. 영화 초반에 레옹이 마틸다에게 총쏘기를 가르쳐주면서 수류탄 사용에 대해 "이도 저도 안 될 때 사용하는 최후의 보루"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는데요. 이는 후반부 폭사 장면에 대한 복선이었던 것이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 마틸다는 학교 앞 공원에 레옹의 화분을 옮겨 심습니다. 그러면서 마틸다는 "I think we'll be okay here, Leon"이라는 대사를 하는데요. 비록 레옹은 죽었지만, 마틸다는 그의 분신과도 같은 화분을 공원에 심으면서 레옹이 뿌리를 내리도록 도와줍니다. 마찬가지로 마틸다도 레옹으로 인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된 거니까 결국 이 장면은 사람이 사람을 해치기도 하지만, 사람을 구원하는 건 또 사람 밖에 없다는 걸 보여준다고 할 수 있죠.


마틸다가 레옹의 화분을 공원에 옮겨 심는 영화의 엔딩 장면에서 스팅의 <Shape Of My Heart>가 흐릅니다. 제목 그대로 이 노래는 마음의 형상에 관한 화자의 딜레마를 그리고 있는데요. 누군가의 마음이나 진심을 완벽하게 알기란 불가능하다는 내용이에요. 그런 점에서 사랑에 빠진다는 건 서로가 서로의 마음의 모양을 알아준다는 것과 비슷한 일일 것입니다. 레옹과 마틸다는 서로의 마음의 모양을 알아준 사람이었고요.



이 영화는 3월 16일(목) 오후 10시 15분, TBN '낭만이 있는 곳에(100.5MHz)'에서 자세히 소개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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